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밀러는 원작에서처럼 마르타를 죽이지 않고, 가문을 멸문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미리안을 대공저 꼭대기에 가두지도 않았다. 원작대로 흘러간 거라곤 티끌도 없이 모든 게 다 비틀렸는데, 왜. 왜?
‘미리안은 왜 그렇게까지 밀러를 증오하는 거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상상조차 불가했다. 그렇기에 린느는 미리안에게 실망하고 또 화가 났다. 그녀가 뱉은 말들이 바늘처럼 린느를 찔렀다.
「제가 아니라 린느 님을 위해서 만든 탈출구예요. 이 망할 대공저에서 시들어 죽는 건 저 하나로 족하니까요.」
「아뇨? 우린 시들어 말라 죽어 버릴 거예요. 각하께선 위선자예요. 우릴 도와주는 척 위선을 떨면서…….」
「세뇌당한 거예요? 린느 님도 그러셨잖아요. 이 대공저는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밀러를 향한 미리안의 적대감. 그것들을 서슴없이 뱉어 내던 미리안이 떠오르자, 속이 거북했다. 린느는 밀러를 올려다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어떻게 버텼을까? 약도 없이 어떻게.
“이쯤에서 좋은 소식을 하나 말해 주면, 그대가 덜 아플까?”
“이보다 더 아픈 말이 남았단 뜻이에요?”
“응, 유감스럽게도. 훨씬 더 아플 거야. 약병 훔친 거 따위야.”
린느는 자르르 끓는 속을 다잡기 위해 깊은숨을 내쉬었다. 폐부에 스며든 노기를 후 내뱉자, 그래도 아주 조금은 나아졌다.
“좋은 소식부터 알려 주세요.”
밀러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생긋 웃었다. 금안에는 린느를 향한 걱정이 잔뜩 어려 있었으나, 그는 기어코 입꼬리를 올려 웃어 줬다. 그녀를 안심시켜 주기 위함이리라.
“그대가 내 곁을 지킨 이후부터 내 병세가 사라졌어.”
지긋지긋한 병. 기침과 거짓말처럼 숨길 수 없는 병. 숨기려 들수록 물기 어린 수건을 짜듯이 숨통이 쪼그라드는 병. 그 병으로 그 수많은 세월을 불안에 떨며 죽지 못해 살았다.
그로 인해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고 경미한 변화에도 속이 뒤틀리듯 불안증이 올라왔다. 불안 증세가 없는 날에는 언제 증세가 나올까 두려워, 불 꺼 둔 침실에서 낮이고 밤이고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그 지독한 그 병이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린느가 그를 확신할수록 병이 옅어지더니 이윽고 사라졌다.
“제가 늘 곁에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닐까요?”
“나 또한 그런 줄 알았어. 그래서 위험하지만 약을 끊었어. 확실히 알아 둬야 할 거 같았거든.”
그런데 연회 당일, 미리안이 그 약통을 훔쳤고 보란 듯이 그의 눈앞에서 알약을 흩뿌렸다. 마치 닭장에 있는 닭에게 모이를 뿌리듯이. 이 오만한 남자가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알약을 주워 담을 거라 예상했으나, 밀러는 그런 그녀를 비웃듯이 알약을 짓뭉개 밟았다. 그만한 확신이 있었으니까.
“말하지 않고 멋대로 약을 끊어서 미안해. 그대가 준 건 티끌만 한 것마저도 모두 소중한데, 그 약만큼은 소중하게 대할 수가 없었어. 내가 어떻게 그대가 내게 품은 걱정마저 소중히 대하겠어. 그 약을 구할 때 그대의 심정이 어땠을지 생각만 해도 눈앞이 아찔해.”
대공이면 뭐 하나, 제국의 또 다른 태양이면 뭐 하나. 그딴 게 도대체 무얼 의미할까. 밀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집무실 테이블 위에 올라온 그 약병과 눈싸움을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약병을 바라보며 온갖 생각을 흠뻑 뒤집어썼다. 그때의 기억을 되짚으며 밀러는 힘없이 웃었다.
“하루는 그 약병을 보고 있는데, 내가 왜 이 약을 먹게 되었는지 의문이 들더군. 그래서 거슬러 올라가 봤어. 그대가 날 걱정해 이 약을 가져온 걸 시작으로. 그대가 내 병세를 알아서 우리가 만났고. 내 병세가 심해져서 칩거했었고. 그런데 그 지독한 병은 왜 생겼지? 아,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구나. 그런데, 그 죄책감을 왜 나 홀로 짊어졌을까?”
린느는 그의 뺨을 그러쥐며 걱정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덤덤하고 건조해, 듣는 이마저 속이 꺼슬꺼슬해진 탓이다. 밀러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덮으며 말했다.
“그 질문 끝엔 울고 있는 내가 있더라고. 어린 내가.”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과연, 그 죄책감을 떠안고 사는 게 어머니에 대한 예의이자 옳은 사랑일까? 그게 과연 선대 대공비가 원하는 일일까? 그것이 선대 대공비의 바람이자, 하나뿐인 자식의 모습일까?
유감스럽게도, 그는 얼마 전까지도 그게 정답이고 사랑이라 생각했다.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으니, 응당 그렇게 죽은 듯이 살아야 하며, 그게 곧 죽은 어머니를 향한 예의이자 책임이라 생각했다. 린느를 마주치기 전까지는.
밀러는 미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난 지금도 그 모든 탓을 내게 돌리고 있었을 거야. 저 대공저에 스스로 가둔 채 산송장으로 살았을 거야. 그 미련한 짓이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라 믿었으니까.”
잘못된 방식의 사랑은 자기 자신도 상대도 죽게 만든다는 걸, 그녀에게 배웠다. 그리고, 그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린느가 알려 준 방법을 정답이라 여기기로 다짐했다.
“내겐 그대만이 정답이야. 이 또한 잘못된 사랑이라 해도, 그래서 또 내가 다른 병을 앓게 된다면……. 그대에게서 앓게 해 줘, 린느.”
찬란하게 빛나던 그 눈동자가, 남들에겐 그토록 모질게 내쏘던 그 금빛 눈동자가 애원하듯 린느에게 맺혔다. 강처럼 고즈넉하지만, 그 깊이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 그의 고백에 린느는 고개를 잘게 끄덕였다.
“내 곁이라면 마음껏 앓아요.”
린느는 그를 꼭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한참 모자란 팔 길이였으나, 그녀의 품은 그 어떤 품보다도 따스했으니. 그는 그녀의 어깨에 턱을 걸쳐,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말린 입꼬리를 느끼며, 이게 행복이구나, 되새겼다.
화원 곳곳에 달린 예쁜 꽃잎이 바람결에 흩날리길 여러 번. 린느가 그의 가슴팍을 부드럽게 밀며 눈을 맞췄다. 아무리 그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려 해도, 체격이 달라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린느는 자못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또 있죠? 제게 할 말이요.”
린느의 물음에 밀러는 침묵했다. 미리안이 제게 한 짓들은 아프지도 아니, 거슬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린느는? 미리안이 린느에게 한 짓을 알게 된다면 린느는 분명 아파할 것이다. 그게 싫었고, 불편하고 꺼려져 밀러는 그녀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그러자, 린느의 흰 손가락이 밀러의 턱을 가볍게 그러쥐며 제게 시선을 맞췄다.
“우리 사이에 비밀이 있으면 돼요? 침대도 함께 쓰는 사이인데?”
가볍게 웃으며 물었으나 결코, 가볍지 않았다. 물론, 그녀에게 비밀에 부칠 생각은 없지만, 또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꺼려졌다.
황태자를 초대할 만큼 규모 있는 연회장엔 그토록 무심했으면서, 린느와 관련된 일에는 갓난쟁이를 연못에 내어 둔 부모처럼 사소한 일도 그냥 넘기질 못했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조심스럽고.
그래도 그녀가 알길 원한다면, 알려 줘야겠지. 밀러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연회 개최 전에 미리안의 초대로 프레이가 대공저에 들렀어. 기억할까?”
“기억해요.”
대공저를 드나든 외부인 중에서 넬 부인에게 얼굴도장이 찍히지 않은 자는 없었다. 하여, 그날도 넬 부인이 린느에게 프레이의 방문이 탐탁지 않다며 투정을 늘어놨으니,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럼, 프레이 영애가 스테빈스의 손녀인 것도 알고 있었나?”
린느는 미간을 좁힌 채로 눈을 깜빡였다. 원작에서 스테빈스는 아예 언급조차 없던 노인이고, 프레이는 고작 한 줄짜리 등장인물이었으니 두 사람이 직계 사이인 줄은 린느 역시 알 턱이 없었다.
“스테빈스가 자신의 손녀까지 이용해, 이런 일을 꾸몄을 거라곤 나 역시도 생각하지 못했어.”
죄책감 어린 금빛 눈동자.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자, 린느는 직감했다. 미리안이 던진 화살이 제게도 향했음을.
“미리안 님이…… 아버지 낙마 사건에 가담했군요. 그러니 대공님께서 이렇게 머뭇거리는 거겠죠. 집무실에 쳐들어와 약통을 훔친 것도 별일 아닌 듯 말하면서, 이렇게까지 말하길 꺼리시는 걸 보니, 제 아버지가 엮인 게 분명해요.”
“결론만 말하면, 미리안의 목적은 그대가 맞아. 그리고, 세르트 경의 낙마 사건에도 손을 얹은 게 맞고. 다만, 그대를 해치려 한 건 아니었어.”
“그렇다고 해서 죄가 가벼워지진 않아요. 미리안 님은 아셨거든요. 제가 아버지와 얼마나 돈독한지……. 알고도 이용했어. 그런데, 미리안 님을 비호하는 거예요?”
원망과 슬픔 그리고 절망이 뒤섞인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밀러가 말허리를 잘랐다.
“린느, 난 미리안을 용서해 달라 말한 게 아니야. 적어도, 그대가 상처를 덜 받길 원해서 한 말이지, 그대가 그 여자를 용서해도 내가 못 해. 안 해.”
마구 휘청거리던 청록색 눈동자가 길을 찾아 심지 굳게 멈췄다. 그녀는 말없이 밀러를 올려다봤고, 밀러는 다짐하듯이 말했다.
“당장이라도 멸문해 버리고 싶은 걸 아득바득 참고 있어. 그대가 원하지 않을 테니까. 그대가 내게 가르쳐 준 것들과는 상반되니, 이렇게 참고 있어, 린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