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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93화 (92/122)
  • @93화

    ‘집무실까지 침입한 자가 고작 약병만 가지고 사라졌다라.’

    밀러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잘게 저었다. 범인이 너무 뻔해도 뻔하지 않은가? 그의 병세를 알아차렸지만, 대공저 사용인들은 아닌 인물. 대공저 사용인들은 이미 자신들의 주인이 앓고 있는 병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이런 짓을 벌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한 명뿐.

    ‘미리안.’

    맹수가 으르렁대듯, 그의 안색은 사납게 벼려 있었다. 그는 주먹이 희게 질리도록 커다란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화가 치밀어 속이 끓은 탓이다. 그리고 그 화는 얼마 안 가 미리안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닿았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미리안을 린느 곁에 둘 게 아니었는데. 돌연, 밀러의 눈매가 처연하게 찌푸려졌다. 미리안 곁에 린느를 둔 건 다름 아닌 자신이기 때문이기에.

    ‘이젠 멍청하기까지 하군.’

    밀러는 그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뺨을 내려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진작에 린느를 미리안 곁에서 떼어 놨어야 했는데. 미리안이 대공저 생활에 불만을 품고 있단 걸 알고 있었음에도 그녀 곁에 린느를 두다니. 실로, 멍청한 짓이었다.

    한창 연회 준비에 힘쓰던 날, 뜬금없이 스테빈스 백작의 손녀인 프레이가 대공저에 방문했다. 그것도 대놓고 미리안의 초대를 받고서 말이다. 그때, 그녀의 방문을 불허했어야 했다. 기회는 그토록 많았는데, 미리안이 린느를 잘 따른다는 사실 하나로 미리안을 믿었다. 아니, 방치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하이레니아고 뭐고 간에 미리안을 그냥 토트린에게 넘겼을 텐데. 밀러는 제게 향한 화살에 린느가 대신 맞은 듯이 속이 끓었다. 게다가 세르트 경의 낙마 사건에 미리안이 가담했다는 걸 린느가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끔찍해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

    꾹 다문 그의 흰 턱엔 힘줄이 불거졌고, 그의 금안엔 보기 드물게 살의마저 담겨 있었다. 사실, 미리안이 무슨 이유로 그런 짓에 가담했는지는 밀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미리안이 린느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뿐이지. 그는 힘없이 열린 서랍을 닫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받은 대로 돌려주기 위함이다.

    * * *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들이 대공저 본관 앞을 점령하여 문전성시를 이뤘다. 대공저 사용인들은 미리 호흡을 맞춘 대로 능숙하게 손님들을 맞이했다. 대공저에서 수년 만에 열리는 연회를 앞두고 집사장의 노파심은 날로 커졌으나, 막상 연회 일이 되자 그의 노파심도 수그러들었으니. 대공저 사용인들은 그만큼이나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였다.

    빈틈이 보이던 연회장이 무서운 속도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두 대의 마차가 무서운 속도로 대공저로 들어섰다.

    끼익.

    먼저 들어선 마차가 본관 앞에 미끄러지듯 정차했다. 이어 따라온 마차는 첫 번째 마차에게 선두를 빼앗긴 채 어정쩡하게 정차했다. 두 번째 마차 때문에 마차길이 막혔음에도 마차 주인은 심기가 뒤틀렸는지, 내리지도 않고 고집스레 자리를 지켰다.

    달칵.

    먼저 도착한 마차 문이 열리자, 붉은 드레스에 화려한 부채 뒤로 얼굴을 가린 귀부인이 내렸다. 그녀는 내리자마자 자신의 뒤를 쫓아온 마차를 향해 몸을 틀더니, 피식 웃었다. 조소였다.

    “어서 오십시오! 먼 길 달려와 연회에 참석해 주시어 자리를 빛내 주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대공 각하께서 베푸시는 연회인데 먼 길이 대수겠습니까?”

    귀부인은 눈매를 반달로 접어 가며 싱긋 웃었다. 웃는 와중에도 치켜올린 콧대며 날렵한 눈매에 손짓과 걸음걸이까지. 누가 봐도 오만하고도 우아한 자태였다. 입구를 지키던 이들이 귀부인에게 가볍게 묵례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부인.”

    귀부인은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연회장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섰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그만 로비 입구에서 걸음을 뚝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이곳이 대공저라고?”

    그녀의 눈동자가 대공저를 훑어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어두컴컴하고 칙칙한 성인 줄 알았더니, 황궁만큼이나 빛나는 곳이 아닌가. 물론, 외관은 여전히 칙칙하다만, 내부가 이렇게 번쩍번쩍하니 다행이다. 귀부인은 부채 뒤로 눈동자만 도르르 굴리며 감탄했다. 그때, 그녀의 등 뒤로 남자가 씩씩거렸다.

    “대공저에 처음 방문한 건 내 친히 알겠다만, 그만 구경은 들어가서 하지?”

    투정 어린 험한 목소리에 귀부인은 몸을 틀어 미간을 확 찌푸렸다. 얻다 대고 반말이냐 버럭 따지려 했으나, 낯을 보니 그 높으신 하이레니아 후작이었다. 귀부인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후께서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귀부인의 언사가 하이레니아의 속을 뒤집었다. 그는 사납게 귀부인을 내리깔아보며, 어금니를 물었다. 감히 후작이 타고 있는 마차를 앞지른 것도 모자라, 어디 본 적도 없는 여인이 제게 따져 드냐며 노골적으로 화를 뿜었다. 그런데도 귀부인은 물러날 기미도 없이 오히려 하이레니아의 속을 박박 긁었다. 귀부인은 욕 한번 뱉지도 않고 하이레니아의 심기를 제대로 뒤틀었다.

    그때, 지난 황궁 연회장에서의 일이 스쳤다. 그날, 밀러에게 당한 치욕이 뭉근하게 올라 화가 몸집을 키웠다.

    ‘이것들이 한 번 그 꼴을 보였다고, 기어들 오르는구나.’

    그날 황후로부터 황궁 연회에 초대받은 귀부인들이 하이레니아를 둘러싸고선 한마디씩 던진 게 떠오른 것이다. 하이레니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열이 올랐다. 그런데도 귀부인은 짝다리를 짚고 그런 그를 빤히 바라봤으니. 마치, 할 말 다 했냐 따지는 듯한 모양새였다. 이에, 하이레니아는 그르렁대며 물었다.

    “부인은 위아래도 없나? 그래, 날이 어두워 그대가 마차로 범한 실수는 이해해 주지. 하나, 지금 이 태도는 무슨 뜻을 품고서 행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하극상인가?”

    사나운 눈초리로 타박하듯 묻자, 귀부인은 말없이 눈을 얕게 뜨며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는, 그녀는 머리만 까딱 인사했다.

    “제가 눈이 안 좋아서.”

    귀찮아 죽겠는데, 이제 됐냐는 듯이 하이레니아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하이레니아는 크게 한탄했다.

    “쯧, 되어 먹은 꼴하고는.”

    저러니 파트너도 없이 홀로 연회장에 참석했을 테지. 하이레니아는 지나가는 말인 척 귀부인을 향해 비난했다.

    ‘저거 확 뒤통수를 때려?’

    귀부인은 그런 그의 등을 뚫어지게 노려보더니 고개를 휘휘 저으며 연회장 내부로 들어섰다. 아무리 그래도 후작이니, 뒤통수를 갈긴 순 없지 않은가. 그녀는 참고 또 참자며 가슴팍을 쓸어내리며, 부인들이 모인 자리로 향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부인들이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귀부인을 빤히 응시했다.

    “자기들? 나 왔는데 안 반겨 줄 거야?”

    “어, 어머머머!!”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이야! 자작, 아니 백작 부인!”

    자리에 앉아 있던 부인들도 벌떡 일어나 귀부인을 삥 둘렀다. 도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다가 이제야 얼굴을 비치냐며 투정 어린 안부 인사가 정신없이 이어졌고, 귀부인은 그녀들의 물음에 하나하나 대답해 주며 배시시 웃었다. 그녀들의 웃음소리가 연회장을 울리자, 하이레니아는 그녀들을 한심하단 듯 바라봤다.

    ‘애들도 저것보단 낫겠군.’

    하이레니아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자, 그의 비위를 맞추던 귀족들이 금세 울타리처럼 그를 에워싼 채로 굽신거렸다.

    “후작 나으리께서 친히 행차하실 줄은 몰랐는데, 이리 얼굴을 뵙게 되어 얼마나 영광인지……!”

    “뭐, 내가 못 올 곳이라도 되나? 대공 각하께서 친히 초대장을 보내 주셨는데, 못 올 이유야 전혀 없지.”

    “그, 그렇지요.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후작 나으리.”

    하이레니아는 헛기침을 하며 샴페인 잔을 기울였다. 평소라면 말도 못 붙일 것들이 제게 머리를 숙이고 말을 붙이는 게 영 탐탁지 않은 탓이다. 당장 아까 마주친 귀부인의 행태도 그렇지 않은가? 감히 제국의 후작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에 행동 머리인지……! 하이레니아는 눈꺼풀을 달싹거리며 귀부인을 빤히 노려봤다.

    ‘저깟 여인 때문에 일을 망칠 순 없지.’

    그는 금세 낯을 달리하며 점잖을 떨었다.

    “오는 길이 막막하여 내 신경이 날 서 있었네. 그대가 보인 성의는 기억하도록 하지.”

    “무한한 영광입니다!!”

    귀족은 허리를 접어 가며 머리를 조아렸다. 하이레니아는 그런 그를 보며 우월감에 심취해 입꼬리를 올렸다. 황태자에게 호통 한번 난 게 뭐 얼마나 큰 실수라고! 워낙 불처럼 시원스러운 성정이니, 황태자는 용서조차 시원스러운 사람이다. 그러니, 실수를 만회할 기회는 천천히 엿보면 된다. 하지만, 일반 귀족들은 속이 좁아 실수 한 번에도 먹이를 문 악어처럼 끝이 없으니. 하이레니아는 밀러를 그 속 좁은 귀족들의 먹이로 던져 주겠노라 다짐했다.

    ‘좀팽이 같은 이것들에게 약점을 한번 물려 봐. 미친개보다도 더 질기게 시달릴 테지. 그럼 또다시 이 대공저 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올 테니, 생각만으로도 달콤하구나.’

    하이레니아는 샴페인 잔을 기울이며 웃음기를 씻어 내려 애썼다. 젊고 오만한 대공이 이 많은 이목을 어떻게 감당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어 몸을 가만두기가 고역이었다.

    그때, 하이레니아의 곁에서 하하 웃으며 아첨하던 귀족들이 한 남자를 발견하고서 그대로 굳었다. 이 대공저에 존재해선 안 될 사람이 연회장에 참석한 탓이리라. 귀족들은 그 남자를 보며 손끝을 떨었고, 어떤 이는 입술을 떨었다. 샴페인 잔에 샴페인을 따르던 사용인은 그만 병을 바닥에 떨어트릴 뻔했다.

    ‘주, 주인님…?’

    사용인은 자신의 눈을 비비며 고개를 저었다. 이 넓은 대공저를 환락가로 타락시킨 장본인. 그 남자의 얼굴은 분명, 선대 대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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