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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91화 (90/122)
  • @91화

    본관을 지키는 사용인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용인들이 별채로 모두 이동한 후에야, 안나는 집무실 복도로 향했다. 예상대로 복도는 너무나도 한적했으며,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이상하네. 분명 사람이 지나간 거 같았는데.’

    사용인이라면 쥐처럼 숨어서 집무실로 향할 리도 없지 않은가. 안나는 잠시 자리에 멈춰 생각에 빠졌으나, 금세 중앙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용인도 아니라면 남은 사람은 한 명뿐인 이유였다. 그때, 대공저 밖에서 힘찬 말소리가 들렸다.

    “안나! 마차가 도착했어!”

    넬 부인의 외침에 안나는 다시 걸음을 돌려 로비로 향했다. 대공저 마차 문이 무겁게 열렸고, 그곳엔 알렉스와 밀러뿐이었다.

    “오셨습니까, 각하.”

    안나는 빠르게 밀러의 안색을 살폈으나, 평소와 별다른 점은 찾을 수 없었다. 워낙 표정 변화가 없는 남자이기도 하지만, 상황이 좋지 못할 땐 더더욱 표정의 변화가 없는 편이라 안나는 걱정이 앞섰다.

    ‘설마 세르트 경께서 생각보다 더 크게 다치셨나?’

    덜컥 겁이 올랐으나, 그럴 틈도 없이 밀러는 집무실로 직행했다. 안나는 그런 그의 뒤를 따라가며 알렉스에게 무슨 일이냐 눈치를 줬으나, 알렉스는 미세하게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집무실에 거의 다다를 때쯤에야 밀러가 나직이 일렀다.

    “연회장에 린느가 참석하지 못할 수도 있어. 안나, 그대가 신경 써 줘. 라밀라에게도 그대가 미리 상황을 말해 둬. 나서서 도와줄 순 없어도 연회라면 이골이 난 자이니, 도움받을 게 많을 테니까.”

    “네, 각하.”

    충격적인 말의 향연이었으나, 안나는 침착하게 대답만 할 뿐이었다.

    달칵.

    밀러는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굳은 얼굴로 린느의 빈 책상을 바라봤다. 한참이나 자신의 책상에 걸터앉아 빈 책상을 바라본 밀러는, 차마 침실로 향하지 못하고 소파에 기대어 잠을 청했다.

    * * *

    극심한 고통에 기절하듯 잠들었던 세르트 경이 두 눈을 번뜩 떴다. 그는 천장을 보며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더니, 크게 안도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따끔은 개뿔. 거참 아주 대-단한 따끔이구먼.”

    세르트 경은 투덜거리며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그때, 그의 시선이 침대에 기대어 잠든 린느에게서 멈췄다.

    “…….”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가 심했던 딸이다. 의원들은 그녀가 성인이 되지 못하고 죽을 거라 여겼고, 성인이 된다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 하지만, 하늘이 부녀를 가엽게 여겼는지, 그녀는 잘 자라서 이렇게 다정한 딸이 되었다. 세르트 경은 마음이 자르르 울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대공저에서 잘 지낸단 말이 거짓은 아닌가 보구나.’

    어제, 그의 낙마 소식에 밀러가 직접 백작저에 방문한 걸 보아하니, 린느가 꽤 돈독한 신임을 얻은 게 분명했다. 세르트 경은 그런 딸이 너무나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론 그런 신임을 얻기까지 얼마나 고생했을까 안쓰럽고 미안했다. 세르트 경은 울상을 지으며, 자신에게 덮여 있던 담요를 그녀의 어깨에 걸쳐 줬다.

    “……아버지?”

    “깨우려던 건 아닌데 일어나 버렸구나. 아침은?”

    “아버지 다리는요? 괜찮아요?”

    “사실 괜찮지 않았는데, 어제보다는 확실히 괜찮구나.”

    다친 당일에는 온몸이 땀으로 젖을 만큼 식은땀을 흘리고, 불에 덴 듯이 열이 치솟고, 숨 쉴 때마다 다친 곳이 함께 욱신거렸었다. 하지만, 오늘은 식은땀도 나지 않고 열감과 통증도 꽤 줄었다.

    “저 의원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닌 게야. 봐라, 발가락도 움직여!”

    세르트 경은 엄지를 움직여 보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린느가 그의 팔뚝을 짝 때리는 바람에 웃음도 뚝 그쳤다.

    “아버지도 참! 발가락 움직인다고 지금 좋아하실 일이에요? 확 의원님 데려와요? 방금 발가락 움직이며 장난쳤다고 일러 버릴까요?”

    “이만큼 나아졌단 뜻이었다. 이제 저택에 헬렌도 있고, 너희 엄마도 오고 있다니 그만 걱정해도 된다. 응?”

    “어머니도 오고 계신다구요?”

    “그래. 대공저에서 초대장을 받았다 했더니, 그건 참석해야 한다고 좋아하더라. 어휴, 이젠 딸내미도 철들었는데, 너희 엄마는 언제쯤이나 철들지.”

    린느는 왠지 모를 동질감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세르트 백작 부인에게서 먼 훗날의 자신이 보인 탓이다. 한탄하던 세르트 경이 시계를 보더니 질겁했다.

    “힉, 벌써 이렇게나 되었느냐? 맙소사, 린느! 어쩌려고 아직도 출발도 하지 않고 뭐 했느냐? 지금 출발해도 연회에 늦게 생겼구만! 헬렌! 헬렌!”

    “헬렌 부를 거 없어요. 약혼남이랑 데이트하러 갔거든요?”

    “뭐어? 지금 이 상황에 그놈을 만나긴 왜 만난다니! 됐다. 헬렌 없어도 돼. 린느, 당장 대공저로 돌아갈 준비부터 하려무나.”

    “안 돌아가요. 아버지가 이렇게 다쳤는데 대공저로 어떻게 돌아가요?”

    “그럼 네가 여기 있으면 다친 내 다리가 다 낫는다니?”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대공님이 명령을 내리셨거든요.”

    명령이란 말에 세르트 경의 눈썹이 굽이쳤다. 이 상황에 무슨 명령을 내렸을지 감도 잡히지 않은 탓이다.

    “아버지 곁을 지켜 주라는 명령이에요. 그러니까, 일단은 가만히 계세요.”

    그녀의 똑 부러진 대답에 세르트 경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똑똑.

    때맞춰 노크 소리가 울리자,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들어오게!”

    문이 열리자, 사용인이 쭈뼛거리더니 어색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저어…… 주인님? 마차가 한 대 도착하긴 했으나, 부인께선 안 계시고 선물들만 가득합니다.”

    “하…. 그래, 곧장 집으로 올 리가 없지. 선물상자들 정리해서 방에 둬라.”

    “네, 주인님!”

    달칵.

    문이 닫히자마자 세르트 경은 신세 한탄에 중얼거렸다. 그러자, 멀찍이서 약재를 다듬던 프예쉬가 한걸음에 다가와 세르트 경의 코앞에 약을 들이밀며 한탄을 막았다. 세르트 경은 잠시 프예쉬를 향해 눈을 흘기더니 약을 넙죽 받아먹었으니. 그 쓴 약을 모두 들이켠 후에야, 다시 말을 이었다.

    “크흐, 쓰다 써! 내가 너희 엄마 때문에 늙지, 늙어.”

    어디서 많이 들어 본 한탄인데……. 린느는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더니 금세 피식 웃었다. 드뷔르 의상실에서 드레스를 구매하고서 세르트 경에게 들었던 잔소리와 똑같은 탓이다. 린느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에이, 언제는 엄마 없으면 따라 사라질 거라면서요?”

    “내, 내가? 내가? 그 철딱서니 부인을 따라 죽어? 린느, 그럴 일 없다. 절대 없어.”

    단언하듯 말했으나, 세르트 경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래도…… 뭐 너희 엄마가 아니었으면 혼인을 서두르진 않았을 테지. 아무튼, 린느 어서 출발하거라. 더 늦으면 연회장 문도 닫혀.”

    “안 갈 거래도 그러시네요. 일단 쉬고 계셔요.”

    세르트 경이 다정하게 린느의 손을 잡아끌어 침대에 다시 앉혔다. 침실 밖으로 도망치려던 그녀를 잡아 세운 것이다.

    “프예쉬. 내 다리는 이제 괜찮지 않소? 내 딸아이가 내 말은 못 믿어도 의원의 말이라면 믿지 않겠소?”

    프예쉬는 잠시 두 부녀를 번갈아 보더니, 안경을 움직이며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괜찮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세르트 영애께서 이곳에 계신다 한들 똑! 부러진 다리가 딱! 붙지는 않지요.”

    세르트 경은 프예쉬를 곁눈질했다. 그냥, 적당히 맞장구만 쳐 줄 것이지 쓸데없는 말을 붙인 게 영 마음에 안 든 모양이다.

    “아, 아무튼 저렇게 고지식하고 거짓말은 티끌도 못 하는 사람이 아니더냐? 그만 믿고, 대공저로 돌아가거라. 응? 대공 각하의 면이 문제가 아니라, 린느 네가 손수 꾸린 연회라며? 애커만 경에게 모두 다 들었어.”

    “괜찮아요. 연회가 뭐 이번만 있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연회를 즐길 기분도 아니에요.”

    “왜! 왜 아닌데! 공작저 연회에 참석하고 싶어서 종일 외출도 삼가던 네가 아니더냐? 그런데 연회를 즐길 기분이 아니라니?”

    “아니 그럼 아버지가 이렇게 다치셨는데 치맛자락 흔들면서 놀 기분이겠어요?”

    세르트 경은 그녀가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해 입꼬리를 움찔거렸다.

    “린느, 그럼 네가 여기 있는다고 내 마음이 편한 줄 아느냐? 아니야 전혀. 전혀 편하지 않아. 너의 발목을 잡은 늙은이가 된 기분이란 말이다. 내 이 속앓이 때문에 뼈가 더 늦게 붙겠어. 그렇지 않소? 프예쉬?”

    다시 약재를 다듬던 프예쉬가 도도한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속앓이는 만병의 근원이지요.”

    그 짤막한 대답만 남기고, 프예쉬는 또다시 약재를 다듬었다. 일벌레도 저런 일벌레가 있나. 세르트 경은 탄식을 뱉으며, 다시 린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내가 이렇게 부탁한다. 지금이라도 대공저로 돌아가거라. 망할, 미친 말을 들인 놈부터 족쳐야겠군! 답답해서 살 수가 있나!”

    “이미 족치셨습니다, 세르트 경.”

    “아오! 프예쉬! 그대는 그만 나가계시오!”

    “대공 각하께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수발을 들란 명령을 내리셨습니다만.”

    세르트 경은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더니, 그만 말을 말자며 다그쳤다.

    “얘야… 봤지? 내가 지금 속이 아주 죽겠다. 너라도 내 속을 좀 시원하게 해 주거라. 응? 여봐라! 당장 마차를 가져와!”

    그의 외침에 곁에서 대기하던 하녀가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마지못해 조심스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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