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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110화 (109/122)
  • @110화

    토트린은 숨도 쉬지 않고 걸음 소리에 온갖 신경을 곤두세웠다.

    ‘둘, 아니, 셋. 아니, 넷?’

    그중에 마르타가 있지 않을까? 네 명 중에 마르타는 있겠지! 토트린은 눈동자를 마구 뒤흔들며 다리를 발발 떨었다.

    “오셨습니까, 대공 각하!”

    “마르타, 마르타!”

    침을 뚝뚝 흘리며 발악하자, 밀러는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마르타, 이, 이 아비가 이렇게 살았다! 이렇게 살아남았단 말이다!”

    “웃기지도 않군. 꼬박꼬박 식사까지 챙겨 줬건만, 뭐 얼마나 힘들었다고 엄살은.”

    “마르타는? 마르타는 왜 안 보이지?”

    “마르타는 미리안과 함께 떠났어. 지금쯤이면 마차도 출발했겠군.”

    토트린은 바보처럼 넋을 빼고 그를 바라봤다. 입술을 어버버 떨며, 고개를 잘게 떨었다.

    “그, 그년이랑 왜, 왜? 왜?”

    “토트린 경이 봐도 그쪽은 최악의 인간이란 뜻이겠지. 아, 그대의 성도 반납된 거 말 안 했나? 이제부터 그대는 토트린이란 성도 쓸 수 없어.”

    “뭐, 뭔…….”

    “하긴, 성이든 이름이든 뭐가 대수겠어. 이미 죽은 사람 목숨인데.”

    밀러는 흥미 없단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품에서 서신을 꺼내, 감옥 안으로 톡 던졌다.

    “원래는 락센과 하이레니아에게 그쪽 목숨을 맡기려 했는데. 그 두 사람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 그건 또 무슨……!”

    “몰랐나? 하이레니아 후작가의 가신들이 줄줄이 황궁으로 소환되고 있다더군. 물론, 그쪽도 포함이야.”

    토트린의 다리가 볼썽사납게 휘청거리더니, 이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우악스럽게 넘어졌지만, 그는 텅 빈 눈으로 그럴 리 없다며 중얼거렸다. 얼마 전까지도 멀쩡하다 못해, 멀쩡한 항아리에 금칠까지 할 만큼 득세한 하이레니아 후작가가 망할 리가 없지 않은가. 토트린은 그렇게 믿고 싶어 진저리를 쳤다.

    “걱정은 마. 내 손에 피 묻힐 생각은 없으니. 오늘 새벽에 문을 열어 줄 테니, 대공저 숲을 이용해 도망쳐.”

    “도, 도망?”

    도망치란 말에 토트린은 금세 입꼬리를 올리며 헉헉 웃었다. 그럼 그렇지. 그렇게 쉬이 꺼질 생명이 아니지! 그는 쾌재를 부르며 추악하게 웃었다. 웃음에 젖은 그를 바라보며, 밀러는 찬물을 얹었다.

    “그 숲엔 그대가 고용한 용병들이 빼곡하게 배치되어 있으니 잘 도망쳐 보도록. 다만, 그 용병들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사실만 알아 둬.”

    토트린은 밀러가 본관까지 가는 길에 멍하니 허공만 바라봤다. 나직이 마르타와 하이레니아 그리고 락센의 이름을 읊조리더니 철문이 두어 번 열렸다가 닫히자, 토트린은 자리에서 혼절했다.

    * * *

    연회 시즌을 알리는 첫 연회 때부터 페이스가 말리더니, 락센 가의 분위기는 거덜 난 곡식 창고처럼 인적이 뚝 끊겼다. 하이레니아 후작가와 연결된 가신들이 고구마 뿌리처럼 줄줄이 황궁으로 소환되자, 저택에선 사람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락센은 황궁을 다녀온 이후로 백작저 문을 걸어 잠그고 칩거하기 시작했다. 백작저 사용인들은 자신의 주인이 호된 심문을 받고 정신 줄을 놨다 여겼다. 그러자, 주급이 밀리기 전에 하나둘 사용인 자리를 내놓고 떠나기 시작했다.

    1년에도 수십 번 연회가 열리던 백작저 로비는 유령이라도 나올 것처럼 휑하기 짝이 없었다. 락센의 보좌관은 그만둔 사용인들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직접 저택을 뛰어다니며 살림까지 도맡기 시작했다.

    “끝이지, 끝. 이미 태자 전하의 눈 밖에 났으니, 당분간은 황궁 출입도 조심해야 할걸?”

    “당분간이라니? 조금만 참으면 가닥은 찾을 수 있단 뜻이야?”

    사용인은 씁쓸한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태자 전하께서 다음 후계자에게 황위를 물려주실 때까지. 그것도 당분간이라면 당분간이겠네. 아무튼, 너도 어서 일자리 알아봐. 주인님께서 지금보다 더 정신이라도 놔 봐라? 그때 되면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고. 홧김에 객기라도 부릴지 어떻게 알아?”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더라. 어제는 라밀라 님을 봤다면서 지하실 문을 열라고 하시더니, 정오 정찬실에서는 테이블 아래에 숨은 채로 울던데? 대공 각하께서 자기를 잡으러 왔다나 뭐라나.”

    “업보지. 그렇게 각하 욕을 해 대시더니. 쯧.”

    사용인들은 빗자루를 들고서 한참 수다를 떨다가 자리를 비웠다. 그들은 누구 하나 나서서 침몰하는 백작저를 일으키고자 노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망해 가는 백작저에 남아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며 으스댔고, 뒤로는 다른 귀족가의 사용인 자리를 알아보러 다녔다.

    코너에 숨어서 엿듣고 있던 보좌관이 눈매를 떨며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기우는 락센 가의 사정이 안타까우면서도, 자신의 가문도 함께 기울까 퍽 걱정스러웠다. 락센의 보좌관인 동시에, 그 역시도 지켜야 할 가족이 있기 때문이었다.

    보좌관은 오늘도 꾹 닫혀 있는 락센의 침실 문을 바라봤다.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길 반복하더니, 그는 숨을 고르며 노크했다.

    똑똑.

    “어르신,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불안한 침묵에 보좌관은 손에 땀을 쥐었다.

    “어르신?”

    그가 목소리를 떨며 다시 부르자, 방 안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연회장에서 하하 떠들던 위용 넘치는 웃음소리가 아닌, 망조가 든 사람처럼 힘없이 웃는 소리였다.

    덜컥.

    불안함을 이기지 못하고 보좌관이 문을 거세게 열어젖히자, 락센이 한눈에 보였다. 그의 몸에는 온갖 상처들이 넘쳤다. 보랏빛 멍부터 붉게 물든 자상도 보였다. 보좌관은 놀라서 뛰어 들어가, 그가 들고 있던 흉기를 뺏어 창문 밖으로 던졌다.

    그러자, 락센은 아이처럼 말도 안 되는 떼를 부리며 보좌관을 퍽퍽 때리기 시작했다.

    “네가 뭔데 내 물건을 던져!!”

    위엄이라고는 티끌도 없는 고함에 보좌관은 얼굴을 찌푸리며 탄식을 흘렸다. 라밀라가 대공저로 들어간 그날부터 아슬아슬하더니, 결국 락센은 정신을 놔 버렸다. 여느 귀족처럼 사치스럽고도 평탄한 삶을 살아온 탓인지, 그는 너무나 쉬이 모든 걸 포기했다.

    소란을 듣고 쫓아온 사용인들이 자리에서 그대로 굳었다. 그래 봐야 두세 명의 사용인이 다였다.

    “어머!”

    “밧줄을 가져와!”

    “네, 네!”

    “놔! 놔!”

    보좌관 아래에 깔린 락센이 거세게 들고 일어났다. 자리에서 비키라며 온갖 욕을 퍼붓더니, 애처럼 울기까지 했다. 이에, 사용인들의 얼굴은 불신에서 확신으로 물들었다. 아, 이 백작저에서 떠나야겠구나.

    “여기, 밧줄이요!”

    그는 밧줄을 건네받자마자 락센의 몸을 칭칭 동여맸다. 락센이 자신의 손으로 제 몸을 모두 망가트리기 전에, 이게 최선이었다.

    “으억, 놔! 놔 이놈아! 아버지! 이놈이 절 죽이려 합니다! 아버지!”

    보좌관은 서둘러 매듭을 짓고, 사용인들과 함께 방에서 빠져나왔다. 어서 문을 닫아, 그의 고함을 숨기려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사용인들이 눈동자를 떨며 당혹감을 떨치지 못하자 보좌관은 이내 곧장 걸음을 옮겼다.

    “어, 어딜 가십니까! 주, 주인님과 우리만 두지 마세요!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하루 안에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럼 주인님을 부탁하네.”

    “하, 하루라니요?! 아이고, 저희는 못 합니다! 네!? 가지 마세요!!”

    사용인들이 혀를 내두르며 도망치려 하자, 보좌관이 표정을 구기며 윽박질렀다.

    “백작가의 후계자는 데려와야 할 게 아닌가!! 왜, 그대들이 가려고?”

    후계라는 말에 그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락센 경에겐 후사가 없는데 무슨 후계자란 말인가. 그때, 눈치 빠른 사용인이 넙죽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닙니다. 저희가 자리를 지킬 테니 어서 다녀오십시오.”

    “뭐?! 지, 지키다니? 어우, 난 못 해. 못 한다고.”

    보좌관은 중년의 하녀 말만 믿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지그시 나이 먹은 하녀가 남은 사용인들을 다독이며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반발하던 사용인들도 이내 수긍했다.

    * * *

    미리안과 마르타 모두 대공저에서 떠난 후, 린느는 종일 침대에서 누워 지냈다. 딱히 기분이 우울하다거나 힘이 빠진 건 아니지만, 종일 바쁘게 지냈더니 하루쯤 푹 쉬고 싶다는 의견이었다. 그리고, 밀러는 그녀 곁에 의자를 가져와 책을 읽기 시작했다.

    “대공님, 침대 위로 올라오시면 뭐 제가 잡아먹기라도 해요?”

    밀러는 대답 대신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런데도 그는 종잇장을 넘기며 책만 바라봤다.

    “어차피 책 읽는 거 침대에 올라와서 읽는 건 어때요?”

    “그럼 책을 못 읽게 되니까 그렇지.”

    “오, 왜요? 무엇 때문에 책을 못 읽게 되는데요?”

    “몰라서 묻는 건가.”

    창문 너머로 비치는 어스름 진 노을이 밀러의 옆태를 잔잔하게 비춰 퇴폐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가 읽고 있는 책마저 노을빛으로 물들어, 야한 느낌마저 들었으니. 린느는 짓궂은 얼굴로 두 발을 침대 아래에 떨어트렸다.

    “마지막 장인데.”

    “마지막 장은 원래 아끼는 거예요.”

    린느는 그에게 다가가, 그가 낀 안경을 집게 손으로 천천히 벗었다. 그러자, 안경 뒤로 금빛 눈동자가 고요한 안광을 뿜으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는 린느에게로 시선을 옮기더니, 두꺼운 책을 그만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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