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결혼이란 말에 린느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그것도 잠시, 그녀의 눈매가 다정하게 호선을 그렸다.
“당연하죠. 어머니께서 제국에 계셨더라면, 이번 연회 준비도 함께했을 텐데요?”
“어, 어머머. 진심이니? 정말이지?”
“그럼요!”
엘리자는 활짝 웃어가며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렇게도 좋은지 그녀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얘, 내가 이제 좀 집에 들어갈 맛이 생겼어. 너희 아버지와 헬렌은 연회라면 귀찮다고 소파에 눕기 바쁘잖니? 한데, 네가 연회에 관심이 있을 줄이야! 그래, 그래야 내 딸이지 암!”
엘리자는 함박웃음을 지으면서도 노련하게 주변을 훑어봤다. 그러더니 린느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각하께선? 각하께선 잘해 주시니? 아까 보니, 충분히 잘해 주시긴 하던데. 단둘이 있을 때도 한결같냔 소리야.”
“그럼요? 늘 잘해 주죠?”
“그럼 청혼도 받았겠구나?”
“그…… 렇죠?”
엘리자는 눈썹을 굽이치며 린느를 빤히 바라봤다. 은근슬쩍 떠본 건데, 아무리 봐도 미심쩍은 표정과 말투이지 않은가. 엘리자는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유능한 형사처럼 눈빛을 달리했다.
“안 받았니?”
“아뇨아뇨, 받았어요. 저한테 대공비가 될 건지, 각하께서 백작비가 될 것인지 정하라 하셨거든요.”
“…백, 백작비?”
“네! 백작비요.”
이건 또 무슨 듣도 보도 못한 해괴한 소리인가. 엘리자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심각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요즘은 연애도 신박하게 하는구나. 백작비라니…….”
엘리자는 헛웃음 끝에 힘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하긴, 귀족들 간에 연애 결혼이란 아주 보기 드문 사례이니, 두 사람의 연애도 흔치 않을 테지. 엘리자는 애써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린느 너는 뭐라 대답했니? 당연히 대공비가 되겠다 했겠지?”
린느는 곁에 있던 체리를 입에 넣으며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직 대답 안 했는데. 아, 이따 대답해 줘야겠네요.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엘리자는 그녀의 대답에 입을 벌린 채로 넋이 나갔다. 그런 그녀에게 린느는 장난스레 체리를 입에 넣어 주며 헤헤 웃을 뿐이었다. 그때, 본관 문이 활짝 열리더니 눈빛만으로도 사람의 혼을 집어먹을 것처럼 날렵한 금안이 린느를 빤히 응시했다.
린느는 자리에서 일어나 배시시 웃더니, 그런 그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엘리자는 당장이라도 무엄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딸을 말리고 싶었으나, 그럴 틈도 없이 린느는 해맑았다. 아무리 그가 그녀를 아낀다 해도, 제국의 북풍이라 불리는 대공이 어디까지나 웃으며 그녀의 응석을 받아 줄진 아무도 모르니 말이다.
엘리자는 걱정을 산더미로 안고서, 밀러의 안색을 힐끔 살폈다. 그 자리엔 제국의 북풍이 아니라 따듯한 봄바람만이 존재했다.
“세르트 백작 부인, 인사가 늦었습니다.”
“아, 아닙니다. 대공 각하.”
엘리자는 답지 않게 어수룩한 인사를 늘어놨다. 밀러의 입에서 존칭이 나온 탓이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대공저로 모실까 했는데 먼저 이미 뵈어 다행이군요.”
“모, 모시다니요. 각하께서 저를 모시다니요, 말씀이 과하십니다. 부디 말씀 편히 하소서.”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의 금안이 린느를 진득하게 향하더니,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절로 휘었다. 그 모습을 코앞에서 목격한 엘리자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자의 웃음이 아닌가. 보기만 해도 따듯한 미소였으니. 엘리자는 가볍게 묵례하며 말했다.
“그리 말씀해 주시어 영광입니다, 각하. 허락만 해 주신다면 조만간 찾아뵈러 와도 될는지요.”
엘리자는 적당히 그와 거리를 두며 말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의 딸을 어여삐 여기는지는 알겠으나, 그건 그거고 결혼은 결혼이 아닌가. 엘리자는 제국에 북풍이 아니라 북풍의 신이 온다 해도 쉬이 넘어갈 생각은 티끌만치도 없었다. 이에, 엘리자의 눈동자가 그러한 뜻을 품고서 밀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꽂혔다.
“염려 마십시오. 부인께서 테트리사 제국에서 긴 여행을 채 마무리하지 못하고, 대공저 연회에 참석했다 들었습니다. 하여, 조만간 백작저에 사람을 보낼 테니 충분히 여독을 푼 후에 정식으로 초대해 드리지요. 물론, 움직이기 힘들다면 제가 움직여도 상관없습니다.”
순간, 연회장에서 잔잔하게 울리던 웃음소리와 대화 소리가 티가 날 만큼 잦아들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기 위함이었다.
“영광입니다, 대공 각하.”
그들의 이목이 쏠렸다는 걸 눈치챈 엘리자는 말을 아꼈다. 자신의 위치를 굳이 과시할 이유가 하등 없기 때문이리라. 밀러의 입에서 존칭이 나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영광이었으니. 엘리자는 적당한 때라 여기고 말을 아낀 것이었다. 그녀는 예의를 차려 밀러에게 인사를 했다.
“이번 연회에 초대해 주시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각하. 그럼 저는 이만.”
엘리자는 끊고 맺는 데에 탁월한 여인이었다. 물론, 두 사람의 대화에 온갖 관심을 쏟던 귀족들에겐 퍽 힘 빠지는 일이었으나 그건 엘리자가 바라는 바였다. 이 정도만 해 둬도, 내일 아침이면 린느와 밀러의 결혼 이야기는 기정사실이 될 테니, 그녀로서는 굳이 밀러의 체면을 깎아내릴 필요가 없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굳이 밀러가 나설 자리에 린느의 어머니인, 엘리자 자신이 직접 나선 것이었다. 밀러의 면이 곧 세르트 가문의 면이며, 세르트 가문의 면이 곧 밀러의 면이 아니겠는가. 이에, 자식 험담에 눈이 돌아간 세르트 백작 부인이란 소문이야 원래 흔하디흔한 소문이었으니 꺼릴 게 없었다. 물론, 꺼리든지 말든지 앞뒤 가리지 않고 무릎부터 접은 거긴 하지만.
‘아무튼 오늘은 오랜만에 숙면을 취할 수 있겠어. 눈으로 직접 봤으니.’
퍽 오랜만에 짓는 웃음이었다. 그것도 만족감과 안도감이 섞인 웃음.
엘리자는 부인들 틈으로 스며들며, 시간이 늦었다 호들갑을 떨었다. 눈치 없는 귀족들이 코가 아주 삐뚤어지다 못해 휠 때까지 마셔 댄 탓이다. 이러다가 해가 뜰 때까지 밀러와 린느가 쉬지 못할까 염려스러워, 엘리자는 손과 발을 재촉하며 귀족들을 부추겼다.
“노래 몇 곡만 더 들으면 해가 뜨고도 남을 시간이 아닙니까? 돌아갈 채비는 안 하세요? 저야 뭐, 돌아가는 길이야 가깝다만.”
놀란 귀족들이 하나둘 밀러와 린느에게 달려가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작정하고 밤을 새우려던 건 아니었으나, 마음 툭 터놓고 오랜만에 즐겼더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탓이다.
“각하, 다음 연회에 초대해 주신다면 열 일 제쳐 놓고 참석하겠나이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불러 주십시오!”
밀러는 여느 때처럼 고개만 끄덕여 줬다. 이렇게 무뚝뚝한 남자가 도대체 미소는 어떻게 짓는지. 린느는 밀러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잘게 저었다.
“소백작님, 제가 사교계 인생 30년입니다만. 이렇게 마음 편히 즐긴 연회는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헛말을 한다 여기실지도 모르겠다만, 진정 제 마음으로 드리는 말씀이란 걸 꼭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소백작님께서 불러만 주신다면 언제든지 기쁜 마음으로 참석할 테니, 부디 다음 연회에도 영광을 베풀어 주십시오!”
장황한 인사말에 밀러는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손을 휘휘 저었다. 하긴, 그에게는 이 얼마나 귀찮고 성가신 일이겠는가. 하지만 린느는 그들의 감사 인사에 진심으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고생한 보람이 있었어.’
린느는 마지막 손님까지 배웅했으며, 밀러는 부릅뜬 눈으로 그녀의 곁을 지켰다. 이에, 인사하러 온 귀족들이 쭈뼛거리며 밀러의 눈치를 살폈다. 밀러는 기다렸단 듯이 그들을 향해 턱짓했다. 인사치레 그만두고 어서들 돌아가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나머지는 내가 정리할 테니, 먼저 들어가서 쉬는 게 좋겠어.”
“대공님이 정리를 하신다구요?”
린느는 웃음을 터트리며 조소했다. 남은 귀족들을 싹 모아 대공저 밖으로 내보내는 것도 정리라면 정리겠지.
그러나 눈치 빠른 귀족들은 쫓겨나기는 싫었는지, 서둘러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대공저 본관이 텅 비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오페라 공연이 끝난 뒤 휑한 관람석처럼, 아까까지도 시끌벅적했던 본관엔 대공저 사용인들만 자리했다. 그들은 누가 딱히 시키지 않았음에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다퉈 정리를 시작했다.
그때, 하녀들이 린느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가씨, 이제부턴 저희가 정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들어가 계세요. 따듯한 목욕물을 받아 놨으니, 피로를 풀기 좋으실 겁니다.”
노련한 하녀가 곁에 있던 어린 하녀와 메리에게 눈짓하며 린느를 방으로 안내했다. 린느는 가는 길에도 여러 번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봤다.
‘미리안도 안나도 보이지 않는 게 이상한데……. 도망치려다 또 걸렸나?’
* * *
본관처럼 화려하고 장엄한 공간은 아니었지만, 대공저 별채라 해서 누추하진 않았다. 평 남작가의 저택 정도의 규모에 꽤 깨끗하고 산뜻한 공간이었다.
안나와 미리안은 별채에서도 방 한 칸에서 말없이 시간만 보냈으니. 안나는 예전처럼 미리안을 보듬거나, 도망가지 말아 달라 애원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 자리를 지킬 뿐.
“린느 님도 제가 한 짓을 아시겠죠……. 이제는….”
미리안이 몇 시간 만에 뱉은 첫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