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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94화 (93/122)
  • @94화

    귀족들은 당황에 찬 얼굴로 그 남자를 빤히 응시했다. 지금이라도 달려가 인사를 해야 할까? 아니, 선대 대공은 죽었는데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남자 주위로 시작된 혼란이 점차 범위를 넓혀 갔다. 귀족들은 서로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이게 무슨 상황이냐며 서로 옆구리를 찔러 댔으니. 자네가 먼저 다가가 봐라, 그쪽이 먼저 인사해 봐라 서로를 부추기며 절대 먼저 나서진 않았다. 꽤 오랫동안 실랑이를 벌이던 와중, 젊은 귀족이패기롭게 그에게 인사했다.

    “초면이지요? 어디 영지에서 오셨습니까?”

    “아, 안녕하시오? 한슨 드 팔리언이라 하오.”

    “아아……. 팔리언.”

    한슨에게 먼저 말을 걸었던 귀족을 포함하여 주위에 늘어선 귀족들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 성이라며 특이하다는 말이 오갔고, 그 이후로는 금세 조용해졌다. 얼마 안 가, 안도에 찬 탄식이 곳곳에서 터졌다.

    그럼 그렇지! 죽은 선대 대공이 살아서 돌아올 리가 없지. 역시나 한슨은 당연하게도 선대 대공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의 눈마저 속일 만큼 한슨은 선대 대공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으니. 촉이 좋은 귀족들은 오늘 밤 조용히 넘어가기엔 틀렸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시치미를 떼던 하이레니아가 남몰래 한슨에게 눈짓했고, 한슨은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눈동자를 떨었다. 하이레니아가 제안한 대로, 조용히 참석만 했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며 한슨은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감췄다. 하이레니아는 그런 그를 보며 한심하단 듯이 쯧, 혀를 찼다.

    ‘아무리 때를 벗기고 껍데기를 입혀 놔도 귀족 태는 만들 수가 없군. 그게 흉내를 낸다고 되는 것도 아니지만.’

    하이레니아는 겁에 질린 한슨이 무슨 짓을 할까 초조하게 그를 바라봤다. 아닌 척 여유로운 척 허세를 부렸으나, 그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만큼이나 이번 일은 위험부담이 컸다.

    ‘이대로 밀러와 한슨이 마주치기만 하면 돼. 그럼 그 오만한 자식도 그만 무릎을 꿇겠지.’

    황궁 연회장에서 꿇지 않고 버텼던 무릎이 오늘이면 바닥에 닿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하이레니아는 한슨에게서 시선을 뗐다.

    ‘토트린 영애도 선대 대공비와 닮았기에 곁에 뒀다 했으니, 틀림없이 저놈을 그냥 보고 지나치진 않을 게야.’

    하이레니아는 부모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못난 놈이라며 밀러를 조소했다. 더불어, 어서 그 오만한 얼굴이 시체처럼 차가워지길 바라며 시간을 보냈다.

    “후작 나으리, 이것도 좀 들어 보십시오. 보기 힘든 와인이랍니다.”

    원래라면 락센이 차지했을 자리에, 락센이 없자 쥐새끼들처럼 몰려와 자리싸움을 벌였다. 하이레니아가 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동안, 한슨은 허수아비처럼 한자리에 서서 동그란 눈으로 주변을 살필 뿐이었으니. 이를 지켜보던 부인들 역시, 시선을 떼지 않고 한슨을 바라봤다.

    “팔리언 가문이라고 들어는 보셨어요? 전 처음 듣는 듯해서요.”

    “그러게요. 저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가문이에요. 게다가, 너무…… 닮지 않았어요?”

    그녀들은 서로 귓속말을 속삭이더니, 선대 대공과 닮았다는 말은 그만하자며 말을 돌렸다. 그래 봐야, 한슨이 입은 옷부터 신발, 억양에 관한 이야기였으니, 사실상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였다. 그만큼이나 한슨은 선대 대공과 닮아 있었다.

    “오늘 연회장 한번 발칵 뒤집히겠어요. 대공 각하께서 선대 대공님과 사이도 딱히 좋지 않으셨는데 말이죠.”

    부인들은 한슨을 동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 사람만은 한슨이 아닌 다른 사람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으니. 하이레니아와 입씨름을 한 귀부인이었다. 모든 귀족이 한슨을 바라볼 때, 그 귀부인은 미리안을 빤히 응시했다.

    ‘시녀 맞아? 옷차림이 절대 시녀가 아닌데? 정부면 몰라도.’

    도대체 어떤 시녀가 저리 화려하게 치장하고 연회장을 누빌까? 귀부인은 미리안을 보며 속이 불편해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내내 보이지 않던 밀러가 미리안에게 다가가 무어라 말하더니, 두 사람이 함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를 목격한 귀부인은 눈동자를 파르르 떨며 뜨거운 콧김을 뿜었다.

    당장이라도 두 사람 뒤를 밟아,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샅샅이 알아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곁에 있던 샴페인 잔을 무섭게 비웠다. 이에,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부인들이 웃음기를 뚝 그치고 귀부인을 걱정스레 바라봤다.

    “엘리자…? 괜찮아?”

    부름에 답이 없자, 부인들은 슬금슬금 귀부인을 피했다. 괜히 건드렸다가 불똥이 튄다며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 * *

    복도 끝에서 코너를 두 번이나 돌고 나서야, 밀러의 걸음이 멈췄다. 로비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도 옅고, 근처에 인적도 느껴지지 않자 그제야 밀러가 미리안을 향해 몸을 틀었다.

    덜컥.

    그는 무심한 얼굴로 방문을 열더니, 미리안을 빤히 내려다봤다. 얌전히 들어오라는 무언의 명령이었으나, 미리안은 싹 굳은 얼굴로 냉랭히 그를 올려다봤다.

    “급하긴 급하신가 봐요. 각하께서 저를 이렇게 찾으시고.”

    손톱을 세워 그의 신경을 긁었으나, 그는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로 동요는커녕 대꾸도 없이 문을 닫았다.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넘나들었다. 린느의 손이 닿은 연회장은 저토록 밝고 빛이 나는데, 그녀의 손에서 벗어난 곳은 여전히 어두컴컴하고 침울했다. 특히나, 두 사람만 남은 자리는 더더욱 스산했다. 밀러는 품에서 시가 케이스를 꺼냈다. 도대체 얼마 만에 태우는 시가인지.

    시가 끝을 자르고 불을 붙여 태울 때까지도 두 사람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애초에 두 사람에게 대화란 이처럼 불쾌한 것이다. 연기를 들이마시자, 조각처럼 매끈하게 빠진 그의 뺨에 짙은 음영이 졌다.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밀러는 뻔뻔한 미리안을 바라보며 실소를 뱉었다. 그 실소가 잦아들자, 그는 무성의하게 턱짓했다. 할 말이 있으면 먼저 하라는 뜻이었으니, 미리안은 품에서 약통을 꺼냈다.

    “이게 필요하신 거죠? 제 조건은 하나예요……. 저와 린느 님을 대공저에서 내쫓는 것. 그것뿐이에요.”

    건방진 말투였다. 그녀는 자신이 이 협상에서 우위를 점했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원하는 것을 정확히 짚어 요구했다. 그녀의 요구에 밀러는 헛웃음을 뱉었다.

    센 척하는 그를 두고 미리안은 더 큰 조소를 뱉었다. 어차피 이 약이 없다면, 저 밖에 늘어선 귀족들의 먹이로 전락할 텐데, 뭐가 그리 여유롭다고 웃음까지 뱉는지. 미리안은 북풍보다 매섭게 얼굴을 굳혔다.

    “웃을 때가 아니실 텐데요? 이 약이 없으면…….”

    “그 약이 없어도 잘만 지냈어. 내게 없어서 죽을 게 있다면, 린느겠지. 그 약은 아니야.”

    여유롭던 미리안의 얼굴이 바싹 마른 낙엽처럼 잿빛으로 변했다. 밀러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즐기며 말을 이었다.

    “그 작은 약통이 내 숨통을 쥔 줄 알고 답지 않게 여유를 부린 건가?”

    “거짓말.”

    “경고하건대, 그대가 쥔 게 고작 이 약통 하나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미리안.”

    나지막한 목소리가 맹위를 부리며 미리안을 압박했으나, 미리안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간헐적으로 웃던 그녀가 웃음을 뚝 그치고 밀러와 시선을 부딪쳤다. 텅 빈 눈동자엔 광기마저 어려 있었으니, 밀러는 그녀의 시선이 거북할 따름이었다.

    그때, 미리안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약통을 집었다. 알약들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

    “여태 잘도 숨기셨어요. 물론, 린느 님이 이렇게 도와주셨으니 가능한 일이겠지만……. 불쌍한 린느 님.”

    도르륵.

    미리안은 천천히 뚜껑을 열어, 바닥에 알약을 떨어트렸다. 알약들이 대리석 바닥과 부딪치며 알알이 여기저기로 튀었다. 미리안은 떨어진 알약을 안타까운 척 미간을 좁혀 바라보더니, 이내 밀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주워 드셔야겠네요……. 그래도 린느 님께서 손수 각하께 드린 약이니, 사양하지 마세요….”

    미리안은 소름 끼치도록 눈매를 접어 청초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발끝으로 알약을 찼다. 그러자, 알약들이 밀러 앞으로 도르르 굴러가 그의 구두코에 툭 튕겨 나갔다.

    “…….”

    밀러는 떨어진 알약을 빤히 응시했다. 린느가 그의 불안증을 걱정해 지어 준 이 약은 그녀의 걱정이요, 불안의 집합이다. 만약, 자신이 병을 앓지 않았더라면 린느는 더 웃으며 연회를 준비했을 테고, 황궁 연회장에서 그리 과음할 일도 없었을 거라며 밀러는 자조했다. 알약을 숨도 쉬지 않고 바라보는 그의 흰 턱에 힘줄이 불거졌다.

    “빛처럼 반짝이는 린느 님은 각하와 절대 어울릴 수가 없어요……. 괜히 린느 님 혼란스럽게 하지 마세요…….”

    그녀의 원색적인 비난에도 밀러는 미세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맞는 말이기에, 린느는 제게 빛보다 반짝이는 존재이기에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빛을 볼 낯도 없단 걸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밀러는 그녀의 말마다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미리안이 기세 좋게 말을 이었다.

    “이래도 포기 못 하시겠다면, 린느 님께 모든 사실을 말할 거예요. 린느 님을 위해서라면……. 각하께서 제게 무엇 때문에 맹목적인 호의를 베푸셨는지, 또 각하께선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단 걸 모조리 말씀드릴 거에요.”

    그녀의 말에 밀러가 고고히 고개를 들었다. 방금까지도 순순히 인정하던 그가 아래 뜬 눈으로 미리안을 응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으드득.

    그의 구둣발이 알약을 사납게 밟는 소리였다. 린느의 걱정과 불안이 으깨지는 소리. 그 소리를 발판 삼아, 밀러는 미리안을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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