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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89화 (88/122)
  • @89화

    하이레니아는 광대를 올려 마구 웃어 대기 시작했다. 며칠간 토트린의 실종으로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리라.

    “이제야 모든 게 다 맞아떨어지는구나!”

    상기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락센의 어깨를 거칠게 툭툭 내려쳤다. 그러자, 락센이 굳은 얼굴로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황궁 연회에도 그 잘난 낯짝을 들이대지 못한 이유가 다 있었어. 그래! 그 망할 병 때문이겠지! 어디 그뿐이던가? 연회 시즌마다 온갖 핑계를 대 가며 빠진 이유도 다 그 병 때문일 테고?”

    “하나 병을 앓았다기엔 너무 신수가 훤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연회장에서만 아플 이유도 없을 테고 말입니다.”

    “우리를 속인 게지! 봐라, 처음부터 모든 게 다 거짓이었어.”

    하이레니아는 곁에 있던 냉수를 단숨에 비우더니, 침까지 튀기며 말을 이었다.

    “대공이 뭐가 아쉬워서 세르트 영애를 가신으로 들였겠나? 게다가, 그 여자 세르트 백작가의 차녀가 아니라 장녀라며?”

    “예. 저도 그래서 깜짝 놀랐지 뭡니까? 한동안 대공저를 들쑤시던 여자를 가신으로 들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래, 그래서 장녀를 가신으로 둔 게야. 집착병이 도져서 대공저를 들쑤시다가 그 장녀가 대공의 비밀을 알아냈겠지. 그래서 대공이 그 미친 여자를 가신으로 들였을 테고! 그래, 그랬던 거야!”

    미간을 움찔거리던 락센이 하이레니아의 추리에 턱을 바닥으로 떨어트리고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애초에 멀쩡한 차녀가 아닌, 장녀를 대공가의 가신으로 들인 이유가 수상하다 여겼건만. 그곳에 그렇게 큰 비밀이 있을 줄 몰랐다며 맞장구를 쳤다.

    “그, 그럼 이제 비밀도 알아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어르신!”

    하이레니아는 턱을 만지작대며 뱀처럼 웃었다. 단번에 목덜미를 물고 뱀처럼 숨을 조여 죽일지, 아니면 뱀굴로 떨어트려 말려 죽일지 고민했다.

    “세르트 백작이 딸 사랑에 또 유별난 작자가 아니던가? 그러니, 내 친히 두 부녀를 상봉하게 만들어 줘야지.”

    하이레니아는 락센에게 검지를 까딱였다. 그러자 엉덩이에 스프링이라도 달린 사람처럼 락센은 그에게 달려가 귀를 내줬다. 무어라 한참 속닥거리던 두 사람은 소리 없이 히죽거렸다.

    * * *

    커튼 사이로 햇살이 비춰 서로 엉긴 팔에 닿았다. 아침마다 이 게으른 남녀를 깨우는 건, 오롯이 해의 몫이었다. 그들 침실로는 그 누구도 허락 없이 드나들 수가 없으니, 발을 동동 구르며 속앓이하는 건 온전히 알렉스의 몫이었다.

    “으음…….”

    따가운 햇볕에 린느가 뒤척이자, 밀러는 그녀의 몸 위로 폭신한 이불을 귀밑까지 올려 주며 꼭 끌어안았다. 살과 살이 맞닿는 그 감촉이 너무나 따듯하고 아늑해, 망할 연회고 뭐고 모조리 취소하고 싶단 충동이 또다시 올랐다.

    “또 연회 취소하자고 하려 했죠?”

    “응.”

    밀러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린느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줬다. 사랑스럽다. 이 작고 흰 귀마저 사랑스러워 미칠 거 같아, 밀러는 그녀의 귓바퀴를 살짝 깨물었다. 묘한 감촉에 꼭 감겨 있던 린느의 눈꺼풀이 반쯤 뜨였다.

    “뽀뽀로 깨워달라니까, 물어서 깨워 주면 어떡해요?”

    그녀의 귀여운 투정에 밀러는 감자를 훔치는 아이처럼 냉큼 기회를 잡아챘다. 순식간에 그녀를 제 몸 아래에 가둬, 흰 목선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겼다. 그러자 아직 잠이 덜 깨어 있던 린느의 눈이 번뜩 뜨이며 몸을 비비 꼬았다.

    “아, 아침부터 이러면…!”

    “우리가 언제 밤낮 구분이 있었던가?”

    그의 말에 린느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꼭 다물었다. 당장 새벽에 치른 일이 떠오른 탓이다. 그녀가 다른 생각에 빠졌단 걸 알아챈 밀러는 그녀의 살결마다 입을 맞췄다. 지금, 이 순간의 자신을 기억하란 듯, 어제의 자신마저 시샘하듯이 그의 입맞춤은 정중하지만 무척이나 색정적이었다.

    “미, 밀러……! 흣…!”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허리가 활처럼 휘고, 앞이 희게 질렸다. 처음 그와 연회장에서 춤을 춘 그날처럼, 린느는 그에게 그 무엇도 맞춰 주지 않았는데도 그는 똑똑한 남자라 알아서 그녀를 이끌었다. 겉은 부드럽지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쾌락의 늪. 린느는 그의 입맞춤에도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방방 뛰었다. 그때, 봉긋한 살결의 중앙을 가볍게 빨아 넘기자, 린느는 저도 모르게 그의 머리칼을 잡았다.

    가볍게 헝클어져 색스럽기까지 했던 흑발이 린느의 흰 손에 잡혔다. 린느는 깜짝 놀라며 손에서 힘을 뺐지만, 그의 촉촉한 혀는 멈추지 않았다. 린느는 앓는 소리를 뱉으며 그의 머리칼을 쥐지 않으려 애썼다. 밤새 그에게 빨린 아랫입술을 깨물며 교성을 참았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때,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주먹을 풀어 깍지를 껴 줬다. 머리채를 뜯길 바에 손을 내어주겠단 건지. 린느는 그의 손에 잡힌 채로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었다.

    똑똑.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부드럽게 뜨여 있던 밀러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바뀌었다. 그가 상체를 들자, 색스럽게 음영 진 근육들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린느는 그의 몸을 바라보다 흠칫 놀라며 시선을 다른 곳에 뒀다.

    “왜.”

    “각하, 지금 세르트 백작저로 가 보셔야겠습니다.”

    세르트 백작저라는 말에 린느가 몸을 일으켜, 미간을 좁힌 채 문을 빤히 응시했다. 밀러는 그런 그녀를 안아 주며, 조심스레 말했다.

    “준비하고 나갈 테니 기다려.”

    린느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여태 대공저에서 지내며 세르트 백작저로 가 봐야겠단 말을 들어 본 적도 없던지라, 그녀는 울컥 겁이 올랐다. 그러자, 밀러는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아 주며 등을 토닥였다. 불안을 반으로 나눌 것처럼, 아니 그녀가 가진 모든 불안을 자신이 흡수할 것처럼 그의 포옹은 퍽 따듯했다.

    밀러는 그런 그녀의 목욕시중을 직접 들어 주고, 특별히 메리와 루비를 침실에 들여 린느의 곁을 지켜 주도록 배려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의 구두마저 자신이 신겨 주고 싶었으나, 사안이 사안인지라 시간을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밀러는 셔츠 소맷귀 단추를 채우며 알렉스에게 물었다.

    “이럴까 싶어 미리 백작저에 사람을 보냈는데, 결국 일을 피하지 못한 건가.”

    “아무래도 비밀리에 보호차원으로 사람을 붙인 거라 제약이 상당했을 겁니다.”

    “세르트 경의 다리가 부러졌다니, 린느의 걱정이 하늘을 찌르겠군.”

    마그마를 덩어리째 마신 것처럼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설마, 세르트 백작저까지 손을 뻗을 줄이야. 밀러는 생각만큼 멍청하진 않다며 하이레니아를 조소했다.

    “한데 아가씨께서도 동행하시는 겁니까?”

    “당연한 소리 입 아프게 하지 말도록.”

    “……네, 각하.”

    알렉스는 린느가 연회 일에 밀러의 곁을 지키지 못하게 될까 염려되어 한마디 얹고자 했으나, 밀러의 명령으로 그만 말문이 막혔다.

    드르륵.

    밀러는 서랍에서 푸른색 약통을 꺼내, 한 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그는 그대로 집무실을 지나 로비까지 멈추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마차 안에서 홀로 불안해할 린느가 걱정된 탓이다.

    그가 걸음을 재촉하자, 그에게 달린 수족들도 걸음을 재촉했다. 복도 끝 로비가 보이자마자 안나가 사용인들을 줄을 세운 채로 고개를 숙였다.

    “각하, 대공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가씨의 명령대로 일을 무사히 마쳤으니,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밀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그들을 지나쳐 로비 밖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대공저가 왜 이리 쓸데없이 넓어 보이는지. 밀러는 어서 그녀의 곁을 지켜야 한단 생각으로 뛰듯 걸었다. 대공저 입구에 반듯하게 주차된 마차가 보이자, 그는 뛰어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린느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밀러는 참은 숨을 내쉬었다.

    “린느.”

    그의 목소리에 린느는 지옥 같던 죄책감에서 옅게나마 숨을 내쉬었다. 그는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그녀를 품에 안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내내 품에서 놔주지 않았다. 무작정 괜찮을 거란 말은 그녀에게 위로가 되지 못할 걸 알기에.

    * * *

    다리에 붕대를 빙빙 감은 채로 누워 있던 세르트 경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가 다시 쓰러졌다.

    “아, 아니 그 잠깐 사이에 대공저에 서한까지 보냈단 말이냐!? 약혼놈이랑 연애나 할 것이지 왜 괜한 일을 하고 그랬느냐? 응?”

    “약혼놈이라뇨. 약혼남이겠죠.”

    “놈이나 남이나! 그놈이 그놈이지 뭐!”

    귀히 키운 딸내미 데려가는 건 다 놈이지 뭐가 다르냐며 세르트 경은 화를 버럭 냈다. 그러자, 헬렌은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으이그 허투루 공부했지, 헛공부! 내일이면 대공저에서 연회가 열리는데, 지금 느이 언니를 부르면 되겠느냐? 응? 세상에 그 어린 것이 연회 준비한다고 발에 불이 붙도록 돌아다니고 있을 텐데, 그 안쓰러운 걸 불러서야 되겠느냔 말이다.”

    “하. 언니가 알아서 하겠죠. 그리고 언니 안 어리거든요? 제가 더 어리지?”

    “저저 말대꾸하는 거 좀 봐. 아카데미 가서 아주 못된 것만 배워서 말대꾸나 하고.”

    “아버지가 자꾸 언니 편만 드니까 그렇죠! 아버지 낙마하셨다 해서 저도 얼마나 놀란 줄 알아요?”

    젊은 시절에는 말을 거꾸로도 타던 그였다. 그런 세르트 경이 낙마를 했다니, 헬렌 역시 걱정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백작저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이들도 목격한 그녀로선 걱정이 더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세르트 경의 부상을 빌미로 대공의 힘을 빌리고자 후다닥 서한을 보낸 것이었다. 헬렌은 시치미를 떼며 투정하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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