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린느에게만큼은 거짓말에 어수룩한 그가, 진실만을 담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소름이 끼칠 만큼 금안은 차갑고도 단호했다. 칼처럼 벼려진 눈빛이 당장이라도 그가 말한 대로 일을 칠 것처럼 날을 세웠다. 그 덕분인진 몰라도 린느의 속을 긁던 쇠붙이가 멈췄다.
마치, 끓는 주전자를 탁자 위로 옮긴 것처럼 서서히 열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머리와 마음이 식어 가자 화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게 보였다. 원작에서 그녀만 찾던 밀러는, 이곳엔 없다는 사실에 린느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그럼 어디에 있죠?”
“별채에.”
린느는 별채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표정은 보기 드물게 차게 식은 동시에 냉랭했다. 바람이 한번 다녀갈 때까지도 그녀의 눈은 미동도 없이 별채로 향했다. 바람이 잔잔해지자, 린느는 나지막이 말했다.
“대공님.”
“말해.”
“저 믿죠?”
그녀의 물음에 밀러는 힘 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 끝에 결기를 띈 금안에 이채가 돌았다.
“그대 말고 누굴 믿을까, 여신도 믿지 않는 내가.”
“그럼 이렇게 해요. 미리안 님을 마르타 님과 함께 보내요.”
순간, 밀러의 미간이 위협적으로 올라갔다. 그의 눈엔 미리안도 다른 작자들과 별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미리안의 죄도 묻지 않고 순순히 마르타에게 보내자니? 밀러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허공을 응시했다.
“미리안 님께 죄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대로 다신 엮이지 않는 게 서로 좋을 거 같아서요. 물론, 대공님의 뜻에 달렸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밀러의 시선이 린느에게로 닿았다.
“그대의 뜻에 달렸어. 내 뜻은 곧 그대의 뜻이니까, 그런 말 말아. 어차피, 토트린의 영식도 미리안만 입에 담았으니, 그래. 린느, 그대의 뜻대로 하지.”
그의 말엔 토트린은 죽이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걸 눈치챘음에도 린느는 그를 말리지 않고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제가 미리안 님을 데려올게요. 대공님은 먼저 본관에 가 계세요.”
어차피 한 번은 건너야 할 산이다. 미리안의 아비가 죽든 말든, 마르타가 살아 있는 한 미리안의 광증이 더 심해지진 않을 터. 린느는 이 소설에 마침표를 찍어야겠노라 다짐하고선 별채로 직행했다.
미리안이 찌른 칼날은 꽤 아팠지만, 아프다 해서 주저앉을 순 없었다. 그리고 밉다 해서 회피할 수도 없고. 그래서인지, 린느의 발걸음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 * *
달이 사라지고 해가 떴음에도 두 사람이 함께한 공간엔 냉랭한 공기만이 가득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대공저 본관은 저토록 훤한데, 미리안과 안나가 있는 방만은 서리가 낄 만큼 차가웠다.
“…….”
별채 입구에서 작은 소란이 일자, 안나가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덜컥.
방문이 열리며, 린느가 들어섰다.
“아가씨…?”
안나가 깜짝 놀라며 입을 뻐금거리자, 린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짓했다. 자리를 비켜 달라는 눈치에 안나는 망설임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자마자, 창문만 바라보던 미리안이 천천히 린느를 향해 몸을 돌렸다. 미리안은 창문을 바라보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억울함에 분노를 터트렸을까? 아니면 뒤늦게나마 울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어쩌지? 린느는 미리안의 표정을 보기가 조금은 두려웠다.
만약, 그녀가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선뜻 생각한 말들을 내뱉지 못할 테니까. 그러나 미리안은 울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바닥만 바라볼 뿐. 차라리 울고 있으면 따지기라도 할 텐데, 더 힘들어졌다.
“도대체 왜…… 왜 그랬어요?”
미리안은 쉬이 답하지 못하고, 죄 없는 손가락을 피가 맺히도록 뜯었다. 그간 장담하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실을 통째로 부정당한 기분 탓이다.
「아가씨께선 끝까지 믿고 싶은 대로 믿으실 생각이신가 보네요.」
미리안은 두 눈을 질끈 감는 동시에 어금니를 물었다. 안나가 제게 던진 그 말 한마디에 온몸이 부서지듯이 아픈 탓이다. 거기에, 자신을 책망하는 청록색 눈동자. 린느와 마주하자마자 미리안은 내장이 뒤틀린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아프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린느가 아프길 바란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만약 둘 중 한 사람이 아파야 한다면, 그건 린느가 아니라 미리안 자신의 몫이라 생각할 만큼. 절대, 그녀가 아프길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쉬지 않고 땅을 팠다.
손톱 밑으로 자그마한 모래가 박혀 상처가 생겨도, 미리안은 린느를 위해 땅을 팠다. 하지만, 린느는 대공저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이에, 미리안은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왜? 왜 도망가지 않아?
“도망갔어야 했어요. 린느 님은 그날, 그 울타리를 넘어 도망가셨어야 했어요.”
“미리안, 난 도망가지 않아. 도망갈 이유가 없으니까.”
미리안의 동공이 크게 팽창했다.
“대공저는 내 집과 같은데, 내가 왜 도망을 가겠어?”
집이란 말에 미리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꺼풀을 떨었다. 이곳이 집이라고? 미리안은 희게 말아쥔 두 손을 파르르 떨었다.
“또 내가 세뇌당했다고 말하고 싶은가 본데. 미리안, 내가 보기엔 내가 아니라 미리안이 세뇌당한 거 같아.”
“그럴 리가 없……!”
“미리안은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세뇌당한 거 같아. 설령, 내가 행복하지 않다 해도 미리안의 도움 없이 알아서 행복을 찾아갈 수 있어. 난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거든.”
“…….”
“그러니까, 미리안은 미리안의 행복을 찾아가. 누구의 행복을 빌어 주는 건, 선택이지 의무가 아니야.”
“린느…….”
미리안은 젖은 목소리로 린느를 불렀지만, 시선만은 맞추지 못했다. 그녀는 린느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죄스러운지, 몸을 웅크린 채 어깨를 떨었다. 린느는 그런 미리안을 보며 온갖 감정을 느꼈다.
감정과 표현에 서투른 그녀가 안쓰러우면서도, 다친 아버지를 생각하면 미리안의 고집에 화가 치밀었다. 린느는 감정들을 꾹 짓누르며 미리안에게 말했다.
“마르타가 대공저에 와있어. 지금쯤이면 대공님과 함께 있겠지.”
“마, 마르타? 세상에, 마르타…. 오라버니…….”
미리안은 마르타라는 이름만 듣고서 그대로 주저앉아 오열했다. 마치, 여태 참고 또 참아온 커다란 화산이 희뿌연 화산재를 흩날리며 터지듯. 그녀의 울음은 짐승처럼 거칠고 또 가여웠다.
미리안은 린느에게 죄스러워 눈물을 계속 닦아 냈지만, 한번 트인 눈물은 끝도 없이 흘렀다. 그리고, 그 눈물엔 그녀가 홀로 감당하던 불안이 함께 섞여 분출되어 울면 울수록 마음이 편해졌다.
* * *
마르타는 넓디넓은 응접실에 덩그러니 앉아 깊은 한숨을 자아냈다. 고작 응접실에 앉았을 뿐인데도 속이 답답한 탓이다.
‘이런 곳에서 미리안이 지냈다니. 상한 곳만 없으면 좋겠는데.’
……그게 가능할까? 앉아만 있어도 속이 더부룩한데, 정서적으로 온전치 못한 미리안이 멀쩡할 리가 있겠느냔 말이다. 마르타는 화가 치밀었다. 끝까지 미리안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향한 분노와 이런 곳으로 미리안을 보낸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분노였다.
‘그때, 그 파견을 나가지 말았어야 했어. 아니, 미리안을 데리고 백작저에서 나왔어야 했어.’
미리안이 백작저에서 기본 예법 공부를 마친다면, 토트린 백작가의 성을 내리겠노라 약속했던 아버지였다. 그래서 미리안을 백작저에 두고 홀로 파견을 나갔던 것인데……. 그 이후로 마르타는 한동안 미리안과 연락이 닿지 않아 전전긍긍했다.
그러던 중, 페리하츠 대공저에서 날아온 밀서로 미리안과 재회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미리안은 다친 곳 없이 멀쩡했다. 안쓰러울 만큼 말랐던 몸에 보기 좋게 살이 올랐고, 머리칼이며 드레스까지 모두 하녀들의 보살핌을 받는 모양새였다.
마르타는 그런 미리안을 보며 무척이나 기뻤으나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미리안의 눈빛 탓이었다.
‘그때라도 데리고 나왔어야 했는데…….’
그는 자신의 소백작 신분으로는 미리안을 지킬 수 없다고 믿어, 미리안을 백작저에 두고 왔다.
어차피, 몸부림을 쳐 봤자 토트린이 나서서 또다시 남매 사이를 가를 것이며, 이미 미리안을 시녀로 둔 밀러가 그녀를 쉬이 놔주지 않을 거란 생각에 다음을 기약했다. 그리고, 그는 그때 그 결정이 꽤 괜찮은 판단이라 여겼었다. 얼마 전까지는.
「모르셨습니까? 하이레니아 후께서 토트린 백작가를 가신으로 두신다 하셨답니다! 경사이지요! 게다가 광산까지 내리셨다니, 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아무런 이유도 없이 후작가에서 일개 외곽지역 백작가를 가신으로 둘 리가 없었다. 마르타는 수상쩍은 아버지의 행보를 조심스레 훔쳐봤고, 얼마 안 가 진실과 마주했다. 가신이고 광산이고 모두, 자신의 아버지가 미리안을 팔아치워 얻은 것들이란 것을.
앓는 소리와 같은 탄식을 흘렸다. 그때, 구둣발 소리가 짙어졌다.
“…….”
금빛 눈동자가 벌레를 보듯 하찮다는 눈빛으로 마르타를 내리깔았다. 당장이라도 사람을 베어도 이상할 게 없이 무심한 눈동자. 밀러는 마르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코트를 벗어, 넬 부인에게 건넸다.
“그대가 앉아 있는 그 의자 밑? 그쯤에 있겠군.”
밀러는 상석에 몸을 기대며 비릿하게 웃었다.
“지하 감옥에 처넣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