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릿느릿한 악단의 음악만이 울렸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허리를 굽힌 한슨의 시야엔 밀러의 검은색 구두와 귀족들의 신발만 보여 고독감에 휩싸였다. 이 자리에 자신의 편이라곤 티끌도 없는 기분. 그게 한슨의 목을 조였다.
하지만, 밀러 역시 한슨과 다를 게 없었다. 조금 다르다면, 밀러를 향해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대공저 사용인들이 있다는 것뿐. 밀러는 얼핏 스친 한슨의 얼굴에서 다신 떠올리기 싫은 자의 낯을 목격해 속이 끓었다. 오래된 화, 울분이 아닌 형언하기 힘든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름.”
그의 대답에 한슨은 금세 입꼬리를 올리며, 이 자리에서 죽진 않겠다 안심했다. 그는 낯선 자신의 이름을 기계처럼 읊었다.
“하, 한슨 드 파, 팔리언입니다.”
밀러는 샴페인 목을 쥔 채로, 한슨을 빤히 내려다봤다. 굳은 얼굴로 그를 응시하더니, 나직이 다그쳤다.
“팔리언, 팔리언이라.”
그는 허공을 응시하며 한슨의 성을 읊조렸다. 이에, 귀족들의 시선도 자연히 밀러에게로 옮겨졌다. 그리고 또다시 침묵.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밀러의 눈동자가 어디를 향하고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귀족들은 빠짐없이 두 사람을 관전했다.
“이상하군. 처음 듣는 가문인 거 같은데.”
그의 대답에 고개를 숙인 한슨이 파르르 떨었다. 정작 밀러의 시선은 하이레니아를 향했으나, 고개 숙인 한슨이 이를 알아챌 리가 없었다.
남 일처럼 멀찍이서 관전하던 하이레니아가 밀러와 시선을 맞추고서 경기를 일으켰다. 귀신처럼 제게 붙은 금안은 이토록 심장을 가지고 논다. 하이레니아는 샴페인 잔을 기울며, 표정을 감추고자 했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밀러는 시선을 채 떼지도 않고 하이레니아를 보며 말했다.
“한슨 드 팔리언. 그대의 이름을 기억하지.”
“……여, 영광입니다, 각하!!”
한슨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연회장을 울렸다. 여태 두 사람을 두고 관람하던 귀족들은 낯을 달리하고 손뼉을 쳐 대며 하하 웃었다. 그들의 속이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비쳐, 밀러는 속이 울렁거릴 참이었다. 그런데도 밀러는 동요하는 기색조차 없이 하이레니아를 빤히 응시했다. 한슨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말뜻은 곧, 하이레니아의 수작질을 기억하겠다는 뜻과 같았으니. 하이레니아는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자신은 그런 수작질을 부리지 않았다는 듯이, 퍽 훌륭한 연기였다.
그런데도 밀러의 시선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하이레니아는 탄식을 뱉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제국의 큰 보배를 뵙나이다. 제가 노안이 왔나 봅니다. 각하를 그렇게 찾아 나섰는데 이제야 인사를 드리다니. 제 결례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열기를 품은 눈동자가 빤히 밀러를 향했다. 그렇게 째려봐야 무엇하겠느냐 조소하듯, 하이레니아의 눈웃음은 밀러의 속을 긁기 위해 유연하게도 휘었다. 밀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코웃음을 쳤다. 하이레니아는 그런 밀러를 빤히 응시하며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리며 말했다.
“제 농이 마음에 드셨……!”
있는 여유 없는 여유 긁어모아 겨우 대화하고 있건만! 순간, 하이레니아의 오금이 퍽 접히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에, 그가 들고 있던 샴페인은 정장을 적셨다.
“어머머, 죄송해요! 그러게 왜 걸리적거리게…… 맙소사 각하! 감사 인사를 드리고자 대공저 마구간까지 뒤졌지 뭡니까! 내 정신 좀 봐. 큼흠, 제국의 또 다른 태양이자, 우뚝 솟은 북극성을 뵙나이다.”
백금발 머리칼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의 귀부인이 온갖 우아한 몸짓을 곁들여 밀러에게 인사를 했다. 밀러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상황을 관전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그때, 넘어져 있던 하이레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귀부인의 구두 굽이 그의 소맷귀를 콱 밟았다.
“어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던 하이레니아가 다시 휘청거리며 넘어졌고, 그 충격으로 귀부인의 몸도 크게 휘청거렸다.
텁.
밀러가 그녀의 손을 잡아 준 덕분에 귀부인은 넘어지지 않고 호호 웃었다. 그것도 잠시, 혼란을 틈타 이 맹랑한 귀부인은 손에 들린 샴페인을 하이레니아의 머리에 촤륵 흘렸다. 귀부인의 행태를 코앞에서 목격한 밀러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자, 귀부인은 해맑게 미소만 지었다.
“어머머, 정말 이를 어쩐담. 여기 냅킨 좀 가져다주실래요?”
하이레니아는 10초도 안 되는 사이에 밀러를 향해 무릎을 두 번 꿇고, 샴페인으로 샤워를 했다. 그것도 이 장난기 가득한 귀부인에게 말이다. 이를 낱낱이 목격했음에도 밀러는 곁에 있던 사용인에게 말했다.
“냅킨.”
고작 그 말 한마디만 뱉을 뿐, 다른 명령은 없었다. 발 빠른 사용인이 커다란 냅킨을 가져와 밀러에게 건네자, 귀부인이 냅킨을 손에 감싸, 하이레니아에게 손을 뻗었다. 축축한 샴페인이 자신의 손에 묻을까 염려한 탓이다. 그때, 사납게 뜨인 하이레니아의 시선이 귀부인을 잡아먹을 듯이 향했다. 그는 귀부인의 손을 거칠게 쳐내더니,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아까부터 계속 파리 새끼처럼 들러붙는군. 내 모를 줄 아나?”
하이레니아는 냅킨으로 샴페인을 닦아 내며 사납게 윽박질렀다. 목소리를 그리 높이지도 않았건대, 그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짙게 울렸다. 이를 지켜보던 밀러가 나서려 했으나, 귀부인이 먼저 입을 뗐다.
“설마 제게 하시는 말씀은 아니시죠?”
그녀의 뻔뻔함에 하이레니아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으스대는 꼴에 차가운 샴페인이 뿌려져서인지, 하이레니아의 기세가 퍽 위축되어 한층 보기 편해졌으나 귀부인은 물러날 기세도 없이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눈매를 반달 모양으로 접어 웃었다.
“말씀이 나와서 말입니다. 없는 사람 험담을 먼저 나누신 건, 후가 아니십니까? 솔직히 그게 조금 고깝긴 했습니다만… 설마 그렇다 하여 제가 일부러 후께 결례를 끼칠 리가 없지요. 저 같은 일개 백작 부인이 무슨 힘이 있어, 후를 바닥에 꿇어앉히겠습니까?”
“웃기고 있군. 험담이라니! 사람 속을 뒤집어도 유분수이지, 그딴 말도 안 되는 모함을 누구 앞이라고 지껄이나!”
그의 목소리가 연회장을 징 하며 울리자, 한쪽에 앉아서 수다 떨던 부인들이 수다를 뚝 멈췄다. 그리곤, 왜 자리에 있어야 할 엘리자가 보이지 않냐며 서로 그녀의 행방을 물었고. 그녀들이 찾는 엘리자가 하이레니아와 결국 맞붙어 입씨름하는 걸 목격하고서 혀를 내둘렀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언제 저기까지 갔는지도 모르겠네.”
아까부터 하이레니아에게 총알처럼 덤비려 앉았다 일어나길 반복한 엘리자였다. 불처럼 화끈한 그녀가 마냥 참기에는 하이레니아의 언사는 심히 지나쳤으니. 그녀들도 엘리자의 마음을 퍽 이해했다.
밀러가 연회장을 비운 사이에, 하이레니아가 걱정이란 명목하에 밀러와 린느를 욕보이는 걸 앉은 자리에서 모두 들었으니, 화가 치밀 수밖에.
“오래 참은 거야. 엘리자치고는.”
“그런데…… 말리지 않아도 될까요? 귀국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일을 친답니까?”
“그럼, 자네 같으면 그 욕을 다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부인들은 잠시 정적을 지켰고, 한 명 두 명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싸움은 최대한 피하되, 한번 일어난 싸움은 이길 때까지 곁에 있어 준다. 그게 그녀들의 우정이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상황을 살피던 부인들이 질겁하며 고개를 내둘렀다. 설마, 후작을 샴페인에 폭삭 절여 놨을 줄이야! 머리끝까지 화가 난 하이레니아는 샴페인을 뒤집어쓴 머리 위로 김을 뿜을 기세였다.
“각하,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감히, 이런 짓이 일어나서야 되겠느냔 말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끌어내 던져라 명하고 싶었으나, 보는 눈이 많고 거기에 밀러까지 자리에 있어 쉽지 않았다. 하이레니아는 답지 않게 억울함을 토하며 자신의 편을 들어달라 애원했다. 하지만, 밀러는 무심한 얼굴로 그를 빤히 내려보며 새로운 냅킨을 건넸다. 하이레니아는 그가 건넨 냅킨이 곧, 호의라 생각하고서 엘리자를 조소했다. 그때였다.
“그래서, 후가 한 것이 누구의 험담이었기에 부인의 심기를 그토록 거슬렀을까?”
밀러의 물음에 엘리자가 신난 표정을 뒤로하고 울상까지 지어 가며 말했다.
“각하께서 몸이 편찮으시다는 이상한 소리를 시작으로 세르트 영애를 욕보였습니다. 한데, 제가 어찌 참을까요.”
엘리자는 부채 뒤로 숨긴 입매를 끌어 올려 웃었으나, 눈꼬리를 천연덕스레 아래로 떨어트렸다. 엘리자의 친우들은 그녀의 연기에 감탄했고, 다른 귀족들은 그녀의 정체가 궁금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는 하이레니아 역시 궁금했으니, 그는 그만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각하의 건강을 걱정하는 게 어째서 험담인지 모르겠군. 게다가, 내가 언제 세르트 영애를 욕보였다는 건가? 아, 세르트 영애의 집착병을 입에 올렸다는 이유로 내가 험담을 했다고 여기는 겐가? 웃기고 있군. 도대체 언제부터 진실을 말한 게 험담을 한 게 됐나? 일개 부인 주제에 분수를 알라! 뭐, 세르트 영애의 늙은 시녀 주제에. 아니, 유모인가? 쯧.”
하이레니아의 원색적인 비난이 그녀를 향해 무참히 쏟아졌다. 잠시 연회장에 정적이 일었으나, 그 정적은 금세 깨졌다.
촤르륵 탁.
엘리자가 부채를 요란스럽게 접어 탁 잡더니, 하이레니아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시녀? …유모? 고작 그뿐이겠습니까? 내가 그 집착병 환자의 어미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