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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92화 (91/122)
  • @92화

    “사실 대공 각하께서 대공저 마차를 보내셨습니다. 각하께서 혹여라도 움직이실 일이 있으면 그 마차를 이용하라 하셨으니…. 아가씨, 이러지 말고 이만 가 보셔요. 주인님께서 저러시다가 정말 속 버리시겠습니다.”

    하녀까지 가담하여 등을 밀자, 린느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한탄하듯 말했다.

    “알겠어요. 아주 그냥 대공저 연회장을 휩쓸고 올 테니까 그만 떠미세요!”

    “어어 그래라! 아주 빗자루처럼 다 쓸고 오너라!”

    세르트 경의 단호한 대답에 린느는 어이가 없단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 뒤로도, 마차에 올라탈 때까지 “진짜! 진짜 간다? 나 정말 가!? 진짜로 간다고!”라고 외쳤지만, 그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마부는 기다렸단 듯이 날카로운 채찍 소리를 내며 마차를 몰았다. 순식간에 탄력받은 말이 잘 닦인 백작저를 가로지르며 순식간에 내달렸다. 린느는 이미 어두워진 창밖을 차마 보지 못하고 손톱을 물어뜯었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것처럼 어둠이 짙었으나, 린느는 마차 안에 남은 밀러의 잔향에 기대어 두려움을 외면했다.

    * * *

    저녁이 되자, 멀리서 먼저 출발한 귀족들이 하나둘 대공저에 도착했다. 그들은 가볍게 연회장을 돌아다니며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린느가 생각해 낸 샴페인 분수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게 샴페인이란 말이오?”

    “네. 마셔도 좋지만, 마시지 않고 관상용으로 두길 추천해 드립니다.”

    “그 말을 안 해 줬다면, 이미 벌써 마실 뻔했소. 하하하!”

    귀족들은 기분 좋게 하하 웃으며, 분수 구경에 한창이었다. 와인 분수도 있다는 설명도 곁들자, 귀족들은 서로 보여달라며 재촉했다.

    “각하께서 안목이 탁월하십니다. 샴페인 분수라니!”

    “아기 천사 석공은 살아 움직이듯 세밀합니다. 꽤 오랜 기간 공들여 조각한 작품 같지 않습니까?”

    “고풍스러우면서도 아기자기한 게 너무 사랑스럽군요.”

    이렇게 사랑스럽고 파격적인 샴페인 분수를 밀러가 만들었다? 귀족들은 아마 실력 좋은 전문가를 뒀을 거라며 말없이 확신했다. 그때, 넬 부인이 헛기침하며 말했다.

    “대공 각하께서 직접 세르트 영애께 연회 준비를 전담하셨습니다. 고로, 이는 세르트 영애께서 직접 주문 제작한 작품이지요.”

    “어쩐지! 너무 사랑스럽고 우아하다 했소. 소백작 님을 닮아 무척이나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작품이오. 그렇지 않소?”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지난 연회장에서도 뵈었잖아요? 아주 그냥 천사가 따로 없으셨는걸요?”

    “천사…? 아하하, 그래 천사요. 천사. 하하…….”

    지난 연회장에서 린느가 락센 경을 몰아세우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건만, 천사라니. 귀족들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 어색한 기류를 환기하기 위해서인지 서로 건배하자며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자자, 이렇게 우리 눈을 즐겁게 해 주신 소백작 님을 위해 건배나 합시다!”

    “우리 소백작 님을 위해 거, 건배!”

    이 모습을 바라보던 넬 부인이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린느를 자랑스러워했다. 곁에서 수발들던 사용인들이 손뼉까지 쳐 주며 그들의 건배사를 거들기까지 했으니. 보기에 퍽 순조롭고 활기찬 시작이었다. 하나, 밀러의 표정엔 기쁨이라곤 티끌 언저리도 비치지 않았다.

    ‘린느가 이 모습을 보면 실망하겠지.’

    우아하고 차분한 음악이 대공저를 잔잔하게만 울렸다. 수년 전, 선대 대공이 주최한 연회장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대공저 연회장엔 얌전한 웃음소리만 존재했다. 귀족들은 현 대공인 밀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지도 소란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들의 노력이 가상하긴 하나, 밀러는 그들의 노력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이렇게 조용한 연회는 린느가 원하던 게 아닐 텐데.’

    린느라면 이 연회장에서 세법 공부를 해도 되겠다며 투정을 부릴 테지. 아니면 그 귀여운 춤을 또 볼 수 있을지도 모를 테고. 밀러는 그녀를 떠올리며 말없이 입꼬리를 올렸다가 실이 끊어진 듯이 웃음을 멈췄다. 연회장 곳곳에 묻어 있는 린느의 흔적이 그녀의 부재를 선명하게 일깨운 탓이다.

    그녀가 직접 고른 융단 카펫을 따라 걷다 보니, 그 끝에 연주하는 악단이 보였다. 비밀리에 후원했던 악단이 이제야 자리를 찾아 대공저 로비를 차지했으나, 린느는 없다. 그녀가 없어서인지, 따로 다른 주문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공작저에서 신나게 연주하던 그 기개는 없고, 그럴듯한 흔한 노래만 흘렀다. 밀러는 그들을 올려다보며, 린느의 흔적 가운데에 길 잃은 아이처럼 헤맸다. 고작, 하루인데. 하루가 이렇게 길게 느껴져 아이처럼 헤매는 꼴이란. 밀러는 자조하면 지나가던 사용인이 건넨 샴페인 잔을 집었다.

    그는 샴페인으로 빡빡한 목을 축인 후에 샴페인 잔을 빤히 바라봤다. 초야를 치른 그날, 그녀와 마셨던 샴페인이다.

    ‘돌겠군.’

    길들인 맹수가 주인을 잃고 허허벌판에 던져진 꼴이다. 그는 티끌의 기억에서도 린느를 떠올리며 분리불안에 허덕였다. 결국 참지 못하고 밀러는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자, 밀러를 훔쳐보던 이들이 서로의 귀를 간지럽혔다.

    “각하께서 심기가 불편해 보이지 않습니까?”

    “소백작 님께서 부재중이라 그러신 거 같기도 하고…….”

    “에이, 설마 우리 대공 각하께서 그러시겠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국의 북풍이라 불리는 분이건만.”

    “그렇긴 한데, 촉은 무시 못 한다죠.”

    부인들이 부채로 입을 가리며 저들끼리 다시 속삭였다.

    “맞지? 소백작 님이 부재하셔서 저러시는 거지?”

    “그래서, 소백작 님은 왜 부재중이신데요? 전 우리 소백작 님 뵈려고 왔는데….”

    “어머, 몰랐어요? 세르트 경께서 낙마하셨다던데. 그러니 백작저에 계시죠. 안 그래도 대공저 오는 길에 백작저에 들러 인사드리고 왔어요.”

    얌전히 듣고 있던 부인들이 눈을 크게 뜨며 벌떡 일어났다.

    “치, 치사하게 혼자 가신 거예요? 전 방금 알았는데!”

    “그러게요. 그렇게 혼자 소백작 님 뵙고 오시니 좋으셨겠어요……. 가는 길에 소백작 님 좋아하시는 체리는 사 들고 가셨죠? 하아….”

    “우리 좀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들이 곧 울 것처럼 호들갑을 떨자, 먼저 말을 꺼낸 부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 아니 절대 일부러 저 혼자 백작저에 들른 건 아니었어요! 어쩌다 보니!”

    “그러시겠죠~”

    “암요~”

    부인들은 대공저 연회가 끝나면, 함께 세르트 백작저에 들르자며 약속했다. 이를 조용히 지켜보던 안나도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수년 동안 대공저 살림을 도맡아 온 그녀였지만, 이렇게 성대한 연회는 그녀 역시 처음이기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하여, 밤새 라밀라에게 다양한 자문을 구했지만, 그래도 부족했다. 지금 이 자리에 린느가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불안하지 않았을 텐데. 안나는 문득 린느의 빈자리를 통감하며 마음이 급해졌다.

    ‘각하께서 안색이 좋지 못했는데…….’

    불안증세 때문에 밀러가 집무실로 향했을지도 모른 생각에 안나는 초조해졌다. 그 초조한 마음을 안고서 걸음을 재촉하다 보니, 어느새 집무실에 닿았다.

    똑똑.

    “들어와.”

    밀러의 대답을 듣자마자, 안나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집무실은 평온했다. 다만, 알렉스의 표정은 곧 죽을 사람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달칵.

    안나가 문을 닫고 들어서자마자, 알렉스가 희게 질린 얼굴로 허둥대며 물었다.

    “부인, 혹시 집무실에 누가 들어온 걸 본 적 있습니까? 가, 각하의 서랍에 있어야 할 게 사라졌습니다. 하필, 하필이면 그것이…….”

    “됐어. 애초에 집무실에 침입하는 걸 안나가 목격했더라면, 보고만 있었겠나? 알렉스, 쓸데없는 질문은 그만두고 나가서 손님들을 맞이해.”

    알렉스는 심란한 표정으로 밀러를 응시했다. 자신이 없는 사이, 밀러가 황궁 연회장에서 정신을 잃을 뻔했다는 소리를 린느에게 전해 들은 알렉스였다. 그동안 밀러의 병이 아주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던 그는, 그 소식에 천장 없는 탑에 갇힌 기분이었다.

    차라리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까지 아프지도 않았을 거라며 알렉스는 홀로 몇 날 며칠을 속앓이했다.

    ‘어차피 나아지지 않을 바에 희망 고문이나 하지 말 것이지. 잔인하기 짝이 없어.’

    알렉스는 락센이 주최한 연회장을 여유롭게 거닐던 밀러의 모습을 떠올리며 난생처음 여신을 비난했다. 그만큼이나 그의 상실감은 꽤 무겁고도 커다랬다.

    “각하. 쉬이 넘길 사안이 아닙니다. 아가씨께서 부재중이신데 약까지 사라졌습니다. 그것도 누군가가 집무실에 침입해 훔쳐 달아났습니다. 당장 연회를 중단해도 과한 처사가 아닙니다.”

    알렉스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일을 이렇게 벌인 작자들을 향한 분노와 밀러를 향한 안타까움이 한데 엉겨 있었다. 하지만, 밀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어지간히도 내가 그대들의 걱정을 샀나 보군.”

    밀러는 그 말만 남기고 두 사람 모두를 집무실 밖으로 내보냈다. 더불어, 린느가 열심히 꾸린 연회장을 망치지 말라는 당부도 곁들였다.

    달칵.

    문이 닫히자마자 밀러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그의 날카로운 금안이 힘없이 열린 서랍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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