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섀르넌은 손을 털며 천진하게 웃었다.
“레이디께서 기다리다 지쳐 나오겠습니다. 바람이 차니 안으로 드시죠.”
밀러는 딱히 대답도 없이 연회장 문을 향해 몸을 틀었고, 섀르넌은 그 자리에 서서 밀러를 올려다봤다. 왜 그곳에 멈춰 있느냐 물어보려던 찰나였다.
“전 이만 공작저로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오랜만에 귀국했으니, 제 앞으로 쌓인 일만 해도 산더미이니 말이죠.”
“그럼 다음을 기약하지. 다음은 식장에서.”
섀르넌은 그의 대답에 헛웃음을 뱉더니, 장난기 어린 눈으로 투정을 부렸다. 서로 짓궂으니 마니 한바탕 한 후에야 섀르넌이 마차에 올라탔다.
* * *
좌측에서는 체리 바구니, 우측에서는 청포도 바구니. 린느를 사이에 두고 넉살 좋은 부인들이 린느의 입에 과일을 하나씩 물려 줬다. 마치, 광장에 나타난 이야기꾼을 구경하러 나온 아이들처럼 그녀들은 다채로운 가십에 눈을 크게 떴다가 얕게 뜨길 반복했다.
후작 부인의 정부가 12명이라더라, 그 정부들의 미모가 그렇게 꽃처럼 아리따우더라, 후작저 침대는 한 달에 한 번은 갈아치우더라 등등.
온갖 가십들이 넘나드는 가운데, 부인들이 숨죽여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 센터는 린느가 차지했다.
“12명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에 데려온 남작가 차남은요. 무려 10시간을 한대요!”
“여, 열 시간이요?”
“뭐를 열 시간 동안 해요? 일을요?”
“어머머, 일은 일이죠!”
부인들은 부채로 너머로 호호 웃으며 야살스레 웃었다. 그 가운데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한 린느만 빼고.
‘적당히 부풀려야 재미라도 있지. 열 시간은 무슨.’
말도 안 된다며 체리를 받아먹던 그녀가 멈칫했다. 아니지, 열 시간 가능할지도……?
‘밀러만 봐도…….’
달빛을 받은 그의 커다란 몸체를 떠올리자마자, 린느는 발을 비비 꼬며 마른침을 삼켰다. 캐노피 너머로 햇살이 비칠 때까지도 지치지 않는 그였으니. 그래, 후작 부인의 정부 이야기도 마냥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리라.
그때,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부인들의 웃음소리가 한꺼번에 터졌다. 린느는 그 가운데에서 그녀들의 웃음소리에 적당히 구색 맞춰 추임새를 넣어 줬다. 너무 과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그때, 한데 모여 있던 부인들을 가로지르며 한 여인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린느 앞까지 성큼 다가온 그녀가, 부채를 걷으며 입꼬리를 쓰윽 올렸다. 말려 올라간 그녀의 입꼬리는 린느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다음 여행지가 그 멋있는 쿨루 해변이었는데. 네가 연회를 주최한단 소식에 다 때려치우고 왔어. 아니?”
엘리자는 입매를 바짝 올려, 장난스레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린느는 엘리자를 올려다보며 잠시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더니, 이맛살을 접어 가며 놀랐다. 거울을 보듯 닮은 얼굴 탓이었다.
“어, 어머니?”
“얘도 참. 누가 보면 초면인 줄 알겠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주변을 스윽 훑자, 부인들이 눈치 빠르게 자리를 피해줬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마주한 모녀이니, 눈치껏 행동한 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엘리자는 그간 못한 말이 많기에 어떤 말부터 꺼낼지 고민스러웠고. 린느는 초면인 엄마와 어떻게 친한 척을 할지가 고민스러워 입을 쉬이 떼지 못했다. 마치, 대화가 부족한 사춘기 아이와 부모의 모습이었으니. 이 어색한 기류를 참다못한 린느가 먼저 입을 뗐다.
“잘 지내셨죠? 아버지 소식은 들으셨구요?”
“알면서 묻는구나? 나야 너무 잘 지내서 탈이다만, 너희 아버지는 도대체 무엇 하다 다리가 그 모양이 된 거라니? 낙마라며.”
린느는 한숨을 폭 내쉬며, 여느 장녀의 흉내를 냈다.
“네. 그동안 일이 좀 있었어요.”
“그 잘난 루이스가 낙마라니! 연애할 땐 맨날 그놈의 승마 기술 보여 준다고 날 어찌나 끌고 다녔는지! 그런 남자가 낙마라니,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나?”
그녀가 느릿느릿하게 부채질하며 새침하게 말을 돌렸다.
“아무튼…… 그렇지 않아도 곧 백작저로 돌아가려 했어. 린느, 네가 고생이 많았구나.”
“제가 뭘…….”
그녀는 자신의 딸을 거리낌 없이 한 품에 쏙 안았다. 서툴진 않았지만, 묘하게 어색한 포옹이었다. 마치, 린느가 자신을 밀쳐 낼 것처럼 엘리자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린느는 초면임에도 엘리자의 허리를 감싸 꼭 안았다.
그제야, 엘리자의 굳은 몸도 서서히 풀렸다. 일전에 린느가 그녀의 포옹을 밀친 적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며, 린느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인성이 어디로 가겠어.’
자신의 딸이기에 엘리자는 더더욱 그녀의 성정을 잘 알았을 터. 사교계를 휘어잡은 세르트 백작 부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포악한 딸에겐 평범한 어머니일 뿐이었다. 마치, 세르트 경처럼.
‘하긴, 아버지께서도 그러셨지. 적당히 예의만 차렸을 뿐인데도, 기다렸단 듯이 먼저 내게 손을 내미셨으니까.’
이는 그들 부부가 자신의 딸을 얼마나 아끼는지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는 흔적이었다. 린느는 어쩐지 엘리자가 안쓰럽단 생각이 들어 그녀의 품에 어리광을 부리듯 꼭 안겼다. 그러자, 엘리자는 아이를 재우듯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어 줬다. 엘리자는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간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너희 아버지 말대로 정말 철이 들었구나 싶네. 다 컸어, 내 딸…. 지금도 늦지 않았어. 아니, 이르지. 이르고말고. 지난 일들은 모조리 잊고 앞으로 잘 지내보자꾸나.”
그 위로가 뭐라고 린느는 코끝이 아려와 눈 뜨기가 힘들었다. 단순한 위로가 아닌, 그녀의 삶 전체를 아울러 위로하는 기분인 탓이리라. 린느는 괜스레 입술을 뻐끔거리며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이를 알 리가 없는 엘리자는 그저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네가 알다시피 내가 표현하는 데에 박하잖니. 너한테 그리 모진 말을 하고 출국하고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너를 응석받이로 키운 것도, 그렇게 만든 것도 우리 부부인데. 그 책임을 성인이란 이유로 네게 돌렸어. 네가 호호 할머니가 된다 해도 여전히 내 딸인 건데, 그렇지?”
린느는 목이 메어 고개만 끄덕였다.
“딸, 그거 아니? 너희 아버지가 내게 보낸 서한에 네 이야기가 다였어. 우리 장녀가 이젠 철부지가 아니게 됐소. 우리 장녀가 이젠 내 걱정도 한다오. 우리 장녀가 이젠 대공저에 발도 들이지 않소. 내가 아주 환청이 들릴 지경이었다니까?”
코끝을 붉게 물들인 채, 엘리자는 배시시 웃었다. 도대체 그녀가 출국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린느는 분명 커다란 소란이 있었을 거라 지레짐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짐작은 적중했다.
“그리고 마지막 서한이 무엇인 줄 아니?”
“…….”
린느는 말없이 고개를 도리질하며, 눈물을 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세르트 경이 다 큰딸을 보며, 육아 일기를 쓰듯이 엘리자에게 서한을 보낸 게 마음이 아픈 탓이다.
그리고 그녀는 원래 이 몸의 주인이 미워졌다. 누구는 갖고 싶어도 갖지 못했는데, 그녀는 모두 갖지 않았는가. 사랑하는 가족과 사랑받는 딸의 자리. 그런데, 이 몸의 주인은 그 소중한 걸 너무나도 쉬이 버렸고, 상처 내기를 꺼리지 않았다.
이에, 린느는 그녀의 과거에 화가 치밀다가도 안쓰럽단 생각마저 들었다. 평생 이 소중한 걸 느껴 보지도 못하고 떠났으니까.
엘리자는 린느의 미간이 구겨지자,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며 옅게 웃었다. 다 괜찮아. 아무리 남들이 뭐라 해도 우리가 있으니까 괜찮아. 마치 그렇게 말하듯이 엘리자의 눈동자가 다정스레 린느를 향했다.
“우리 장녀가 그대를 찾고 있소. 대공저에서 연회를 연다는데, 이만 귀국해야 하지 않겠소. 그게, 너희 아버지가 보낸 마지막 서한이었어.”
그 서한을 보자마자 엘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귀국했다. 린느가 자신을 보고 싶다는 그 말 한마디로, 그간 부정당한 20년간의 응어리가 모조리 풀린 덕이다.
기다려 주면, 언젠간 린느가 자신들의 진심을 알아주고 포악한 행태도 고칠 거라 믿고 인내했던 그 20년이 절대 헛되지 않았음에 엘리자는 부리나케 대공저로 향했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하다.”
지난 20년간 린느의 난폭한 성정에 엘리자조차 질려 버려 그녀의 속은 마른 가지처럼 메말랐다. 부모라고 해서 지치지 않을 순 없었다. 부모 역시 연습을 거쳐 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아무리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린느의 포악한 성정은 쉬이 바뀌지 않았다.
그 탓에 세르트 부부와 헬렌은 천천히 시들어 갔다. 헬렌은 도망치듯이 이른 나이에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며, 세르트 부부는 사업에 집중했다.
그 덕에 어느샌가 돈도 넉넉해졌고,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명예도 생겼지만, 세르트 부부는 무척이나 공허했다. 어린 헬렌조차 본가로 들어오기 싫어, 약혼자와의 혼인을 서두르려 세르트 경을 달달 볶아 댔으니. 린느 한 명으로 인해 평범한 가정은 그렇게 갈라졌었다.
하지만, 그것도 과거의 이야기가 됐다. 그리고 과거로 만든 건, 린느였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런 말만 해서 미안하구나. 실은 연회를 마치고 내일쯤에 다시 대공저에 들러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그래서 일부러 먼저 다가가지 않고 부인들 틈에 숨어, 린느를 바라보기만 했던 건데.
“괜찮아요. 언제든지 대화할 수 있는데요, 뭘. 그리고, 먼저 이렇게 말씀해 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어머니.”
“그럼…… 네 결혼 계획도 이 엄마와 함께 나눌 참이지…?”
엘리자의 얼굴엔 수줍음과 기대감이 함께 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