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101화 (100/122)
  • @101화

    린느가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청록색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그러자, 밀러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는 대신에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추며 미소로 일관했다. 하마터면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까먹을 뻔했으니. 린느는 곧장 되물었다.

    “네? 혹시 미리안 님 2층에 혼자 계셥……!”

    그는 상냥하게도 그녀의 두 번째 질문을 입으로 삼켰다. 갑작스레 입술이 닿자, 린느는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봤다. 짙은 입맞춤은 아니었으나,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린느의 머릿속이 희게 번졌다.

    “린느, 춤도 이쯤 췄으면 꽤 춘 거 같고 연회 분위기도 달굴 만큼 달궜으니 이제 쉬어야 하지 않을까?”

    뭐 이런 맥락 없는 결론이 다 있을까. 린느는 입술을 손으로 가린 채 토끼 눈으로 물었다.

    “벌써요? 태자 전하께서 아직 자리에 계신데요?”

    린느의 부탁과 밀러의 체면 때문에 불편을 감수하고 나온 태자일 터. 그런 그가 지금까지 자리를 지킨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일이건만. 황궁 연회에서처럼 해가 뜰 때까지 자리를 지키진 못할 것이다. 이에, 밀러는 아래 뜬 눈으로 주변을 한번 스윽 훑었다.

    사교계 유명인사인 세르트 백작 부인과 섀르넌 공작이 자리에 있으니, 쉬어도 되지 않겠는가. 밀러는 홀로 이만하면 됐다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으니. 그때였다. 넉넉한 웃음과 함께 황태자가 두 사람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마치, 위세를 망토로 두른 것처럼 황태자의 걸음은 자못 기세등등했다.

    “마음 같아서는 해가 뜰 때까지 함께하고 싶으나, 그리 못해 퍽 섭섭하군!”

    “참석해 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태자 전하.”

    황태자는 밀러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눈짓했다. 웃으며 들뜬 귀족들의 목소리를 연막처럼 사용해, 그는 밀러에게 나지막이 일렀다.

    “하이레니아 후의 일은 내 알아서 할 테니, 한슨이란 자도 내 편으로 보내시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밀러는 기다렸단 듯이 응했다. 처음부터 밀러가 그린 그림엔 황태자의 개입도 포함이었기에,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직계 황족들이야말로, 밀러보다 더 오랫동안 하이레니아를 주시했으니까.

    밀러는 자신을 기폭제로 사용해, 도화선인 하이레니아를 스스로 자멸하게 했다. 그리고 자멸한 자를 처리하는 건, 황족들의 몫이었다.

    “오늘 풀지 못한 회포는 다음으로 기약하겠소. 예를 들자면, 결혼식이랄까.”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던 황태자가 장난기 어린 얼굴로 밀러의 등을 톡톡 두들겼다. 그는 금세 낯을 달리하더니, 린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소백작, 그대 덕분에 황궁 시녀장이 실업을 하게 생겼군. 연회장을 이토록 번듯하게 꾸릴 줄이야!”

    황태자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밀러와 린느를 번갈아 바라봤다. 겉보기에는 그저 그런 농담 같았으나, 그 끝엔 진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이러니 내가 발이 떨어질 리가 있나. 해가 뜰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하건만. 퍽 아쉽다. 그래도 그대들의 얼굴을 이렇게 직접 봤으니 마음은 편히 먹고 돌아감세.”

    그는 그 말만 남기고서 돌연 문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귀족들이 그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동시에 길을 만들었다. 그 길을 따라 밀러도 함께 향했다.

    “제국의 태양이시여, 제국에 영광을!”

    귀족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들떠 있었고, 약간의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퍽 듣기 좋은 인사 소리에 황태자는 실로 오랜만에 웃으며 그들의 인사를 받아 줬다. 기분 좋은 날이었다.

    쿵.

    두껍고 커다란 본관 문이 활짝 열렸다가 닫혔다. 황태자는 자신을 따라 대공저 본관 밖까지 나온 밀러와 섀르넌을 번갈아 봤다. 황태자는 잠시 주저하더니, 끝내 두 사람의 어깨에 각각 손을 얹었다.

    “조금은 시끄러울 수는 있지만, 금방 끝낼 일이니 걱정들 말라. 그리고.”

    황태자의 동공이 빠릿빠릿하게 두 사람을 번갈아 향했다.

    “부디 우정에 변함이 없길 바랄 뿐이네.”

    명령처럼 들렸으나, 확실한 부탁이었다. 품은 말뜻을 알아챈 두 사람은 실소를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으니. 황태자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출발할 때는 10대의 황궁 마차가 움직였으나, 바깥으로 도열된 황궁 마차는 9대뿐이었다. 한 대는 안 봐도 하이레니아의 몫이리라. 황태자는 한 발을 마차 안으로 들인 채, 다시 두 사람을 빤히 응시했다.

    “허투루 듣지 말게나!”

    뭐가 그렇게 못 미더운지. 황태자는 마지막까지 경고한 후에야 마차 문을 탁 닫았다. 이에 두 사람은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지켰으며, 마차가 사라진 후엔 밀러가 먼저 걸음을 뗐다.

    “각하.”

    섀르넌의 목소리에 밀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섀르넌을 향해 몸을 틀었다.

    “조금 치사하셨습니다. 각하께서 그리 나오실 줄은 몰랐으니 말이죠.”

    투정 어린 타박에 밀러는 그만 실소를 흘렸다. 그는 넥타이를 조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조금 치사한 사람이 되더라도 놓칠 순 없었다.”

    “조금이요?”

    “많이라도 상관없어. 역사서에 밀러 폰 페리하츠 대공은 역대 대공 중에서 가장 치사한 작자라 기록되어도 괘의치 않아.”

    섀르넌은 그의 대답에 그만 턱을 툭 떨어트렸다. 그렇게까지 마음이 깊었던 건가? 아니지, 자신을 타국으로 보내고서 마음을 키운 게 분명했다. 이에 섀르넌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알던 밀러는 여인에게 고백하는 방법을 배울 바에야, 차라리 양 떼를 길들이는 법을 알려 달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 오만한 남자가 그사이에 이렇게 변하다니. 섀르넌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밀러가 그런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공작, 내가 그대를 굳이 그 많고 많은 제국 중에 테트리사 제국으로 보낸 이유를 아나?”

    “우리 제국과 가장 멀어서겠죠.”

    무심한 얼굴로 어깨를 스윽 만지던 그가 흠칫하며 섀르넌을 바라봤다. 뭐, 아주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만 절대 그 이유가 다는 아니었다.

    “고작 그 이유라면 반년만 보냈겠나? 아주 이주해서 살라 했겠지.”

    “그건 그렇…….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무튼, 여러모로 그대에게 이득이 많은 업무인 건 그대도 부정하진 못할 터. 그중에서 경중을 따지자면, 옛 정인을 만난 게 가장 큰 이득이었을 테고.”

    정인이란 말에 섀르넌의 동공이 크게 팽창했다. 마치 유령을 본 듯이 그의 눈매가 파르르 떨리기까지 했으니. 여간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14살이나 먹고 내 품에 안겨서 엉엉 울게 만든 리헤튼 영애를 내가 어떻게 잊을까. 게다가 그녀는 그대가 죽도록 사랑한 첫사랑이 아니던가? 분명, 내가 그리 말했던 거 같은데.”

    밀러는 입꼬리를 움찔거리더니, 뒷짐을 졌다. 그가 본격적으로 놀리겠단 뜻을 비치자, 섀르넌이 기겁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마치 공자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두 사람의 죽은 꽤 잘 맞았다.

    “그 이야기는 왜 또 하십니까?”

    “지난번에 그리 말했음에도 그대가 말귀를 못 알아들은 듯하여, 잊었을까 상기시켜 준 것뿐이야.”

    “……그럼, 테트리사 제국에서 리헤튼 영애를 만난 건 우연이 아니었군요.”

    섀르넌의 표정에 근심이 얹혔다. 리헤튼 영애는 섀르넌이 14살 공자 시절에 돌연 소식이 끊겨, 그를 몇 달이나 앓아눕게 한 장본인이었으니까.

    게다가 섀르넌이 테트리사 제국으로 떠나기 전날, 대공저 산책로에서 밀러가 심술을 얹어 섀르넌의 첫사랑을 언급했을 때도 섀르넌의 눈동자가 묘하게 떨렸으니. 그는 분명 해맑은 린느에게서 리헤튼 영애를 본 것이리라. 밀러는 섀르넌을 바라보며 자못 진중하게 물었다.

    “병은 다 나았다던가? 어릴 적부터 잔병이 많아, 따듯한 테트리사 제국으로 요양을 떠난 거로 기억하는데.”

    “그러니 저를 테트리사 제국으로 보내셨겠죠. 이제 와서 모르는 척하셔도 소용없으십니다.”

    “아쉽군.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밀러는 말없이 밝게 뜬 달을 바라보더니, 다시 섀르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웃고 있던 그의 미소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만하면 공도 내 말뜻을 이해했으리라 생각돼. 맞나?”

    모를 수가 없지. 감히 그의 말뜻을 모르는 척을 할 수도 없었다. 이토록 노골적으로 구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진작에 연락 끊긴 리헤튼 영애를 우연을 가장해 섀르넌과 재회하도록 만들고, 그를 린느의 곁에서 반년이나 강제로 떨어트렸는데 어찌 밀러의 뜻을 모르겠는가. 더는 이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이자 부탁인 셈이었다.

    “감히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감히 그럴 수 있다면 그러하겠느냐 집요하게 묻고 싶었으나, 밀러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섀르넌의 공허한 눈동자에서 포기를 느낀 탓이리라.

    “무엇보다도 세르트 영애께서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럼 됐죠.”

    섀르넌은 모래를 삼킨 것처럼 입이 까끌까끌했다. 밀러의 말대로 리헤튼 영애와 재회한 건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재회만 했을 뿐이지 이렇다 할 감정의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어느샌가 리헤튼에게서 린느를 보고 있었으니. 섀르넌은 할 말을 삼키고 말을 말았다. 해 봐야 변명뿐이 더 되겠는가. 그래, 변명이었다.

    그처럼 죽기 살기로 린느만을 바랐더라면, 섀르넌 그도 제국을 떠나지 않은 채 버틸 수도 있었다. 적어도 제겐 그럴 능력이 없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그 길로 테트리사 제국으로 떠났으니, 그는 그 어떤 변명도 얹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의 문제가 아닌, 그녀를 위함이리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