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그리고! 아버지 맨날 술 드시면 언니만 찾는 거 아세요? 아카데미에서 머리 터지도록 공부하고 수석 졸업했더니, 허구한 날 언니만 찾으시는 거 솔직히 서운하거든요?”
헬렌은 팔짱을 낀 채로 휙 몸을 틀었다. 그러자, 세르트 경이 당황한 얼굴로 헬렌에게 손짓했다.
“그, 그러려던 건 아니다. 아비 마음 잘 알면서 또 이러는구나!”
차라리 린느 역시 헬렌처럼 아카데미를 갔더라면 그가 그렇게 걱정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공저로 들어갔으니 당연히 걱정될 수밖에.
벌써 린느와 나눈 서한이 서랍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 서재 서랍을 하나 더 마련했으나, 세르트 경의 걱정은 전혀 줄지 않았다. 뒤늦게 철든 딸이 무작정 대공저 생활이 모두 재미있다 적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탓이다. 그래서 그가 대공저에서 열릴 연회를 그토록 기다린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한데, 다리가 부러졌으니 참석도 못 할 테지.
‘그나저나 대공저에서 사람이 나오면 뭐라 해야 하나…….’
세르트 경은 깊은숨을 푹푹 내쉬며 붕대로 감싼 다리를 빤히 바라봤다.
똑똑.
“헬렌, 대공저로 서한 보낸 지 얼마나 됐느냐?”
“한 두어 시간쯤요?”
그럼 대공저에서 사람이 나온 게 아닐 거라며 세르트 경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헬렌이 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건 대공저 사람도 백작저 사용인도 아니었다.
“아버지!!”
“리, 린, 린느?”
세르트 경은 희게 질린 린느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친 다리를 바닥에 내려 뛰어올 기세였다. 뒤늦게 헬렌이 그를 잡았으나, 아픈 다리를 절뚝거리며 린느를 콱 안았으니. 헬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잔소리를 했다. 그러나 오래가진 못했다.
“내 새끼 얼굴 좀 보자. 응? 왜 이렇게 유령처럼 창백한 게야? 요즘 일이 많아서 그런 거냐?”
“전 멀쩡해요. 아버지 다리가 문제죠.”
린느는 검지로 세르트 경의 다리를 가리켰다. 그것도 잠시, 세르트 경은 두 딸 손에 잡혀 다시 침대에 강제로 옮겨져 당황한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도대체 그 힘이 어디서 나왔냐며 따지려던 찰나에, 헬렌이 먼저 입을 뗐다.
“낙마하셨어. 이쪽 다리만 부러져서 다행이지 뭐야. 문제는, 그 사고 난 말이 원래 아버지의 말이 아니었단 거야.”
린느는 헬렌과 초면이었으나, 내색할 수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확실히 헬렌은 듣던 대로 똑 부러지는 성격에 말하는 스타일도 답답하지 않고 시원시원했다.
“그래서 내가 마부 아저씨들한테 물어봤는데, 그런 말은 자기네도 처음 본다는 거야. 이게 말이 돼? 하여튼, 이래서 자주 저택을 비우면 안 된다니까?”
헬렌은 묘하게 세르트 경을 타박하듯 말했다.
“아버지, 제발 이젠 건강 생각 좀 하세요. 그리고 이젠 외출도 좀 자제하시구요! 주인이 자주 저택을 비우면, 이런 사달이 날 수밖에 없다고 누누이 말씀드렸잖아요!”
“뭐 내가 놀러만 다니는 줄 아느냐……? 일이 많아 자주 외출하는 거뿐이지….”
“그래서, 결국 이제 철든 언니까지 불러내셨구요? 속 시원하시겠네요!”
헬렌은 답답한 마음에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세르트 경은 어깨를 축 떨어트리곤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 탓이다. 가만히 지켜보던 린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헬렌, 말버릇이 그게 뭐야? 네가 답답하다고 그렇게 쏘아대면, 네 답답한 마음이 좀 나아지긴 하니? 아니잖아. 그런데 그렇게 쏘아대서 좋을 게 뭐야. 게다가, 아버지가 다치고 싶으셔서 다치셨겠어? 내가 없는 동안 네가 고생한 건 알겠지만, 그렇게 말하면 못 써.”
헬렌은 엄마와 똑 닮은 눈으로 린느를 빤히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얼었다. 린느가 많이 달라졌단 소식은 헬렌 역시 귀가 닳도록 듣긴 했으나,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있으니 위화감마저 느껴진 탓이다.
“어, 어어…….”
끼고 있던 팔짱도 풀고서 헬렌은 린느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줬다. 철부지가 철이 든 게 아니라, 아주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 탓이다.
“나 없는 동안 고생했으니, 눈이라도 붙여. 이제 내가 아버지 곁에 있어 드릴게.”
“어? 아니, 연회는 어쩌고? 내일이라며.”
“괜찮아. 얼추 다 끝내고 왔거든. 그리고 대공님도 함께 왔어.”
살짝 열린 문틈으로 알렉스와 대화를 나누는 밀러의 모습이 언뜻 비쳤다. 헬렌은 그가 풍기는 위압감에 놀라 입술을 떨었다. 일개 백작이 낙마했다고 대공이 직접 찾아올 일인가? 눈치 빠른 헬렌은 대공의 표정을 보자마자 직감했다. 그가 자신의 언니를 가신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졸업하고 집에 오자마자 이런 일이 생겨서 좀 그렇긴 해도,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아니야. 괜찮아, 나도 도와줄 수 있는 건 다 도와줄게…….”
헬렌은 괜스레 헛기침하며 린느의 말에 대답했다. 그리고 헬렌은 대공저로 서한을 보내길 천만다행이라고 홀로 생각했다.
“아버지, 뼈가 붙으려면 뭐든 잘 먹어야 해요. 아셨어요?”
“그럼!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뭐 고작 이걸로 앓아누울까 그러더냐?”
그때, 문이 활짝 열리며 밀러가 들어서자 기세 좋게 웃던 세르트 경의 얼굴이 놀라 굳었다. 대공저에서 사람이나 보내 주면 감사하다 여기려 했건만, 그가 직접 백작저 침실까지 올라올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니 놀랄 수밖에.
“가, 각하! 어찌 이 누추한 곳까지 오셨습니까!”
“몸은 어떠한지 직접 봐야 마음이 편할 듯하여 이렇게 왔소.”
방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의 대답에 밀러를 놀란 눈으로 응시했다. 세르트 경에게 존칭을 붙인 탓이다.
“마, 말씀을 편히 하십시오, 각하.”
“그럴 순 없소. 그 이유는 추후에 말씀드릴 테니, 일단은 쾌차에 힘을 쓰시오.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보탤 테니, 사양하지 말고.”
밀러가 고개를 비스듬히 틀자, 출장 가방을 든 남자가 들어섰다. 두꺼운 안경 너머로 노련한 눈동자가 번뜩였으나, 가방 손잡이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영지에서 소문난 의원이라 해도 대공의 부름은 처음이니, 놀랄 수밖에. 의원은 안경을 고쳐 쓰며 넙죽 인사했다.
“프예쉬가 세르트 백작 나으리를 뵙나이다.”
“프, 프예쉬? 그 유명한 프예쉬?”
헬렌과 세르트 경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프예쉬라는 의원을 빤히 응시했다. 근래에 귀족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탄 의원이었으니 신기할 수밖에. 무엇보다도, 그에게 진료 한번 받으려면 몇 주씩이나 기다려야 하는데, 밀러의 부름 한 번에 그가 세르트 백작저까지 와 준 것이었다.
프예쉬는 안경을 다시 고쳐 쓰더니, 성큼성큼 세르트 경에게 다가갔다. 당장이라도 그 다리를 고쳐 주겠노라 결연에 찬 눈동자가 붕대에 감긴 다리만 바라봤다. 공중에서 먹잇감을 찾던 매가 단번에 지상으로 꽂히듯, 의원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안 아프게 해 주세요. 안 아프게.”
린느의 주문에 의원은 고개를 짧게 끄덕이더니, 붕대를 천천히 풀었다. 그 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린느의 어깨 위로 밀러의 손이 얹어졌다. 린느는 말없이 그의 손등 위로 손을 얹었다.
의원의 눈동자와 손끝이 세밀하게 상처를 만졌다. 그때마다 내장을 뒤집듯 비명이 나올 뻔했으나, 세르트 경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의원은 두어 번 고개를 비스듬히 꺾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다들 잠시만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방에 있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 방문을 나섰다. 세르트 경은 문밖으로 나서는 이들의 등과 의원의 눈을 번갈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거, 거 이보시오 프예쉬. 무얼 하려고 사람들까지 무른단 말이오? 응?”
“세르트 경, 그저 따끔하고 말 겁니다. 따끔이요 따끔.”
세르트 경이 기겁하며 호통치려던 순간, 비틀려 있던 뼈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문제는 고통에 나간 정신이 한동안 돌아오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한편, 밖으로 쫓겨나자마자 헬렌이 린느와 밀러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응접실에는 이미 티 테이블이 세팅되어 있었고, 사용인들은 부담스러울 만큼 각이 잡혀 그들을 반겼다. 그런 그들이 반가워야 하는데, 린느는 어쩐지 대공저 사용인들이 더 편하게 느껴졌으니. 그간 정이 들어도 단단히 든 게 분명했다. 린느는 잠시 고민하다 밀러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아버지 상태도 생각보다 괜찮으시니, 이제 돌아가도 괜찮을 거 같아요.”
“무리하지 마. 그대보다 우선인 건 존재하지 않아.”
그녀가 옅게 웃자, 그제야 밀러의 표정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는 린느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말했다.
“백작저에 남아, 린느. 거절할 생각이면, 고집스러운 대공의 명령이라 여겨 줘.”
* * *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대공저 밖을 살피던 사용인들도 손을 털고 들어왔다. 어스름이 졌음에도 마차가 돌아오질 않으니, 걱정이 앞선 탓이다. 내일 열릴 연회보다 그들이 모시는 주인들의 안위를 걱정했다. 그때, 안나가 손뼉을 두어 번 쳤다.
“이제 별채로 돌아가세요. 여러분의 마음은 알지만, 이럴 땐 아가씨께서 노력하신 게 수포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흐트러지면 안 돼요.”
그제야 사용인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터덜터덜 별채로 넘어갔다. 누구 하나 걸음이 무겁지 않은 자가 없었다. 안나는 그런 그들에게 계속해서 따듯한 말을 얹어 주며 사기를 올려 줬고, 넬 부인은 이깟 거 아무 일도 아니라며 사용인들의 등허리를 두들겼다.
한참 서로를 위로하던 때, 안나가 고개를 들어 한곳을 응시했다.
“왜 그래 안나?”
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아연히 웃으며 아무 일도 아니라 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에 고정된 채로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