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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95화 (94/122)

@95화

“맹목적인 호의가 아니라, 이용이겠지.”

밀러는 곁에 있는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나른하게 웃었다. 맹목적인 호의라, 고작 몇 글자로 이렇게 웃길 수 있다니. 밀러는 시가를 진득하게 빨며, 웃음을 뱉었다.

“그대도 알잖아. 그대는 내 어머니와 지독하게 닮았다는 것을. 그래서 토트린 백작저에서 그대를 데리고 나온 거야. 내 어머니를 향한 내 죄책감을 지우기 위해서. 이미 알고 있던 거 아니었어?”

이게 도대체 어딜 봐서 순수하고 맹목적인 호의라 할 수 있을까. 밀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일부러 비웃고 비난하고자 한 게 아닌, 진심이었다.

“그대가 토트린 백작에게서 자유를 얻는다면, 내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던 지난날이 잊힐 거라 여겼거든. 참으로 멍청하고 아둔했지. 그래도, 서로 좋은 일이니 그대의 아비를 진심으로 잡아다 죽이려 했었다. 그대가 이렇게 속이 검은 사람인지도 모르고.”

금빛 눈동자가 이채를 띠며 미리안을 벨 것처럼 굴었다. 기세 좋게 대꾸하던 미리안은 할 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토트린이 알아서 하이레니아와 락센까지 내 앞으로 끌고 와 목을 대고 있는데 내가 치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나? 이렇게 보니, 어지간히도 내가 그대를 이용만 했군. 그대가 서운할 만도 해.”

밀러는 잔악하게 조소를 뱉으며 그녀의 낯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자, 미리안의 표정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그 말씀, 린느 님께도 하실 수 있죠? 그게 사실이라면, 꺼릴 게 없잖아요?”

“꺼릴 건 내가 아니라 네가 있겠지, 미리안. 그대와 결탁한 프레이가 스테빈스 백작의 손녀라는 건 알고 있었나?”

미리안은 당황한 듯 미간을 좁혔다. 스테빈스 백작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 노공이 린느에게 혼담을 청한 것도 모르겠군.”

“프, 프레이 님의 조부께서 리, 린느 님께 혼담을…… 왜…?”

“그 일로 린느는 결혼을 포기했으며, 한동안 낙담해 기운 차리는 데에도 꽤 오래 걸렸어.”

얼굴이 희게 질려서 대공저까지 들어와 자신의 치부까지 내려놓고 도움을 청하던 린느였다. 그렇게 만든 작자와 손을 잡은 것도 모자라, 린느가 꾸민 연회장을 망치려 했으니 밀러는 인내심의 고갈을 체감했다.

“한데 그대는 은혜를 갚기는커녕, 린느에게 아픔을 더 얹어 줬군. 대단한 우정이야. 아주 대단해.”

미리안은 앉은 자리에서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간간이 고개를 내저으며 아니라 부정했으나, 그녀의 표정은 이미 자신의 죄를 자백하듯 투명했다. 울 듯이 웃고, 웃듯이 울기를 반복했다. 그런 그녀를 사납게 쏘아보며 밀러는 이어 말했다.

“아직 티끌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더는 린느가 일군 걸 망치려 들지 마. 다음은 지금처럼 경고하지 않을 테니까.”

위협적인 그의 명령엔 한치의 과장도 없었다. 그의 성격이라면 미리안을 당장 토트린 옆자리에 가둬 놓고도 남을 테니까. 하지만, 그 꼴을 린느가 목격하면 또 속앓이하겠지. 밀러는 속에서 끓는 화를 참으며, 방 밖으로 향했다.

덜컥.

문이 열리자, 기다렸단 듯이 안나가 서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으나, 안나는 상황을 읽고 알아서 미리안에게 다가갔다. 늘 온화하고 자애롭던 그녀는 미소 한 점 없이 냉랭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 * *

그 넓은 연회장엔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인파로 가득 찼다. 로비가 닳을 만큼 드나드는 이들이 가득했으며, 한번 연회장에 들어온 귀족들은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성대하고 화려한 연회장. 린느가 원하던 연회장과 조금은 닮아 있었으나 이곳에 하이레니아가 끼어 있는 한, 그녀가 그린 연회장의 모습은 무리였다.

“이렇게 안목이 좋으신 분이라면, 앞으로 대공저에서 자주 연회가 열리지 않겠습니까?”

“소백작을 두고 하는 말인가?”

“예! 이 연회장 전체가 소백작 님의 작품이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러기야 하지만…….”

귀족 하나가 찝찝하게 말끝을 흐리자, 린느의 칭찬을 입에 담던 귀족이 말을 멈췄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가 싶어 말을 아끼는 모양새였다. 그는 샴페인을 마시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글쎄, 소백작이 세르트 백작가의 그 똑똑한 차녀가 아니라 장녀라지 뭔가.”

“에……? 자, 장녀요? 장녀요!?”

그의 뱀 같은 눈동자가 주변을 스윽 훑어보더니, 조용히 읊조렸다.

“그래. 그 대공저를 들쑤셨다는 집착병 환자 말일세.”

갑작스러운 날벼락에 주변 귀족들이 넋을 뺐다. 린느의 칭찬을 늘어놓던 귀족이 입을 꾹 다물고 당혹감에 휩싸인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며, 괜스레 샴페인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여, 우리 대공 각하께서만 안타까운 게지. 안 그렇나? 전도가 양양하신 우리 각하께서 뭐가 아쉬워서 그런 여인과……. 흠.”

바람잡이가 끝나자 지켜보던 하이레니아가 은근슬쩍 말을 얹었다.

“뭐, 그래도 대단한 장점이 있으니 각하께서 소백작을 귀히 여기시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게 믿어야지.”

그들 가운데에 낀 귀족들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그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줬다. 끼고 싶지 않은 대화였으나,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주제이기에 빠지기도 애매했다. 게다가, 그들 사이에서 자리를 비웠다간, 자신이 없는 그 틈에 누구의 험담이 오갈지 또 누가 알겠는가. 그러한 이유들로 귀족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자리를 보전했다. 그때, 하이레니아가 닭 모이를 흩뿌리듯이 말을 던졌다.

“난 다른 건 욕심 내지도 않아. 그저 우리 각하께서 건강만 하셨으면 좋겠단 말일세. 사내들이야 여인들에게 데며 성장하기 마련이니, 그건 걱정할 바가 아니란 말씀이지.”

“맞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걱정을 사서 해도, 결국 직접 데어 본 후에야 깨닫는다죠! 아하하! 흠, 그나저나…… 각하께서 어디 편찮으시단 말씀입니까?”

고개만 주억거리던 귀족들이 이맛살을 접어 가며 놀랐다. 그들은 탁구 시합을 관전하는 관객처럼 고개를 빠르게 휙휙 움직였다. 개중에는 말없이 관전하는 자들도 있었으며, 순진하게 놀라서 되묻는 이들도 있었다.

“가, 각하께서 어디 편찮으십니까? 건강이라니요?”

“이번 연회에 소백작이 힘쓴 이유도 다 거기에 있지. 됐네, 기분 좋은 날에 기분 좋은 말만 해야지 괜한 걱정을 꺼냈군.”

적당히 말을 끊어, 그들의 갈증을 부추겼다. 소문이란 선명하지 못하고 뭉툭해야 더 멀리 굴러가는 법. 하이레니아는 저들의 입을 탄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해지길 바라며 그만 입을 다물었다.

‘나머지는 한슨에게 맡기면 그만이니, 적당히 여기서 자리를 빼야겠군.’

하이레니아의 눈은 뱀처럼 감는 법이 없다. 젊었을 땐 옅게나마 총기가 보였을지도 모를 그의 눈동자가 세월을 변명 삼아, 탐욕과 화만 품은 채 밀러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머지않아 밀러가 연회장에 나타났고, 그는 아이처럼 설렜다. 마음 같아서는 한슨을 밀러의 코앞에 두고 싶었으나, 그렇게 노골적으로 행동했다가는 덜미를 잡힐 테니 꾹 참았다. 대신에, 그는 한슨을 빤히 바라보며 밀러를 향해 눈짓했다.

“…….”

한슨의 눈동자가 마구 떨렸다. 빌어먹는 인생에 마침표를 찍고 싶어 하이레니아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나, 잘못하다가는 그냥 인생이 통째로 마침표 찍힐 위기가 아닌가. 그는 발이 떨어지지 않아 울 것처럼 하이레니아를 바라봤다. 그러자 하이레니아는 차게 식은 눈으로 냉랭히 협박했다. 비록 오가는 말은 없었으나, 이 자리에서 도망치는 순간 자신의 집과 가족부터 건들 테지. 그는 바닥에 발을 끌며 천천히 밀러에게로 향했다.

“제국에 또 다른 태양을 뵙나이다. 각하께 초대를 받아 이 얼마나 가문의 영광인지 모르겠습니다. 언제든지 불러만 주신다면, 이 한 몸 고삐를 물고라도 연회에 참석하겠습니다.”

“고맙군. 편히 즐기다 가게.”

그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밀러를 둘러싼 귀족들과 밀러의 목소리가 점차 크게 들렸다. 한슨은 무슨 연유로 하이레니아가 그렇게 큰돈으로 자신을 매수하고, 이 으리으리한 대공저 연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투자했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더 겁이 올랐다. 어느덧 그의 걸음이 밀러를 둘러싼 귀족들에게까지 닿았다. 그러자, 하하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귀족들의 안색이 바짝 굳었다. 그들은 겁에 질려 한슨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눈 깜빡할 사이에 한슨과 밀러만이 남았고, 그들 주위를 뱅 두른 귀족들만이 존재했다.

“…….”

제국의 대공은 보기 드문 금안이랬다. 그리고, 제 앞에 꼿꼿하게 서 있는 그 역시 금안이었다. 목덜미를 잡아챌 것처럼 날렵한 금안이 저를 꿰뚫듯 응시하자, 한슨은 온몸이 저려서 그와 시선을 맞추기가 버거웠다. 하여, 한슨은 목숨을 구걸하듯, 최선을 다해 몸을 굽혀 자신의 위치를 피력했다.

“가, 각하를 뵙나이다. 제국의 위대하신 북풍이시여.”

밀러는 한슨의 얼굴을 보자마자, 미리안의 조소가 환청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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