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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98화 (97/122)
  • @98화

    “황태자 전하?”

    린느가 놀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자, 황태자는 이제 막 청년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현자와 같은 눈으로 되레 린느를 타일렀다.

    “놀랐다면 사과하네. 내 마음이 급해 손이 먼저 나갔소.”

    원래라면 진작에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어야 했으나, 황태자는 잘 마련된 식탁을 그저 지나칠 수가 없어 문지기를 자청했다. 물론, 연회장 밖에 늘어선 사용인들은 이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라 뚝딱거렸지만. 황태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벌써 몇십 분째 이 상황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때 린느가 연회장 문을 열어젖히려 했던 터라 황태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잡아챈 것이었다.

    한편, 린느는 황태자를 문밖에서 마주친 걸 안도했다. 그간 하이레니아가 한 행동들과 그의 수족들이 벌인 일들을 증거로 삼아 보고서를 작성하여, 증인들까지 붙여 황궁으로 보내는 과정을 이렇게나 간단하게 생략할 수 있게 되었으니 여간 운이 좋은 게 아니었다. 한마디로, 하이레니아는 덫에 물린 쥐나 다름이 없었다. 린느는 해맑게 웃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전 괜찮습니다.”

    황태자는 그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금세 웃음기를 지우고 연회장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난 황궁 연회장에서 하이레니아의 기세를 꺾어 두긴 했으나, 제국의 별을 들먹이며, 불손한 무리를 이끄는 하이레니아가 이번 대공저 연회를 조용히 넘어갈 리가 만무했다. 그의 음침한 성정이라면 누구보다 황태자가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 서둘러 연회장에 참여한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문지기처럼 문밖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긴 하다만.

    “전하, 춥지 않으세요?”

    “괜찮네. 내 눈엔 그대의 옷차림이 더 얇은 듯하여 걱정이군.”

    황태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린느의 어깨 위로 코트가 얹어졌다. 린느는 그 감촉에 깜짝 놀라며 서둘러 몸을 돌렸다. 자신의 어깨에 코트를 덮어 주는 건 늘 밀러의 몫이었기에.

    하지만, 연회장에 있을 밀러가 이곳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린느는 제게 코트를 얹어 준 남자를 빤히 보더니, 동공이 크게 팽창했다.

    “격조했군요, 세르트 영애.”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지 않았던 얼굴. 황태자는 그 남자를 향해 타박하듯 말했다.

    “언제 귀국했나? 공작저에 들르지도 않고 곧장 이리 왔나 보군.”

    “마음이 급해서요.”

    “하긴, 대공저 연회가 흔한 행사는 아니지. 아무튼 귀국하느라 고생했다.”

    황태자는 헛다리를 짚고서 허허 웃었다. 섀르넌은 황태자의 말엔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린느를 내려다봤다. 린느의 얼굴엔 초조함이 기저에 깔려 있긴 했으나, 꽤 밝아 보였다. 섀르넌은 그녀의 밝은 낯빛에 안도했다.

    “귀국이라뇨? 공작님 타국에 계셨었어요?”

    섀르넌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으나, 입을 꾹 다물고 입꼬리만 올렸다. 벌써 몇 달째 부재중이었건만, 린느는 여태 그의 부재조차 모르고 있으니 할 말이 없었다. 하긴, 밀러가 물밑으로 그렇게 일을 꾸몄는데, 린느가 자신의 부재를 알 리가 있겠는가. 잘 벼린 검처럼 일 처리에 철두철미한 밀러이니, 오늘 자신이 대공저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린느는 평생 섀르넌이란 이름조차 잊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무섭기만 한 줄 알았더니, 꽤 치사한 구석도 있으시네.”

    섀르넌은 밀러를 타박하듯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린느의 얼굴을 봤으니 여간 다행스러운 게 아니었다. 물론 밀러가 뒤늦게 저를 발견해 또 그럴듯한 핑계를 잡아 공작저로 돌려보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은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게다가 이토록 제게 무심할 만큼 그녀의 일상이 활기찼더라면 그건 그거대로 괜찮을 테지. 그렇게 섀르넌은 자신의 마음을 다독였으나, 어쩐지 씁쓸한 마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업무가 있어, 테트리사 제국에 나가 있었죠. 각하께서 말씀해 주지 않으셨나 봅니다.”

    여인이라면 관심은 고사하고 오히려 꺼리는 밀러였다. 그런 목석같은 남자가 세르트 영애 이야기만 나오면 감정적으로, 또 천치처럼 굴지 않았던가.

    그래, 반강제로 출국당하기 전날에도 그렇다. 대공저에 들러, 린느에게 산책 한번 권했다고 제국에서 가장 먼 테트리사 제국으로 출장 보낼 일은 또 뭐냔 말이다. 게다가 섀르넌은 린느와 산책도 하지 못하고 밀러와 입씨름만 했으며, 공작저로 돌아갈 때도 배웅은 알렉스가 해 줬단 말이다. 린느와는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는데, 그다음 날 귀신같이 출장 업무 관련 서한이 공작저로 날아왔다. 대공의 인장이 콱 찍힌 망할 출장 서한이.

    “그럼 이젠 출국하지 않으셔도 되는 거예요?”

    “그러면 좋겠군요.”

    또 모르지. 오늘 이 대공저 연회장에 참석하여 린느와 대화했다는 이유로 내일 태양이 뜨자마자 공작저로 또 다른 출장 서한이 날아올지도. 이번엔 어디로 보내려나? 그래도 테트리사 제국은 멀긴 해도 보고 배울 게 많은 제국이니, 썩 나쁜 출장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 낯선 땅에서 반가운 얼굴도 만났으니……. 하지만 린느와 얼굴을 마주하자, 섀르넌은 왠지 모르게 입이 쓰디썼다.

    “레이디께선요?”

    “저요?”

    린느가 청록색 눈동자를 크게 뜨며 도르르 굴렸다. 그의 말뜻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기 위함이었다. 섀르넌은 그녀의 눈동자를 사랑스럽단 듯이 바라보며 물었다.

    “레이디께선 제가 출국하지 않으면 좋겠냐는 뜻이었습니다.”

    린느는 눈매를 활처럼 휘며 답했다.

    “글쎄요. 너무 고생만 하지 않는다면, 여러 나라를 둘러보며 보고 배우는 것도 좋은 기회가 아닐까요?”

    “그렇죠. 하지만 전 타국에서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요. 보세요, 머리칼도 이렇게나 자랐네요.”

    장발에 가까운 머리칼은 그의 미모를 더 돋보이게 했다. 제국의 귀한 막내 황자처럼 곱디고운 미모에 길게 늘어트린 머리칼도 잘 어울렸다. 린느는 그의 머리칼을 바라보며, 잘생긴 남자는 뭘 해도 잘생겼다며 속으로 감탄했다.

    섀르넌은 그녀의 눈길에 기꺼워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빈말일지라도 못 본 사이에 보고 싶었다거나, 허전했다는 대답이 너무나 기다려졌다. 하지만, 돌아온 건 황태자의 타박뿐이었다.

    “쉿.”

    그는 섀르넌에게 조용히 하라 명령하고선, 다시 연회장 내부를 관전했다. 중앙을 둘러싼 채로 웅성거리던 귀족들이 각자 자리로 흩어졌다. 일단락되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그때부터가 진짜였으니. 제자리로 돌아온 귀족들의 입에서 그간, 황태자가 직접 보고 듣지 못한 온갖 말들이 튀어나온 탓이다.

    락센가에서 열린 연회장 이야기, 그곳에서 린느가 당한 치욕과 귀족들의 저열한 짓들. 본래의 의미가 퇴색한 연회 시즌과 그렇게 퇴색시킨 무능한 귀족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자연스레 흘러가 황궁 연회 이야기와 화원에서 하이레니아가 밀러에게 한 짓들까지 튀어나왔다.

    듣고만 있던 황태자는 그제야 뼈저리게 깨달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왜 귀족들의 미움을 사면서까지 시험 제도를 도입했는지 말이다. 제국엔 귀족이 너무나 많다. 멍청한 자가 권력을 쥐면 작게는 영지민이, 크게는 제국민의 삶이 고달파지기 마련. 그는 밀러 곁에 서 있는 하이레니아를 빤히 노려봤다.

    ‘귀족 간의 화합이 곧 제국의 평안이거늘. 저 아둔한 자가 모든 걸 망치려 드는구나.’

    페리하츠 대공가의 위세가 어찌 제국의 평안과 이어지느냐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페리하츠 대공가는 황족들에겐 국경선과 다를 바가 없으니. 대공가의 평안이 곧 제국의 평안이리라. 한번 국경이 뚫리면, 적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제국을 갉아먹는다. 그렇기에, 직계 황족뿐만 아니라 일선에서 물러난 황족부터 방계까지 합세하여 페리하츠 대공가에게만큼은 애정을 아끼지 않았다. 대공가는 황실 일원들의 최전선이요, 제국의 국경이리라. 대공가의 평안이 곧, 황족이 평안이며, 이는 제국민 전체의 평안이리라.

    하여, 황태자 역시 이유 없이 마냥 밀러를 아끼는 게 아니었다. 이러한 진실들을 너무나 잘 알기에, 또 역대 대공 중에서 손에 꼽을 만큼 수완이 좋기에 그를 아끼는 터였다.

    ‘부황께서 말씀하신 때가 지금인 건가.’

    제국에 후작의 수는 지나치게 많다. 그것도 무능한 후작들의 수가 너무 많다. 멍청하고 잔악한 자가 권력 위에 앉으니, 눈 뜨고 보고 살 수가 없다. 이를 황제가 모를 리가 없었기에, 어린 황태자에게 누누이 조언했었다.

    「그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때는 기다리지 않아도 오게 되어 있다. 태자, 네가 보기엔 그들의 생각이 먼저 바뀌겠느냐? 아니면 때가 닥치겠느냐?」

    나이 든 노공들은 황제를 섬기지 않고, 명예와 부 그리고 자신들을 따르는 귀족들의 이목을 섬겼다. 그리고 그 노공들의 단합은 제국의 번영을 위한 게 아닌, 자신들이 마음대로 휘젓지 못하는 대공가의 몰락을 위함이었으니.

    ‘결국 부황께서 말씀하신 그때를 내 눈으로 보게 되었구나.’

    황태자는 그들의 우매함이 안쓰러울 만큼 속이 답답했다. 한숨을 푹 내쉬는 동안, 밀러와 하이레니아 사이에서 벌벌 떠는 남자가 눈에 띄었으니. 황태자는 한슨을 보며 눈매에 힘을 줬다. 선대 대공과 지독하게도 닮은 유약한 한슨. 황태자는 한슨을 목격하고서, 결국 참지 못해 걸음을 내디뎠다.

    쿵.

    두꺼운 문이 거칠게 열어젖혀지자, 자리에서 굳어 있던 귀족들이 뒤늦게 머리를 숙였다. 황태자는 그런 그들을 가르며 걸음을 옮겼으나, 밀러의 시선은 그의 뒤로 따라붙은 린느에게만 향했다.

    “제국의 태양을 뵙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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