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황태자를 향한 인사말이 연회장에 가득 차올랐다. 가슴이 웅장해질 만큼 무척이나 성의 있는 인사였으니. 하이레니아도 샴페인을 뒤집어쓴 채, 머리를 조아렸다.
‘괘씸한 것.’
황태자는 당장이라도 이 작자를 끌어내라 소리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전부터 쌓아 온 하이레니아의 업보가 이미 차고 넘친 것도 화가 나지만, 이토록 치밀한 짓을 제국의 번영이 아닌, 대공가의 몰락을 위해 꾸렸다는 데에 화가 치밀었다.
‘위선 떠는 꼴 하고는. 저러니 선대 후작이 하이레니아가 아닌, 어린 딸에게 작위를 물려주고자 했던 거겠지.’
웃는 낯으로도 상대 옆구리에 기다란 칼을 꽂을 위선적인 악인. 처음부터 악인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명예욕에 눈이 먼 하이레니아는 악인의 절차를 밟았다. 그런 그의 자존심을 밀러가 황궁 연회장에서 적나라하게 짓밟았으니, 가만히 두고만 볼 하이레니아가 아니었다.
‘지난번 그 술도 내게 올린 이유가, 대공의 몰락을 위함이었나.’
선대 대공과 밀러의 사이가 좋지 못한 걸 하이레니아가 모를 리가 없다. 지난 황궁 연회에서도 그렇다. 술이라면 빼지 않는 밀러가 갑작스레 자리를 비운 게 영 찜찜하다 했더니. 하이레니아가 올린 술이 다름 아닌, 선대 대공이 즐기던 술이 아니었던가. 이를 뒤늦게 알아챈 황태자는 내색하지 않고 하이레니아를 주시했다. 그러니, 한슨을 누가 데려왔는지는 굳이 심문하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밖에. 심문을 거친다 해도, 한슨의 입에서 하이레니아의 이름이 나오는 건 아주 쉬운 일일 것이다.
‘감히 내 손을 빌려, 대공가를 망치려 들다니 괘씸하기 짝이 없구나.’
화가 치밀었지만, 이 늙은 뱀을 처단하려면 인내해야 할 것이다. 힘들게 도달한 그 ‘때’이니, 놓쳐선 안 된다. 황태자는 하이레니아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후는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다.”
황태자의 짧고 굵은 명령에 머리를 조아리던 이들이 고개를 들고 수군거렸다. 작은 주전자에 눈을 꽉꽉 눌러 담듯이, 황태자의 목소리엔 화가 가득했으나 어조는 부드럽기까지 했다. 눈치 빠른 귀족들은 상황을 읽고서, 얼굴이 잿빛으로 물들었으나, 눈치 없는 자들은 샴페인을 뒤집어쓴 후작의 치욕을 덮고자 황태자가 그러한 명령을 내렸다고 확신했다.
황태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바깥에서 대기하던 황실 기사들이 뛰어 들어왔다.
“안전히 모셔라.”
기사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하이레니아를 단단히 붙들었다. 그들이 받은 명령에 안전히 모시라는 말은 있었어도, 부드럽게 모시라는 말은 없던 탓이다.
“왜, 왜 이러십니까! 내 발로 갈 테니……!”
황태자가 그의 낯짝을 빤히 노려보자, 하이레니아는 그만 입을 다물고 기사들에 의해 연회장 밖으로 쫓겨났다. 자리에 있던 귀족들은 봐도 못 본 척 시선을 피했다. 하이레니아가 그간 한 짓들을 모조리 알게 되었음에도, 황태자의 처신이 그다지 과하지 않은 탓이리라.
“대공.”
황태자는 하고 싶은 말을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서 밀러를 불렀다. 그제야, 린느를 바라보던 밀러의 시선이 황태자에게로 옮겨졌다.
“고생이 많았소.”
황태자의 잔잔한 위로가 주최자의 노고를 뜻하는 것처럼 들렸으나, 밀러는 그의 위로가 무엇을 향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황태자의 위로는 꽤 과거에 존재했던 일들까지 아우르고 있단 것도 알아차렸다.
“고생도 아닙니다, 이젠.”
밀러의 시선은 린느를 향했고, 린느는 배시시 웃으며 쭈뼛거렸다. 고작 하루 못 봤는데도 밀러의 얼굴이 핼쑥해 속이 좋지 못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섀르넌은 헛기침을 했고, 밀러는 식은 얼굴로 섀르넌을 바라봤다.
“벌써 귀국했나?”
“…지금 벌써라고 하셨습니까? 하루 만에 일을 산더미로 안겨 주신 것도 모자라, 친절히 출국까지 시키셔 놓곤, 벌써 귀국했냐 묻고 계신 겁니까?”
“멀쩡하군. 이렇게 쌩쌩할 줄 알았으면, 그대가 처리할 업무를 2년 정도로 계약할 걸 그랬어.”
얄미운 말을 내뱉은 것도 모자라, 비뚜름한 미소는 덤이었다. 황태자는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업무에 시달리는 건 가주들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공작 같은 인재는 타국으로 보내야지, 암.”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들이 아름답다는 둥, 다소 고리타분한 말도 얹으며 샴페인 잔을 들었다. 그때, 황태자가 섀르넌의 어깨를 두르며 말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우리 공작과 술잔을 나눠야겠군.”
“갑자기 말씀이십니까?”
“갑자기라니? 지난 황궁 연회에도 불참했으니, 오늘로 때우란 말씀이네.”
황태자가 거의 반강제로 섀르넌을 데리고 사라지자, 그 자리엔 밀러와 린느만이 남았다. 밀러는 말없이 린느의 애교머리를 넘겨 주더니, 흰 뺨을 쓸어내렸다.
“두려웠을 건데. 내가 못난 이유로 그대가 자꾸만 강해지는 듯해, 마음이 아파.”
그의 커다란 손은 뭐가 그렇게 두려운지, 그녀의 뺨에 닿을 듯 말 듯 깃털처럼 조심스러웠다. 닿으면 베일까 두려운 걸까? 참다못한 린느가 그와 손을 포개며, 뺨을 기대었다.
“저 없는 동안 대공저 잘 지키고 계셨네요?”
린느는 그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뻔뻔한 대답으로 분위기를 비틀었다. 이에, 밀러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백하듯이 읊조렸다.
“그럼. 그대의 것은 그 어떤 것도 뺏기지 않아.”
고작 지키기만 할까? 남이 쥔 걸 뺏어 와 그녀 앞에 바칠 수도 있건만. 밀러는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엘리자가 있었다.
제국의 후작을 차디찬 대리석 바닥에 앉히던 패기는 온데간데없이, 엘리자는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그 웃음은 린느와 퍽 닮아 있어, 신기할 따름이었다. 엘리자는 그 흐뭇한 미소를 유지한 채 부인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부인들이 한꺼번에 잔소리를 얹기 시작했다.
“귀국한 지 얼마나 됐다고 오금을 무릎으로 내려쳐서 사람을 꿇려요? 그것도 후작 나으리를?”
“우리만 봐서 다행이지, 다른 사람들이 그 꼴을 봤으면 아주 난리 났을 거예요.”
그래도 어차피 일이 그렇게 된 거, 샴페인까지 뿌린 건 아주 잘한 거라며 목소리 낮춰 칭찬했다. 고작 그걸로, 그들에게 당한 이들의 몫까지 위로해 줄 순 없겠지만 그게 어디냐며 소리 낮춰 웃었다. 속이 다 시원하다며 한바탕 웃던 그녀들이 웃음기를 지우고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가서 인사도 안 해요? 귀국해서 처음 만난 거 아니에요?”
린느와 왜 인사를 하지 않냐며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엘리자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눈치도 없어라. 저렇게 깨를 볶고 있는데 내가 나서면 되겠어요? 이따가 조용해지면 그때 인사하지 뭐.”
다 큰 딸이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유난을 떤다며 엘리자는 그녀들을 조소했다. 그런 다 큰 딸 때문에 열받아서 후작을 때려눕혔냐며 부인들은 뒤로 목을 젖혀 가며 엘리자를 놀렸다. 퍽 평화로운 웃음소리였다.
* * *
린느는 자신이 직접 꾸린 연회장을 돌아다니며 확인했다. 주문 제작한 분수는 샴페인을 잘 뿜고 있는지, 셰프에게 따로 부탁한 특별 메뉴 디저트는 모양이 잘 나왔는지, 손님들은 잘 웃고 있는지 등등. 아무리 살피고 또 살폈다만, 하루 대공저를 비운 게 영 마음에 걸렸는지 린느는 쉴 틈 없이 연회장을 누볐다. 다니는 길마다 귀족들은 웃음으로 린느를 반겼다. 하지만, 그들의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대공님, 대공님은 대공님 용무를 보세요. 왜 자꾸 쫓아다녀요? 대공님이 자꾸 절 쫓아다니니까 손님들이 겁먹고 도망을 가잖아요.”
“겁준 적도 없는데 지레 겁을 먹은 자들이 이상한 게 아닐까?”
“거울을 보고도 그런 말씀이 나오세요? 지금 대공님 표정 장난 아니에요.”
린느에게 인사 한번 건네려면, 서식에 따라 서류를 만들어 공식적인 절차에 의해 밀러에게 승인을 받아야만 할 것만 같은 살벌한 표정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능청을 떨었다.
“난 내 파트너 곁에 남아 있을 뿐이야. 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내 파트너에게 감히 접근한 저들의 잘못이지.”
“아이고 예예. 그 고집을 어떻게 꺾어요.”
밀러는 그녀의 타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곁을 지켰다. 린느의 잔소리가 심해질 땐 약 다섯 걸음 정도 떨어져 그녀를 살폈고, 린느가 한눈을 팔 때면 금세 곁에 붙어 자리를 지켰다. 그 누구도 그녀의 곁을 탐하지 않건만, 밀러는 꽤 진중한 얼굴로 주변을 경계했다.
“하아…….”
린느가 짙은 한숨을 내뱉자, 밀러의 걸음이 뚝 멈췄다. 잔소리가 쏟아질 것을 예상하고선 걸음을 멈추고 괜스레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으니. 퍽 영리한 남자가 아닌가. 린느는 그런 밀러를 빤히 올려다보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또 따라오면 각방이에요.”
“웃으면서 사형선고를 내리는군.”
실없는 대답이라며 못 들은 척하자, 밀러는 샴페인을 모조리 비운 후 말했다.
“설령 그렇다 해도, 그대의 곁은 포기 못 해. 차라리 다른 걸 포기하지.”
그는 장난과 진중함을 적당히 섞어 가며 답했다. 이에 린느는 하던 일도 멈추고서, 턱을 바닥에 톡 떨어트린 채 그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완전 집착 남주 대사잖아……?’
원래 그런 남자라는 건 익히 알고 있긴 했다만, 고작 하루 떨어져 있었다고 그의 투정은 실로 짓궂어졌다. 그의 집착 대상이 다른 이가 아니라, 자신을 향한다는 데에 린느는 묘한 감정이 일었으니. 그녀는 헛기침하며 말했다.
“제가 보기엔 집착병은 제가 아니라, 대공님이 걸리신 거 같은데요?”
“그대에게 옮았나 보지. 하긴, 옮고도 남지 않았을까? 가벼운 감기도 그 정도면 옮고도 남……!”
그의 능글맞은 입을 막아 나선 건, 린느의 손바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