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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100화 (99/122)
  • @100화

    흰 손바닥이 그의 입을 꾹 짓누르며 난감한 듯 미소를 지었다.

    “아, 알았으니까 제발 쫌!”

    그녀의 손바닥에 밀러의 도톰한 입술이 쪽 닿았다. 손바닥부터 시작된 그 달콤한 감촉은 린느의 온몸을 타며 전율을 일으켰다.

    이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얕게 뜨며 손을 등 뒤로 숨겼다. 그러자, 밀러가 손바닥을 그녀에게 내보이며, 나른하게 웃었다.

    “내 일 중독이 그대에게 옮아갔을까?”

    “그, 그런가 보죠….”

    “그대가 연회를 좋아하는 줄 알고 맡겼던 거지, 그대의 걱정을 더 하기 위해 맡긴 건 아니었어. 린느, 이제 즐기는 데에 시간을 할애하는 게 어때.”

    그의 다정한 물음에 답하듯이, 린느는 그의 손 위로 손을 포갰다. 그러자, 밀러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말려 올라갔다. 그는 우아하게 상체를 숙여 그녀의 손등 위로 입을 맞췄다. 금빛 눈동자가 야릇하게 그녀를 올려다봤다. 매일 마주하는 눈동자임에도, 어쩜 이렇게 사람을 홀려 대는 건지. 당장이라도 그의 옷깃을 잡고 침실로 끌고 가고 싶었으나, 린느는 마른침을 삼키며 꾹 참았다.

    ‘이따 봅시다, 대공님.’

    린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뱉으며,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춤 한번 추셔야죠.”

    “그 말만 기다렸습니다, 레이디.”

    밀러는 유려한 미소로 그녀의 도발을 받아쳤다. 그는 잠시 고개를 들어 단상 위로 늘어진 악단을 빤히 응시했다. 이에 린느도 그의 시선을 따라 악단을 바라봤고,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 어!”

    너무 놀라면 말이 안 나온다더니, 딱 그런 상황이었다. 색소폰을 들고 있던 연주자가 린느를 바라보더니,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가볍게 묵례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치 은인을 마주한 듯이 연주자들의 표정이 환했으니. 린느도 따라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나?”

    “도대체 언제 다 준비한 거예요? 서류를 산더미로 쌓아 두고 일하면서, 이런 세심함은 또 뭐람.”

    “그래야, 소박은 피하지 않겠어? 아직 그대가 내 청혼을 받아들인 것도 아니니, 알아서 몸을 사리는 거지.”

    “참나, 그럼 청혼을 받아 주면요? 그때부턴 집무실에서 일만 하실 거예요?”

    “그게 가능하긴 할까? 그대의 집무 테이블을 내 집무실에 가져다 놓는 팔불출이 그게 가능하겠느냔 소리야.”

    린느는 그의 타당성 짙은 대답에 그만 고개를 끄덕이며 일조했다. 그때, 색소폰의 날카롭지만, 풍미 짙은 연주가 음악의 시작을 알렸다. 연회장 전체를 뒤덮을 만큼 가득 차 있던 귀족들은 사이드에 배치된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을 바라봤고 그들은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으며 흐뭇하게 웃음을 지었다.

    “보기가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황태자의 보좌관이 두 사람의 춤을 바라보며 숨 쉴 때마다 감탄을 뱉었다. 수다스럽다며 타박을 들을 만도 했으나, 황태자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며 공감했다. 모든 이들이 웃으면서 한마디씩 거들 때, 한 사람의 표정은 유독 쓰고도 썼다.

    황태자는 곁눈으로 섀르넌의 안색을 살피더니, 금세 시선을 뗐다. 황태자는 이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되었는지 알 턱이 없어 그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한 가지는 너무나도 확실했다.

    ‘두 사람이 이 일로 관계가 틀어지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황태자는 나지막이 한숨만 뱉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던 표정들이었다. 밀러가 저리도 환하게 웃는 모습도 처음이었으며, 셋 중에서 가장 활기찬 섀르넌이 다 죽어 가는 표정을 짓는 모습도 처음이었다. 황태자는 그들 가운데에서 퍽 난감했다. 정치라면 하던 대로 처리하면 되지만, 사랑은 그에게도 익숙한 감정이 아닌 탓이다.

    황태자는 미간을 좁힌 채 고심하던 중, 고개를 잘게 저었다.

    ‘알아서들 하겠지.’

    황태자는 금세 걱정을 지우고서, 샴페인을 들이켰다. 그건 그렇고……. 고민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어깨가 절로 박자를 타고 있음에 그는 깜짝 놀랐다.

    ‘안목이 그냥 좋다 할 게 아니라, 아주 탁월하군. 악단이 연회의 생명줄이건만 용케도 제대로 된 악단을 데려왔어.’

    오랫동안 연회를 열지 않았던 대공가의 연회이기에 별 기대는 품지 않았다. 그냥 연회를 여는 데에 의미를 두자는 마음이었건만. 이번 연회는 성공이 아니라 대성공이었다. 그간 눈엣가시였던 가시도 뽑고, 이처럼 완벽한 분위기에 신나는 연회라니. 황태자는 자신의 신분도 망각하고 가볍게 고개를 움직이며 음악과 분위기를 즐겼다.

    여태 몇 년간 지루한 연회만 마주한 탓일까. 황태자의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이를 숨죽여 지켜보던 이들이 서로의 귀에 속삭였다.

    “까다롭기 그지없는 전하가 아니십니까? 저리도 환히 미소를 짓다니요.”

    “그러게 말입니다……. 전 처음 뵙는 듯합니다. 저렇게도 만족스럽게 미소를 짓는 모습은 말입니다.”

    “확실히, 대공 각하께서 이유도 없이 소백작을 가신으로 들인 게 아니신 겝니다. 진작에 이 타고난 안목을 눈여겨보시고, 들이신 거지요.”

    그걸 이제 알았냐는 듯이 타박하듯 바라보자, 먼저 말을 꺼낸 귀족이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나저나 하이레니아 후께서만 난감하게 됐소. 안 그래도 지난 정무 회의에서도 자꾸 일을 그르치려 하시더니만……. 아까 제 하인이 봤는데, 후께서 후작저 마차가 아니라 황실 마차를 타고 돌아가셨답니다?”

    그의 말에 귀족들이 기함하며 놀랐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낼 뻔했는지, 다급히 입을 틀어막기도 했으니. 놀란 귀족이 헐레벌떡 물었다.

    “그, 그럼 황궁으로 향했단 말이오?”

    “제가 보기엔 전하께서 직접 심문하실 모양입니다.”

    곧 황제로 등극할 황태자의 눈 밖에 나는 일보다 고된 일도 없으리라. 황제는 시험 제도를 도입시킨 후로 귀족들의 눈치를 살피는 편이었다. 반면, 신황이 될 황태자는 거리낌 없이 귀족들을 타박했다. 이제 막 뜨는 태양이 두려울 게 무엇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황태자도 하이레니아에게만큼은 타박을 아꼈었다. 황제의 조언 탓이었다.

    “지난 황궁 연회 때부터 제대로 눈 밖에 나셨으니, 이제 후께선 맡은 자리부터 뺏기겠소.”

    “그러게 진작에 적당히 하셨어야 했습니다. 올해를 제외하고 각하께서 부재이실 때마다 황궁 연회장에서 얼마나 무례했습니까? 전하의 심기를 콱콱 건드는 말들만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이레니아가 그토록 제멋대로 굴 수 있던 이유는 간단했다. 사소한 일부터 중한 일까지 황제가 그의 손을 자주 들어 줬기 때문이리라. 그러한 이유 덕분에 하이레니아는 콧대를 하늘까지 찌르며 다녔고, 그의 말로는 이처럼 암울했다.

    “그야 원래 그런 성정이셨으니 뭐……. 그건 그렇고 도대체 어쩌자고 그런 일까지 꾸미신 건지…….”

    “이유야 많지요. 무엇보다도 황제 폐하께서 하이레니아 후의 손을 들어 주시는 편이니, 후께서도 으레 가벼이 여기고 행동으로 옮기셨을 겁니다. 늘 그랬듯이.”

    귀족들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황제가 일부러 놔준 먹이인지도 모르고, 하이레니아는 배가 터지도록 먹어 댔다. 그 먹이들이 결국 덫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하이레니아는 명예욕에 눈이 가려져 결국 덫에 걸린 셈이었으니. 그 누구도 황태자와 밀러를 탓하지 않았다.

    “그만들 무게 잡으시오. 기분 좋은 날에 기분 좋은 말만 해야지 원. 자자, 잔도 들고!”

    엉겁결에 그들은 잔을 부딪치며 린느와 밀러의 축복을 빌어 줬다. 결혼식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서로 신이 나 두 사람의 축복을 빌고 또 빌어 줬으니. 이쯤이면 축복은 핑계고 술맛이 좋아 잔을 비우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때, 연회장 전체를 아우르는 음악이 분위기를 달리하며 새롭게 또 시작되었다.

    “거 멀뚱멀뚱하니 있지 말고 우리도 나가서 춥시다!”

    “이 사람이 취했나? 어, 어? 노, 놓으시게!”

    가면을 쓴 채로 정숙한 척 점잖은 척 얌전 빼던 귀족들이 하나둘 나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거리며 춤췄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부인들도 부채 뒤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남편을 흉보며 웃었다. 몸치도 저런 몸치가 없다며 비웃던 부인도 자리에서 일어나 자유롭게 춤을 췄다.

    우아하진 않지만, 경박하지 않으며 자유로운 분위기. 그들은 마치 허리띠를 풀고 맛 좋은 음식을 먹듯이 행복해했다. 오늘 하루만, 이 연회장을 떠나는 순간에는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야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서로의 속사정을 떠본다거나 기 싸움을 벌이지 않고 웃어 댔다. 그런 그들을 보며, 린느는 실없이 헤헤 웃었다.

    “그대가 원하던 연회는 사실, 행복이었나.”

    “그럼요. 모름지기 사람은 웃고 마셔야 탈이 없다구요. 다른 연회장에서는 그렇게 피곤하게들 살라 해요. 드레스에다 샴페인 뿌리고, 없는 사람 험담하고, 눈치 주고 그렇게 지내라 해요. 제 연회장에선 이렇게 마음 편히 즐기면 되니까. 봐요. 우리 대공저 식구들도 웃고 있잖아요?”

    그녀의 사랑스러운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여, 그의 심장을 또다시 쿵 하며 울렸다.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며 대공저 사용인들을 바라보라 했으나, 밀러는 그녀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린느가 눈을 얕게 뜨며 주변을 샅샅이 돌아봤다.

    “그런데, 미리안 님은 어디 계셔요? 설마 2층에 혼자 계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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