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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104화 (103/122)

@104화

미리안은 사용인들이 별채를 드나들며 나눈 대화로 린느가 대공저에 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래서 당장 묻고 싶은 게 많았으나, 차마 그럴 낯이 없어 손가락을 뜯었다. 무슨 낯으로 그녀의 안위를 묻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리안은 뻔뻔히도 재차 물었다.

“많이… 많이 화나셨겠죠? 그렇죠?”

안나는 그녀의 물음에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딱히 침묵하라는 명령을 받진 않았으나, 안나는 그녀에게 답해 주고 싶지 않아 침묵을 택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쉽지 않았다.

“제가…… 그렇게 하면… 린느 님은 백작저로 돌아갈 수 있으시니깐…….”

“그걸 변명이라고 하세요? 아가씨, 다른 분도 아니고 린느 아가씨세요. 그분을 아가씨 손으로 망치려 들다니요. 그동안 린느 아가씨께서 얼마나 잘해 주셨는데……. 아가씨,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아가씨께서 저지르신 거예요. 세르트 경께도 린느 아가씨께도, 모두에게요.”

안나의 타박이 이어지자, 미리안은 떠는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몸체가 파르르 떨렸고, 절망 어린 울음소리도 간헐적으로 들렸다. 그 끝에 미리안이 말했다.

“알아요. 그건 제가 잘못했어요……. 프레이 님의 조부께서 린느 님께 그런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세르트 경께 못 할 짓을 한 건 맞아요. 하지만 그것뿐이에요.”

안나의 눈동자가 맹위를 부리며 미리안을 노려봤다. 단호하게 그것뿐이라 칭한 탓이다.

“약통을 훔친 건 후회하지 않는단 말씀이세요?”

“훔친 건 잘못했지만 후회하진 않아요. 각하께서 병을 앓는 게 제 탓은 아니잖아요?”

“그게 무슨……!”

“안나 님께도 실망이에요. 안나 님은 모든 걸 다 알면서도, 어떻게 저만 타박하세요? 린느 님이 불쌍하단 생각 안 들어요? 린느 님은 각하께 이용당하고 있어요. 린느 님까지 각하의 병을 떠안고 살 필욘 없잖아요!”

망연자실한 안나의 눈동자가 미리안을 빤히 주시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어디서부터 썩어 버린 건지 그녀 역시 알 수가 없기 때문이리라. 두 사람 사이에 찬 기운이 감돌았다.

미리안은 세르트 경의 낙마 사건에 대해선 유감을 표했지만, 밀러의 집무실을 뒤진 것에 대해선 이처럼 당당했다. 아니, 오히려 화를 뿜고 있지 않은가. 이에, 안나는 주저앉듯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방 안에선 시계 초침 소리만 째깍째깍 울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악단의 연주 소리와 귀족들의 웃음소리와 사용인들의 인기척이 사라지자, 안나가 입을 뗐다.

“그러는 아가씨께서는요?”

그녀의 물음에 미리안의 텅 빈 눈동자가 천천히 안나에게로 옮겨졌다. 마치, 이 대공저에 처음 온 날처럼, 그녀의 눈동자엔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아가씨께서도 린느 아가씨를 이용하고 있지 않나요?”

공허하던 그녀의 눈동자에 순식간에 이채가 돌았다. 사납게 돌변한 눈동자가 적과 마주한 것처럼 살의를 띄었다.

“이용이요? 제가…… 린느 님을요?”

“네, 이용이요. 심지어, 아가씨께선 린느 아가씨께서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는 데에 동조하셨잖아요. 적어도 각하께선 그런 행동은 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린느 아가씨께서 행복할 수 있도록 배려하셨지.”

“동조…? 배려?”

그녀가 말아쥔 손가락이 희게 질렸다. 화가 치밀어 안나에게 소리를 치려던 순간. 목구멍이 턱 하니 막혔다.

“아가씨께서는 그냥 탓하고 싶은 사람을 찾는 것뿐이에요. 그리고, 그 탓을 각하께 모두 미루신 거죠. 그렇죠? 저도 처음에는 아가씨께서 린느 아가씨를 질투하시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각하를 질투하신 거였어요. 맞죠?”

“…….”

미리안은 밀러에게 영영 린느를 뺏길까 봐 겁났다. 오라버니를 토트린 백작에게 뺏겼듯이, 린느 역시 밀러에게 뺏길까 봐 너무나도 두려웠다.

공포심은 인간에게 힘을 실어 준다. 용기와는 다른 힘. 특히, 미리안처럼 불안정한 인간은 평소라면 하지 못할 것도 강행하기도 한다. 미리안은 눈물을 뚝 그치며 갈라지는 목소리로 나직이 읊었다.

“안나 님 알면서 제게 왜 그러세요……? 질투가 아니에요. 린느 님이 각하를 좋아하실 리가 없잖아요. 린느 님께서 뭐가 아쉽다고…….”

미리안은 젖은 눈으로 맹렬히 안나를 노려봤다. 무엇이 저토록 미리안을 망치고 해쳤을까.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된 망가짐이었을까? 안나는 미리안이 안쓰럽기까지 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가씨께선 끝까지 믿고 싶은 대로 믿으실 생각이신가 보네요.”

안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냉랭하게 답했다.

“직접 여쭤보세요, 린느 아가씨께. 아가씨께서 직접 여쭤보란 말씀이에요. 물론 만나 주셔야 가능하겠지만.”

* * *

뜨거운 욕조에 몸을 녹이고 나오자 온몸에 엉겨 있던 피로가 녹아내렸다. 하지만 머릿속에 쟁여 둔 걱정거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미리안도 안나도 보이지 않는지 걱정이 앞섰다.

“린느?”

나지막한 목소리에 린느는 어깨를 흠칫 떨며 시선을 옮겼다. 린느와 달리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피곤이라고는 터럭도 보이지 않는 밀러가 있었다. 칠흑처럼 새까만 그의 흑발에 어린 물기가 묘한 색기를 자아냈다. 그는 무심히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린느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아침 해가 밝으면 함께 백작저로 가 보는 게 어때?”

“어머니도 귀국하셨으니 굳이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그럼 어떤 걱정이 그대의 어깨를 이토록 무겁게 만들었을까.”

그 걱정이 눈에 보인다면, 장검으로 베고 말 텐데. 그녀의 걱정은 눈으로 볼 수가 없으니 그마저도 불가능하리라. 어느새 다가온 그가 그녀의 젖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만져 줬다.

“머리는 말려야지, 린느.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이래?”

“대공님도 머리 안 말렸잖아요.”

밀러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녀의 머리칼을 수건으로 감싸 톡톡 두들겼다. 하녀들의 손길보다 부드러웠으며 조심스러웠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그대는 너무 작고 여려. 너무 작아서 불안해. 그런데 아프기라도 해 봐. 내가 무슨 일이 잡힐까.”

말이 그렇게 되나? 린느는 자신의 키는 평균 키이며, 작지도 여리지도 않다며 주장했다. 하지만, 밀러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리 그렇게 주장해도, 그의 눈에는 여전히 작아 보이니 말이다.

“하긴 대공님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겠네요. 워낙 대공님이 크잖아요?”

린느는 그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밀러는 수건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말린 후, 빗을 들었다. 처음에는 서툴러서 두피를 콕 찍기도 했지만, 그의 솜씨는 날이 갈수록 늘었다.

그의 손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빗, 그는 세상 진중한 얼굴로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칼을 빗겼다.

“그대의 전속 하녀로 태어났어도 행복했을지도.”

“네? 전속 하녀가 주인보다 까탈스러우면 돼요?”

“그렇……. 내가 까탈스러운가?”

“음, 네.”

린느의 단호한 대답에 밀러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더불어, 자신의 어떤 점이 린느에게 까탈스러운지 되짚어 가며 때아닌 자아 성찰을 했다. 그때, 참다못한 린느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저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내일.”

그의 뺨이 린느의 한쪽 뺨에 부드럽게 닿았다. 너른 품으로 그녀를 꼭 끌어안더니, 흰 목선에 입을 맞췄다. 닿은 곳마다 덴 것처럼 뜨거워, 린느는 그의 팔을 꼭 잡고선 앓는 소리를 했다. 밀러는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입술을 스쳐 가며 물었다.

“그래 줄 수 있어?”

뜨거운 입김이 닿을 때마다 몸이 녹듯이 자르르 끓었다. 린느는 그의 입술에 쫓겨, 고개를 수차례 끄덕였다. 하지만 어느덧 그녀에게 닿은 도톰한 입술이 린느의 몸을 천천히 녹였다. 달콤한 사탕을 혀로 굴려 녹이듯이, 그의 입맞춤은 그토록 달게 굴었다. 금방이라도 그녀를 녹일 것처럼, 뽀얀 살결을 머금었다. 붉게 물들일 때쯤 그의 입술이 살갗에서 떨어졌다.

숨 쉬듯이 치미는 소유욕에 그녀의 몸에 흔적을 남기고자 송곳니를 세우곤 했으나, 그는 욕구를 짓눌러 바닥에 처박았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린느를 위해서라면 어려운 일을 잘도 쉬운 일처럼 곧잘 처리했다. 그때, 린느의 흰 손이 그의 뺨을 감쌌다.

“이만하면 완벽해요. 내일 아침에도 빗질해 줘야 하니 그만해 주셔도 좋아요.”

“안나에게 배워 놔야겠어. 빗겨 주는 거 말고 다른 것도 해 주고 싶거든.”

그는 그녀의 손바닥에 진한 입맞춤을 남기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를 숨기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밀러가 가볍게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는 마치 포크를 쥐듯이 무척이나 간단히 그녀를 안아, 캐노피를 젖히며 침대 위로 내려 줬다.

그와 같은 침실을 이용한 이후로부터, 그는 좀처럼 그녀를 땅에 내려놓는 법이 없었다. 그 덕분에 린느의 침실용 슬리퍼는 새것과 다름이 없었다. 린느는 투정을 부렸다.

“벌써부터 불 보듯 눈에 훤하네요.”

그는 그녀의 곁에 몸을 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눈에 훤하냐며 물어보자, 린느는 그의 품에 파고들며 말했다.

“아이라도 생기면 응석받이로 키울 게 눈에 훤하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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