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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108화 (107/122)
  • @108화

    마르타의 표정에 변화가 없자, 밀러는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그를 빤히 응시했다.

    “부자 사이가 좋지 않았나? 놀라는 기색도 없군.”

    비아냥이었다. 부자 사이가 좋아, 미리안이 고통받고 있음에도 마르타 역시 모르는 척한 게 아니냐며 되묻는 것과 같았으니. 마르타는 죄책감 어린 눈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밀러 그다운 악취미였다.

    “됐고, 좀도둑 데리고 내 저택에서 당장 꺼져. 그것밖엔 할 말 없다.”

    좀도둑이란 말에 마르타가 놀란 눈으로 밀러를 올려다봤다. 좀도둑이라니? 지하 감옥에 갇힌 제 아버지가 도둑질까지 했단 말인가.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미리안이 내 집무실을 뒤졌고, 당돌하게도 협박질까지 하더군. 그 책임을 물까 했으나.”

    밀러는 하던 말을 뚝 끊고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이대로 마무리하라는 명령에 참는다.”

    명령이란 말에 마르타의 미간이 좁혀졌다. 명령이라니, 그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라곤 직계 황족들이나 가능한 법. 한데, 이 일에 황족이 엮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마르타는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일이 복잡하고 커진 게 아닐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마르타는 테이블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밀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미리안의 도둑질까지 눈 감아 주겠다는 말에 감사를 뜻하기 위함이었다.

    “각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부족하지만… 앞으로 다시는 각하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살겠습니다.”

    “부디.”

    밀러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자리로 돌아가라 명령했다. 미리안과 묘하게 닮은 마르타와 마주하기 껄끄러운 탓이다. 선대 대공비가 아닌, 미리안과 닮아서 껄끄러웠다. 그 순한 얼굴로 기괴한 웃음을 짓던 모습이 떠오른 탓이다.

    ‘닮기는 무슨.’

    나아가, 그런 미리안이 선대 대공비와 도대체 어디가 닮았다는 건지! 밀러는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안면 인식에 문제가 많았는지 처절하게 깨달았다.

    드르륵.

    때마침 사용인이 트레이를 밀며 응접실로 들어섰다. 그녀는 능숙한 솜씨로 트레이를 테이블 측면에 세워, 향긋한 홍차를 밀러 앞에 올려 뒀다. 그리고 남은 찻잔을 마르타 앞에 두려는 찰나였다.

    “금방 갈 손님이니 차 대접은 과분하다.”

    “네, 각하.”

    사용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트레이 뚜껑을 닫았다. 마치, 처음부터 줄 생각도 없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웠다. 마르타는 트레이를 밀며 제게서 멀어지는 사용인의 뒤통수를 힐끔거리며, 흐트러진 허리를 세워 자세를 다잡았다.

    “하이레니아가 황궁으로 소환된 건 알고 왔나?”

    “오는 길에 들었습니다.”

    “토트린 백작가엔 토트린 경만 멍청한가 보군.”

    유능한 보좌관을 뒀다는 말을 그렇게 돌려 말한 후, 밀러는 찻잔을 기울였다. 그는 속을 꾸역꾸역 짓눌러 화를 참았다.

    내가 왜, 이 귀한 시간에 이 조무래기와 이러고 있어야 할까? 지금이라도 귀찮은 일은 모두 황태자에게 넘길까. 그깟 토트린이야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라 떠넘기고, 린느와 함께 여행이라도 떠나 버릴까.

    “하아…….”

    밀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내려놨다. 이에, 마르타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밀러에게서 시선을 천천히 뗐다.

    “각하, 아가씨께서 드십니다.”

    방금까지도 산 사람도 잡아먹을 듯이 굴던 금안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그의 시선 끝에는 린느가 있었다.

    “린느, 여기.”

    밀러는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홀린 사람처럼 일어난 그는 자신이 앉았던 상석에 린느를 데려갔다.

    “제가 여기 앉으라구요? 부담스러워요.”

    뭐가 부담스럽단 건지. 대공저에 처음 발들인 그날엔 아주 당돌하게 앉았으면서?

    “대신에 저는 여기에 앉을게요. 그럼 되죠?”

    밀러는 말없이 린느가 가리킨 자리를 빤히 바라보더니, 느릿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낱낱이 목격한 마르타는 쉬이 눈치챘다. 밀러에게 명령을 내린 건 황족이 아니라 저 여인이라는 것을.

    마르타는 린느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마르타 토트린, 세르트 소백작님을 처음 뵙습니다. 세르트 백작가에 여신의 가호가 있길.”

    마르타는 눈치가 빠른 남자였다. 휴양지에서 미리안과 만났을 때, 미리안이 종일 ‘린느 님’을 입에 달고 산 덕분에 마르타는 린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고작 며칠인데도, 미리안이 하도 린느 이야기만 하는 통에 내적 친밀감이 생길 정도였으니.

    그 덕분에 마르타는 린느와 초면임에도, 그녀가 미리안이 말한 린느라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

    그는 자신의 아비가 저지른 죄를 대신 용서 빌 생각이 없었다. 다만, 미리안이 저지른 죄에는 자신의 무릎이 닳도록 사과하리라 다짐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두 사람을 향해서 한 걸음을 뗐다. 그때였다.

    “오, 오라버니.”

    꽉 잠겼지만, 너무나 선명한 미리안의 목소리였다. 마르타는 머리칼이 흔들리도록 몸을 틀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미리안이 서 있었다.

    “미리안……? 미리안!”

    “정말… 정말, 오라버니세요? 정말?”

    미리안은 휘청거리며 마르타의 품에 폭 안겼다. 길을 잃었던 아이가 부모의 품을 찾아간 것처럼, 미리안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여태 미리안에게서 단 한 번도 목격할 수 없던 평온함이었다. 드디어, 각자 제자리를 찾은 기분에, 린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르타는 미리안을 끌어안고서, 등을 토닥였다. 마치, 막내딸을 찾은 아버지처럼 그의 표정에도 온갖 감정이 어려 있었으니. 그 누구도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린느는 두 사람을 보며 가슴이 먹먹해 멈춰 선 자리에서 가슴을 꾹 눌렀다.

    ‘이거로 해피엔딩이지? 해피, 엔딩.’

    엔딩. 그 단어가 품은 묘한 감정이 린느의 등을 밀며 자극했다. 물론 성취감과 안도감도 들었지만, 끝이라는 허탈감이 더욱 컸다. 린느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며 두 사람을 지켜봤다.

    “내 실수였어. 아버지의 말을 믿고 널 두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런 말씀 마세요……!”

    마르타와 미리안은 젖은 눈으로 서로를 살피느라 바빴다. 다친 곳은 없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두 사람은 무척이나 오랫동안 서로의 상태를 살폈다. 그런 그들을 보고 있자니, 린느는 더욱더 마음이 이상했다.

    ‘다 큰 자식 멀리 보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무어라 형언하기 힘든 감정과 함께 내치기 힘들도록 무기력해졌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그냥…….

    그때, 밀러의 기다란 손가락이 린느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몄다. 투명한 유리알을 손가락으로 굴리듯이. 그의 손가락이 한 올 한 올 린느의 손을 위로하듯 탐했다. 다정하면서도 색스러운 움직임에, 린느는 고개를 들어 밀러를 올려다봤다.

    그때, 밀러가 두 사람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반가운 건 알겠는데, 얼마나 반가운지 별로 알고 싶지 않아. 내가 남는 게 시간인 줄 아나? 그만해 두고 이만 꺼지지?”

    순간, 대기하던 사용인들이 놀라 토끼 눈을 떴다. 그들은 말없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더니,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그들만큼이나 린느 역시 놀란 눈과 떡 벌어진 입으로 밀러를 바라봤다.

    제 손을 잡은 그의 손길은 이처럼 부드러운데, 어쩜 저렇게 대놓고 무안을 주는지! 같은 사람 맞지? 린느는 자연스레 마르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마르타는 울며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각하. 이만, 저희는 가 보겠습니다.”

    가 보겠다는 말에도 밀러는 노골적으로 짜증을 냈다. 웬만해서는 이렇게까지 대놓고 화를 내는 남자가 아닌데, 마치 심통 난 아이처럼 화를 참지 않았다.

    “그 말 할 시간에 이미 나갔겠군. 왜, 배웅이라도 해 드려야 하나?”

    “아, 아닙니다.”

    밀러는 마르타의 대답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시선을 휙 피했다. 두 남자가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미리안의 눈동자가 온갖 감정을 품고서 린느에게 닿았다. 그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너무나 잘 알았다.

    고마움, 미안함. 그리고 그리울 거라는 작별 인사까지. 미리안은 눈매를 접어 가며 천진하게 웃었다.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이, 활처럼 휜 눈매를 따라 또르륵 흘렀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난다는 게 바로 저런 웃음일까. 린느는 그 순간만큼은 미리안에게 품었던 화도 잊고, 따라 웃어 줬다.

    밀러는 그런 미리안이 못마땅하단 듯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넬, 배웅은 그대에게 맡기지. 안나는 피곤할 테니.”

    “대공님, 저도 다녀올게요.”

    “린느.”

    “그러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밀러는 그녀의 부탁에 힘없이 웃었다. 치사하게. 그래도 되냐는 물음은 그렇게 하겠다는 통보와 같았다. 그가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는 걸 알고서 부린 때였다.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두 분께선 저를 따라오십시오.”

    넬 부인이 평소보다 엄숙한 목소리로 말하자, 두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마르타는 응접실로 나서기 직전, 경건한 얼굴로 린느와 밀러 앞에 섰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을 벌일 듯이 진중한 표정에, 밀러는 린느를 제 뒤로 숨겼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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