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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105화 (104/122)
  • @105화

    아이라는 말에 밀러는 입술을 채 다물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아이라니. 아이? 마치 처음 듣는 단어인 양, 어색하기 그지없는 단어였다. 아이라.

    “만약 아이가 생긴다면, 대공님의 눈동자 색을 닮았으면 좋겠어요.”

    린느는 해맑은 얼굴로 그의 눈꺼풀 위로 입을 맞췄다.

    “잘 자요. 오늘도 고생했어요.”

    그녀는 금세 몸을 돌려 이불을 귀밑까지 끌어 올렸다. 그가 넋을 잃고 있을 때 어서 도망치려는 심산이었다. 금세 눈치챈 그가,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러 꼭 끌어안았다. 당장이라도 안고 싶었으나, 피곤한 그녀를 괴롭히고 싶진 않았다. 밀러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 거로 만족했다.

    ‘아이…….’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지만.

    * * *

    아침이 밝자마자, 여느 때와 같이 밀러가 그녀의 수발을 자처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아서 직접 수발을 드냐 따져도, 그는 웃음으로 일관했다. 그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서, 그녀의 발에 구두를 신겨 줬다.

    “무릎 꿇는 거 보기 싫은데.”

    “그대에게만 꿇는 귀한 무릎이야.”

    능청맞기는. 그는 한쪽 구두까지 신겨 주고선 린느를 올려다봤다.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여, 린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기다렸다.

    “린느, 이젠 마음을 정했을까?”

    그의 물음이 무얼 뜻하는지 린느는 너무나 잘 알았다. 그리고, 이미 마음을 정한 지도 꽤 오래됐다. 그러나 귀여운 장난기가 올라 콧대를 올리고 팔짱을 끼며 비뚜름하게 웃었다.

    “제가 대공비가 되면 뭐가 좋아요?”

    밀러는 그녀의 물음에 픽, 웃음을 흘렸다. 곧 그는 헛기침하며 진중한 표정으로 장난스레 답했다. 유능한 보좌관 같은 말투였다.

    “일단 이 넓은 대공저는 대공비의 소유가 됩니다. 하여, 마음대로 보수하고 꾸밀 수가 있죠.”

    “으음. 그건 좋네요. 그리고 또 뭐가 있나요?”

    “…대공저가 대공비의 소유가 된다는데도 구미가 덜 당기는 겁니까?”

    “그럼요? 대공님이 제 소유인데, 대공저가 뭐 대수랍니까?”

    밀러는 그녀의 똑 부러지는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이에, 엄중한 목소리로 이건 정말 마음에 들 거라며 나지막이 말했다.

    “귀족법에 의거한 시험은 가주만 치르면 됩니다. 하여, 대공비가 되시면 무시험 확정이란 뜻이죠.”

    “그, 그 말씀을 먼저 하셨어야죠! 세상에, 그럼 대공님께서 백작비가 되면 제가 시험을 치르는 거예요?”

    밀러는 그게 무슨 커다란 문제냐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그에게는 그다지 문제랄 것도 아니긴 하지. 반면, 이는 린느에게 큰 수확이었다. 그 어려운 법 공부며 역사 공부를 건너뛸 기회이니 말이다.

    “따지고 들 것도 없겠어요. 축하해요, 대공님. 방금 대공비가 되기로 마음먹었거든요!”

    그녀의 대답에 밀러는 방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맞춰 린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늘 그래 왔듯이, 밀러는 자신의 오른팔을 그녀에게 건넸고. 그녀는 평소처럼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평화로웠다.

    두 사람은 함께 침실 밖으로 나와 복도를 거닐었다. 평소처럼 평화로운 대공저엔 어제의 흔적은 티끌도 없었다.

    “설마 밤 동안에 청소를 한 걸까요?”

    “그랬을지도.”

    딱히 그리하라 명령한 적도 없건만. 린느가 대공저에 들어온 이후로 대공저 사용인들은 더욱 부지런해졌다. 원래도 성실한 이들이었으나, 이전보다도 더 부지런해져 그들의 주급을 인상해야 하나 고민스러울 정도다. 밀러는 린느를 내려다보며 지그시 미소 지었다.

    귀족들은 저를 향해 또 다른 태양이라 칭하지만, 진정한 태양은 자신이 아니라 린느가 분명하다. 가는 곳마다 빛을 내며, 주위를 생기로 가득하게 만드는 태양. 그래서 자신이 그녀에게 맹목 없이 흔들렸고,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나보다.

    “그대 덕분에 내가 사람처럼 살아. 고마워.”

    린느는 그마저도 자신의 덕분이 아니라, 부지런한 사용인들 덕분이라 말했다. 그 끝엔 맑은 미소까지 얹었다.

    “각하, 아가씨 나오셨습니까?”

    집사장이 반듯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더니, 안경을 고쳐 쓰며 두 사람의 안색을 살폈다. 반면, 두 사람의 시선은 대공저 로비를 스윽 돌아봤다.

    “신경 쓰실 일은 최소화했습니다, 각하.”

    그의 말대로 대공저 로비엔 어제의 연회장 흔적이라곤 티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공저 사용인들이 합심해, 밤사이에 일을 모두 처리한 덕분이었다. 안나가 있을 자리엔 넬 부인과 라밀라가 서로를 도와 안나의 빈자리를 채웠다.

    “고생했군. 앞으로 일주일간 최소한의 인력만 본관에 배치하고, 나머지 인력은 별채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해 둬.”

    “황공하오나, 3일이면 충분할 듯합니다. 각하.”

    “조만간 또 연회가 열릴 듯하여, 미리 휴가를 주고자 함일세.”

    자리에 있던 이들의 이목이 밀러에게로 쏠렸다. 그의 말을 더 듣기 위해 어린 하녀들은 일부러 늦장을 빼며 걸었고, 짐을 나르던 인부들은 괜스레 짐을 바닥에 내리다가 어깨에 걸치기를 반복했다.

    “식을 올리기 위함이니.”

    금빛 눈동자가 애정을 머금고 린느를 바라봤다. 이에 린느는 뺨을 붉히고서 싱긋 웃었다. 성격도 급해라. 대공비가 되겠다고 말한 지 고작 10분인데, 결혼 발표를 할 줄이야.

    “저, 정말이십니까? 정말, 정말 아가씨와 식을 올리시는 겁니까?”

    “그럼 우리 각하께서 거짓말을 하시겠는가?”

    “노, 놀라고 기뻐서 그렇지요!”

    본관에 함박웃음이 터졌다. 빨래통을 들고 나르던 하녀들은 몸만 한 빨래통을 들고서 덩실덩실 움직였고, 바닥을 쓸던 이들은 빗자루를 들고 자리에서 뛰듯이 기뻐했다. 다양한 웃음소리가 한데 엉겨 대공저를 가득 채웠다.

    밀러와 린느는 서로의 눈을 번갈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제 일처럼 기뻐하는 그들의 웃음소리에 두 사람의 마음도 따듯해졌다.

    쿵.

    그때, 알렉스가 대공저 문을 넘어 뛰듯이 걸어왔다.

    “각하.”

    알렉스의 부름에 밀러의 표정이 굳은 채로 그를 향했다. 알렉스의 등 뒤로 젊은 귀족이 보였다. 그는 차분한 걸음으로 밀러와 린느에게 다가가더니, 죄인의 얼굴로 머리를 조아렸다.

    밀러는 굳은 얼굴로 그 남자를 빤히 내려다보기만 했고, 린느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탓이다.

    “마르타 토트린, 제국의 북극성을 뵙습니다. 페리하츠 대공가에 영광을.”

    토트린과는 닮은 점이라곤 티끌도 없는 젊은 남자는, 미리안의 오라비였다. 밀러는 마르타의 인사를 받아 주지도 않고 알렉스에게 가볍게 턱짓했다. 응접실로 보내라는 사인이었다.

    “각하, 저는 제 동생을 보러 왔습니다. 다른 건 감히 바라지 않습니다.”

    마르타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특히 다른 건 바라지 않는다는 말투는 마치, 줘도 갖지 않겠다는 그의 다짐마저 느껴질 정도였으니. 밀러는 가볍게 조소를 뱉으며 그를 내리깔아봤다.

    “그건 내 알 바 없고. 그대가 바라건 바라지 않건, 난 그 무엇도 그대에게 주지 않을 수도 있어.”

    밀러는 그의 어깨를 스치며 린느와 함께 대공저 본관 밖으로 나섰다.

    그가 응접실에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면, 마르타는 며칠이고 응접실에서 그를 기다려야 한다. 그게 곧 이 나라의 법도이자 예법이니, 나가고 싶어도 이미 대공저에 발을 들인 이상 대공의 허락 없인 마르타 역시 대공저에 발이 묶이는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타는 망설임조차 없이 응접실로 향했다.

    린느는 걸음으로는 밀러를 따라 나섰지만, 재차 뒤돌아보며 마르타를 확인했다.

    ‘분명 미리안을 보러 왔다고 했어.’

    그 말뜻은, 미리안이 대공저에 갇혀 있단 뜻일까? 린느는 마음이 복잡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진작에 읽었는지 밀러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손을 어루만졌다.

    “린느, 미리안이 걱정되나?”

    “오늘 물어봐도 된다 하셨죠? 그럼 물어봐도 되나요?”

    화원으로 향하는 걸음이 무거웠다. 질문 끝에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몰라 두려운 탓이다.

    “미리안 님 어디 계셔요?”

    린느는 질문을 던지자마자 바싹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때, 화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린느의 머리칼을 스치며 기분 좋은 꽃내음을 풍겼다. 언제 맡아도 좋은 꽃내음이었는데, 지금은 꽃향기도 흐릿할 만큼 심장이 두근거렸다.

    도대체 고작 하루 만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마르타까지 왔을까. 그녀의 불안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때쯤, 밀러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벤치 위로 깔아 줬다. 당연하단 듯이 그곳에 린느를 앉혔고, 그는 그녀 옆에 앉았다.

    “그대가 내게 준 약병이 연회 당일 사라졌어. 누가 집무실에 침입했거든.”

    밀러는 린느의 표정을 찬찬히 살피며 그녀의 손 마디마디를 훑으며, 깍지를 꼈다.

    “미리안이 내 약병을 훔쳤어.”

    “……말이 돼요?”

    “응. 말이 되더라고. 그렇게 됐거든.”

    심약한 미리안은 집무실에 드나드는 것조차도 두려워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집무실에 침입해 약병을 훔쳤다니. 린느는 둘 사이에 오해가 있었을 거라며 그를 설득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지난날, 미리안이 밀러에게 품은 적대감이 떠오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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