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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97화 (96/122)

@97화

엘리자의 대답은 댐을 무너트려, 연회장을 침수시켰다. 이 흥미진진한 싸움판을 지켜보던 귀족들이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른 탓에, 경악으로 가득 찬 연회장에 정적이 감돌았다.

사교계에서 샴페인 좀 마셔 본 귀족이라면, 엘리자의 성정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데. 세르트 경의 성격도 꽤 억센 편이긴 하나, 엘리자만큼은 절대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몇 달간 이어진 잠적 끝에 난데없이 대공저 연회장 한복판에서 얼굴을 드러냈으니 놀랄 수밖에.

물론, 부인들은 진작에 엘리자가 세르트 영애의 어머니인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외의 귀족들은 자리에서 굳을 만큼 놀랐으니. 그렇게 놀란 이들 중에는 밀러도 포함이었다.

어쩐지, 밀러가 나설 자리임에도 엘리자는 틈 없이 하이레니아를 맹렬히 몰아붙였다. 이에, 밀러는 그녀가 수상하다 여겼는데, 그녀는 마치 표적을 고른 암사자처럼 질기고 또 끈질겼다. 하여, 밀러는 그녀에게 잠시 하이레니아를 맡겨 두고 일을 지켜봤다. 워낙 여기저기 원한을 많이 산 하이레니아이니, 이 귀부인도 그에게 퍽 불만이 많았나 보다 여긴 터였다.

밀러가 틈을 내어주자, 엘리자는 기다렸단 듯이 하이레니아를 에워싸더니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맹렬히 공격했다. 그 결과, 엘리자는 기품있게 제국에 후작을 두 번이나 자리에 주저앉게 했으니. 그녀의 사냥은 성공적이었다.

‘미친 딸에 어미로군!’

하이레니아는 식은땀인지 샴페인인지 모를 것을 흘리며, 당혹감에 휩싸였다. 엘리자의 대답에 더는 말을 붙이지 못하고 입술을 뻐끔거리길 여러 번. 아무리 받아치려 해도, 엘리자의 콧대를 꺾어 줄 반박 따윈 떠오르지 않았다.

먼저 작위를 다 떠나서, 어찌 됐건 부모 앞에서 자식을 욕보인 셈이니 이러한 엘리자의 격한 반응은 일반적인 반응인 셈이었다. 하이레니아가 바보처럼 입을 뻐끔거리자, 엘리자는 멍청한 붕어를 단두대에 올리며 대미를 장식했다.

“후께서 말씀하신 대로 정말 제 딸이 집착병 환자이면, 우리 각하께선 집착병 환자를 가신으로 들이신 겁니까?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하셔야지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일을 밀러에게 맡겼다. 이에, 하이레니아는 더더욱 할 말을 잃고 밀러와 엘리자를 번갈아 봤다.

이 여자 한두 번 물 먹인 솜씨가 아니다. 연회장에서 이렇게 싸움을 한 것도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란 말이다. 그녀의 솜씨는 그저 샴페인으로 드레스나 적시고, 험담을 소문으로 부풀리는 정도에서 끝을 맺는 정도가 아니었다. 짧으면 몇 년, 길면 영원히 연회장 밖으로 내쫓는 데에 능숙한 사람이 분명하다. 하이레니아는 뒤늦게 후회막급하였으나 달리 방도가 없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밀러가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

“나나 세르트 영애나, 그대의 눈엔 둘 다 머리가 돈 것처럼 보였나? 아아, 이제 생각해 보니 그대의 걱정이 아주 근본이 없진 않았어. 지난 황궁 연회 때부터 내 뒤를 몰래 밟아 가며 정탐하길 즐기더니 말이야. 마치, 내가 아프기만을 바라는 사람처럼.”

밀러의 고압적인 태도에 하이레니아는 그만 꼬리를 내렸다. 함께 대화를 나눈 이들을 힐끔 바라봤으나, 그들은 하이레니아의 시선을 피하느라 급급했으니. 그는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괜한 변명을 늘어트려 봤자 도리어 밀러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각하, 오해이십니다. 지난번 각하께서 과음으로 힘겨워하시는 걸 목격한 탓에 제가 노파심이 일어, 쓸데없는 걱정을 했나이다. 절대, 절대로 소백작과 각하를 정탐하여 난감한 상황에 빠트리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자존심을 접어, 밀러의 발아래에 욱여넣었다.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니, 그는 서슴없이 최선을 택했다. 하지만 밀러는 하이레니아의 자존심을 발로 차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부인들이 서로 귓속말을 속삭였다.

“그러고 보니 저번 황궁 화원에서도 말이죠. 후께서 각하의 과음을 방관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아요. 그때 때마침 소백작 님께서 나서 주셨기에 일이 조용히 넘어갔었잖아요.”

“……정말 후께서 고의로 그러셨나 봅니다. 설마 했는데.”

하이레니아가 무슨 억하심정으로 밀러에게 그런 짓을 하겠냐는 말도 오갔으나, 그들의 의문이 해결되는 데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락센 경께서도 연회장에 불참하신 걸 보아하니……. 뭔가 우리가 모르는 일이 있긴 한가 봅니다.”

“일이야 많고도 많았죠. 락센 경께선 이미 대공 각하의 눈 밖에 난 지 오래잖아요? 지난번 연회장에선 단체로 소백작 님께 그리 실례를 범했으니 말입니다.”

“예에? 또 무슨 실수를 말입니까?”

“모르셨어요? 락센 경께서 친우들과 함께 소백작 님을 욕보이셨잖아요. 대공가의 가신이 여인이네 뭐네 하면서……. 아무튼, 그 사건으로 황궁 연회장까지 발칵 뒤집혔었어요. 노하신 각하께서 하이레니아 후께 그 일을 따지셨거든요. 락센 경이 하이레니아 후의 가신이니, 가주로서 따지신 게죠.”

“그럼, 황궁 연회장에서 황태자 전하께서 불같이 화를 내셨단 그 사건이, 그 사건 때문인 겁니까?”

“뭐 그것도 있고……. 황태자 전하의 심기를 거스른 것도 있고. 아무튼 그랬답니다.”

락센의 연회장에 참석했던 귀족들이 나서서 말문을 열었다. 한번 트인 말꼬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으니. 지켜보던 귀족들도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꺼내와 서로의 귀에 속삭이기 바빴다.

“한데, 우연인지 뭔지……. 락센 경께서도 그분의 친우들께서도 모조리 소식조차 감감한 듯합니다. 정말 황태자 전하께서 손을 쓰셨는지….”

“전하께서 각하와 막역한 사이이니 아주 못 나올 말도 아닙니다.”

린느에게 헛소리를 지껄인 귀족들은 이미 진작에 밀러가 락센의 손을 빌려 치웠으나, 다른 귀족들이 이를 알 리가 없었다. 오로지 락센만이 진실을 알겠지만, 그는 겁에 질려 연회장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으니. 모든 화살이 하이레니아를 향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점차 커졌으나, 밀러는 말없이 이 상황을 비롯해 모든 걸 방치했다. 굳이 그가 나서지 않아도, 귀족들의 이목이 하이레니아를 시들게 하고 바싹 태울 테니 말이다.

밀러는 말없이 제 눈앞에서 시들어 가는 하이레니아와 오들오들 떨며 눈치를 보는 한슨을 번갈아 봤다. 총기 어린 금빛 눈동자가 하이레니아와 맞닿자, 하이레니아는 내심 기대하듯 밀러의 안색을 살폈다. 뒤늦게나마 밀러가 한슨을 통해 선대 대공을 떠올려, 자리에서 주저앉길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기적 따윈 일어나지 않았다.

밀러는 그 무심한 눈으로 한슨을 빤히 내려다보며 실소를 뱉었다.

“정말 많이 닮긴 했군.”

하이레니아의 눈꺼풀이 크게 뜨이더니, 밀러의 표정을 낱낱이 뜯어 살폈다. 제발, 제발 무너져라. 제발, 이 많은 이목이 쓰러진 대공에게로 향하길. 하이레니아는 믿지도 않는 여신께 간절히 기도했으나, 여신은 그의 저열한 바람을 무시했다.

“한슨이라 했던가?”

“예? 예예! 각하…!”

밀러는 상황을 정리하고 뒤늦게 돌아온 알렉스에게 한슨을 맡겼다. 일부러 하이레니아 눈앞에서 한슨을 데려가라 명했고, 이번엔 밀러가 하이레니아의 눈을 꿰뚫듯이 뜯어 살폈다.

“돈으로 매수당한 자가 두 번 매수당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지. 부디, 그대가 나보다 가진 게 많길 바랄 뿐이야.”

밀러는 그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이더니, 그를 스쳐 지나쳤다. 그리고 그런 밀러의 낯에는 불안은커녕 티끌만치의 걱정도 어려 있지 않았다.

쿵.

거의 닫혀 있던 로비 문이 거칠게 열어젖혀지더니, 찬바람이 단박에 연회장 안으로 들이닥쳤다. 웅성거리던 귀족들은 연회장에 막 들어선 이들을 보며 턱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하지만 밀러의 눈엔 한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 * *

드르륵 달칵.

“대공저에 도착했구먼요!”

마부가 생글생글 웃으며 친절히 문을 열었다. 원래라면 한창 시끄러워야 할 연회장은 풀벌레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했으니. 린느는 덜컥 불안해졌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연회장과의 거리는 가까워졌으나, 여전히 고요했다.

‘밀러.’

살짝 닫힌 문틈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기웃거렸으나, 귀족들은 연회장 중앙을 둘러싼 채로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느라 한창이었다.

‘밀러는 어디 있지?’

린느가 까치발을 들고 밀러를 찾는 사이, 그의 고고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나 세르트 영애나, 그대의 눈엔 둘 다 머리가 돈 것처럼 보였나? 아아, 이제 생각해 보니 그대의 걱정이 아주 근본이 없진 않았어. 지난 황궁 연회 때부터 내 뒤를 몰래 밟아 가며 정탐하길 즐기더니 말이야. 마치, 내가 아프기만을 바라는 사람처럼.”

밀러의 오만한 목소리가 연회장을 날카롭게 울리자, 린느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의 불안증세가 염려되어,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렇게 많은 귀족 앞에서 쓰러진다면, 어떻게 일을 수습할지가 막막했으니. 린느는 다급히 연회장으로 뛰어들고자 걸음을 내디뎠다.

텁.

그때, 커다란 손이 그녀의 팔뚝을 턱 잡더니 곧장 부드럽게 놔줬다.

“힛!”

“쉿.”

한 남자가 검지로 입술을 가리며 린느를 다독였다. 그가 입은 옷에는 제국의 문양이 금실로 새겨져 있었으니. 틀림없는 황실의 예복이었다.

“그간 잘 지냈는가? 나의 패기로운 친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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