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마르타가 무너지듯이 땅에 무릎을 꿇었다. 마치 충성을 바치는 기사처럼 깍듯한 자세였다. 이에, 밀러는 감흥 없단 무심한 얼굴로 그를 빤히 내리깔아봤다. 하긴, 그의 감흥은 오로지 린느에게서만 샘솟으니, 이러한 반응은 당연할 걸지도.
“각하께서 베푸신 은혜는 평생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그러든가 말든가.”
마르타는 그의 대답에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소백작님께 입은 이 은혜,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제 동생을… 끝까지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킨 적 없는데……. 린느는 뻣뻣한 웃음을 지었다.
“네, 뭐……. 어서 일어나세요. 넬 부인이 기다리셔요. 넬 부인?”
넬 부인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르타와 함께 유유히 응접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미리안은 고개를 돌려 밀러와 린느를 바라보더니, 입을 달싹였다. 그 모습이 보기 싫단 듯, 밀러는 린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기다렸단 듯이 린느가 말했다.
“대공님, 저도 금방 다녀올게요.”
그럼 그렇지. 이대로 넘어갈 린느가 아니었다. 밀러는 린느와 잡은 손을 느슨하게 잡아당겨 품에 폭 안았다.
“왼손으로 인사해 줘. 다신 돌아오지 말라고.”
짓궂게 웃으며, 린느의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지는데도 그는 떼를 쓰며 린느를 놔주지 않았다. 오늘따라 짓궂다며 탓하려는데, 밀러가 나직이 읊조렸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해. 지금이라도 저들을 벌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대가 그리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 누가 뭐라 할 리도 없고.”
“대공님이 원하시는 게 아니구요? 전, 그냥 어서 일을 마무리하고 싶을 뿐이에요.”
밀러는 품에서 린느를 놔주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하긴, 할 게 많지. 우린.”
그제야 밀러는 린느를 놔줬다. 린느가 시야에서 멀어지자, 밀러의 입꼬리도 서서히 굳어 갔다. 그때, 응접실로 알렉스가 뛰어 들어왔다.
“토트린은.”
“토트린 영식이 대공저에 찾아왔다는 소식에 감옥 안에서 춤까지 췄답니다.”
알렉스의 대답에 밀러는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이에, 알렉스는 일단 그의 뒤를 따랐고, 얼마 안 가 그가 어딜 향하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 * *
“대공저 마차는 영지 마구간까지만 이용 가능합니다. 그곳에서부턴 마차를 빌리시어 영지까지 이동하시길 바랍니다.”
“각하께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 전해 주시죠.”
넬 부인과 마르타가 마차를 두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미리안은 손바닥으로 햇빛을 가리며, 대공저를 뒤돌아봤다.
“…….”
그녀는 대공저 본관을 올려다보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이대로 떠나도 될까? 린느가 눈에 밟혀서, 이대로 제대로 사과도 하지 못하고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용서를 강요할 수도 없는데, 마음 편하고자 사과하는 것도…….
“린느 님?”
그 순간, 린느가 계단을 빠르게 내려오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미리안은 옅게 웃음을 지었다. 린느가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처음 대공저를 들어선 그날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 탓이리라. 미리안은 린느에게 뛰듯이 걸으며 다가갔다.
“미리안.”
“……나오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린느가 배웅하러 나와 줘서 얼마나 기쁜지. 미리안은 입을 꾹 짓누르며 웃음과 울음을 참았다. 할 말은 무척이나 많았지만, 미리안은 모두 삼켰다. 떠나는 자가 말이 많으면 남은 사람의 마음이 불편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미리안은 지금이 마지막이란 생각에 참을 수가 없어 끝내 입을 열었다.
“린느 님을 알게, …알게 되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딸꾹질하듯이 울며 미리안은 꾸역꾸역 말을 이었다.
“비, 비록. 제가 혼자 오해하고…… 답답하게 굴었지만. 그래도, 린느 님을 보며, 많이 배웠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자립하는 법. 그리고 웃는 법을 배웠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울음이 목구멍을 막았다. 린느는 그런 미리안의 등을 토닥여 줬다.
“미리안, 가서 배운 대로만 잘 지내. 나한테 미안한 만큼 열심히 살아.”
미리안은 눈을 슥슥 닦아 내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며 린느는 미소를 지었다.
“울타리 밑 구덩이 파던 그 마음으로 살면, 뭐든 잘할 거야. 진짜 진심으로. 세상에 나 그때 그 구덩이 보고 깜짝 놀랐잖아. 어떻게 그걸 맨손으로 판 거야? 하여튼!”
린느는 웃으며 미리안을 토닥여 줬고, 미리안은 미안한 마음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때, 미리안의 등 뒤로 넬 부인과 마부가 린느와 미리안을 번갈아 봤다. 출발을 알리는 눈치였다.
“린느 님, 그래도, 그건 진심이었어요.”
열린 마차 문을 잡고서, 미리안이 울며 웃었다.
“린느 님은 각하보다 훨씬 멋있는 분이에요. 정말, 정말이에요. 린느 님이 아까워요. 그건, 변하지 않는 진실이에요…….”
미리안은 그 말을 끝으로 마차에 올라탔고, 두 사람이 함께 탄 마차가 대공저 밖을 향해 머리를 틀었다. 묘했다. 정말, 미리안과 이별했구나. 그것도 마르타와 함께……. 이보다 더 미리안에게 좋은 이별도 없을 테지. 린느의 입꼬리가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
“잘 살아, 미리안.”
린느와 함께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나는 대공저 마차가 사라지고서야, 대공저 본관으로 걸음을 돌렸다.
* * *
토트린은 연회장이 열리는 내내 울부짖었다. 그전까지도 분명, 자신이 심어 둔 용병들이 자신을 구출해 줄 거라 생각하며 하루를 버텼고, 유난히 바르고 올곧은 마르타가 자신을 구하러 대공저에 올 것이라 생각하며 또 하루를 버텼다. 그렇게 며칠을 버텨도 아무도 오지 않자, 그는 미리안이 보고 싶다며 입에 거품을 물며 발악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삼 일, 며칠이 지나고도 아무도 저를 구하러 오지 않자, 토트린은 점점 심각한 불안 증세에 시달렸다.
그때였다. 대공저 전체에 듣기 좋은 음악 소리가 퍼진 게.
“이, 이게 무슨 소리냐? 이젠 환청까지 들리나….”
“환청은 무슨 빌어먹을 환청? 이보시오. 우리가 그쪽 감시하느라, 오랜만에 열리는 연회장에 참석조차 못 하고 있는 거 아니오? 아오! 저걸 그냥 죽이고 올라가?”
연회? 대공저에 연회가 열렸다고?
토트린은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대공저에 연회가 열렸다는 것은, 대공저의 무사안일을 뜻하며 자신의 죽음이 확정되었단 뜻이 아니겠는가.
그날부로 토트린은 곡기를 끊고 정신 줄을 서서히 놨다. 그러나 밀러는 토트린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잔인한 사람이었다. 곡기를 끊자, 차게 식은 수프를 강제로 급여하며, 그의 목숨 줄을 이어 줬으며. 그가 자결을 다짐할까 싶어, 3교대로 사용인을 배치했다.
실로, 지독한 고문이었다.
“내가, 내가 곱게 죽을 것 같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용인들은 껄껄 웃어 댔다. 곱게 안 죽으면 어쩔 거냐며 비웃는 틈에, 마부 모자를 쓴 남자가 토트린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픽, 웃었다.
“뭐여……. 여태 살아 있었슈?”
진작에 간 줄 알았다며, 마부는 시원한 냉수를 마시며 크크 웃었다. 그때였다.
덜컥.
“손님이 와서 그러는데, 30분만 늦게 와도 되겠나?”
“아, 그럼 그럼! 손님? 무슨 손님?”
“토트린 백작가에서 영식이 왔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일 마무리하고 교대하자구!”
신의 음성에 홀린 것처럼 토트린은 터벅터벅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트린 영식이라니, 마르타가 대공저에 왔단 말인가!
“마, 마르타. 마르타!!”
그때부터 토트린은 쉰 목으로 마르타를 외쳐 댔다. 이전에도 상태가 썩 좋진 않았지만, 지금은 멧돼지처럼 철창을 머리로 쿵쿵 박아 대며 발악했다. 화를 내다가 웃더니, 자리에서 덩실덩실 춤까지 췄다.
“이놈들아! 내가 말했지? 우리 마르타가! 마르타가 아비가 사라진 걸 알고 온 게야! 지금이라도 이 망할 문이나 열어 둬! 그럼, 내가 하이레니아 후께 너희들 시체는 남겨 달라 부탁은 해 주마!”
토트린은 턱을 치켜들며 사용인들에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시뻘겋게 충혈된 두 눈을 부라리며 굶주린 승냥이처럼 꽥꽥 소리를 질러 대며 사용인들에게 침을 뱉기도 했으니. 보다 못한 자가 쯧 혀를 찼다.
“저저 죽는 자리인지도 모르고 아주 꼴사나워 죽겠네. 토트린 영식이 대공저에 왔다 했지, 누가 그쪽 목숨 빌러 왔다 했수? 저거 안 되면 콱 그냥 혀를 뽑자고! 각하께서도 허락하신 일인데, 망설일 거 있나?”
“뭐, 뭐 이 자식아? 어디서 배워먹지 못한 천한 게!”
“왜, 그 천한 놈에게 혀 뽑히고 싶어 안달 났수?”
사용인이 고문 기계를 만지작대며 묻자, 토트린은 그제야 입을 꾹 다물었다. 이미 1시간이 넘도록 소리를 지른 탓에 이미 목이 아픈 것도 있고, 괜히 자극해서 멀쩡한 혀를 잘릴까 사리는 모양새였다.
“그나저나 좋긴 하겠수. 아들 얼굴은 보고 가겠네.”
가기는 어딜 가나! 아, 토트린 백작저로 가나? 토트린은 음험하게 웃으며 마르타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마르타는 오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마르타가 홀로 돌아갔을 리가 없지. 설마, 그 대공 놈이 마르타까지……?’
토트린은 무릎으로 기어와 창살을 흔들었다.
“이, 이놈들아! 이곳 말고 대공저에 또 다른 감옥이 있냐?”
“없수.”
“거, 거짓말!”
“염병, 입만 열면 다 거짓말이란다. 거 안 믿을 거면 물어보질 마쇼!”
사용인은 귀찮다는 얼굴로 쯧, 혀를 찼다.
“그, 그럼. 그럼 마르타는? 마르타는!”
“토트린 영식을 말하는 거요?”
토트린이 마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재촉하자, 사용인은 일부러 말하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그때, 녹슨 지하 감옥 지렛대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사용인들이 쉽게 드나드는 문이 아닌, 대공저 본관에서 내려오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