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프레이는 가볍기 그지없는 묵례만 남기고 곧장 대공저 밖으로 향했다. 넬 부인은 저런 싹수 노란 걸 봤냐며 존칭도 없이 화를 냈으나, 린느는 그런 그녀를 두고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넬 부인의 말대로 미리안이 갑작스레 프레이를 초대한 게 마음에 걸린 탓이다. 미리안의 방에 가까워지자, 기다렸단 듯이 미리안의 방문이 덜컥 열렸다.
“린느 님?”
미리안은 평소와 다를 거 없이 똑같은 얼굴로 린느를 맞이했다. 괜한 걱정을 했는가 걱정스러울 만큼 미리안은 평소처럼 린느를 반가이 맞이했다.
“아프셨다며요? 저 정말 걱정했어요……. 요즘 너무 무리하셨잖아요.”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어제 하루 쉬었더니 멀쩡해요!”
린느가 팔을 머리 위로 휘젓자 미리안은 배시시 웃었다.
“프레이 님과 인사하셨죠…? 프레이 님께 연회 초대장을 직접 드리고 싶어서….”
“아, 그러셨구나. 초대장은 직접 전해 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하하…….”
린느는 어색한 웃음으로 말끝을 흐렸다. 순식간에 어색한 정적이 돌았다. 1층에서 사용인들은 행복한 얼굴로 짐을 정리했지만, 2층은 완전히 다른 공간처럼 분위기가 굳었다. 미리안은 평소와 똑같은 표정이었지만, 평생 눈칫밥만 먹은 린느마저 속일 순 없었다.
“미리안 님,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어요?”
“그럼요. 어서 들어오세요.”
미리안은 미소까지 얹어 가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린느는 그녀를 따라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덜컥.
문이 닫히자, 고요한 방 안에 정적만 흘렀다. 미리안은 차를 마시겠느냐며 묻고자 입을 열었지만, 린느가 먼저 입을 뗐다.
“미리안 님, 우리 요즘 얼굴 보기도 너무 힘든 거 같아요. 맞죠?”
“……죄송해요. 요즘 몸이 안 좋아서 거의 방에서 식사하다 보니….”
“네? 몸이 안 좋아요? 어디가 안 좋아요? 많이 안 좋은 거예요?”
“날이 추워져서 아침에 일어나는 게 귀찮아서 그래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린느 님.”
그녀의 대답에 린느는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린느가 먼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미리안 님께 괴한이 붙었어요.”
괴한이란 말에 미리안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괴…한이요?”
“네. 그래서 대공님이 미리안 님의 외출을 금지한 거였어요.”
“……괴한이 있으면 잡으면 되는데, 왜 저를 가두셨죠…?”
“잡을 수가 없었거든요. 그 괴한들을 사주한 사람을 잡아야 하니까요. 그래야 미리안 님이 앞으로 평생 쫓기지 않고 안전하게 살 테니까요.”
순간 미리안의 표정이 굳었다.
“그들을 사주한 사람이라면… 설마 제 아버지인가요?”
린느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만 고개를 끄덕였다.
“하, 하지만 아버지가 제게 괴한을 붙일 이유가 없는걸요? 대공님께선 제 본가로 돈을 보내고 계시는데 아버지가 왜…….”
“석 달째부터 보내시지 않으셨대요.”
“아, 아아……. 그러셨구나. 다행이네요.”
미리안은 보물을 발견한 미치광이 탐험가처럼 웃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웃던 미리안이 돌연 웃음을 뚝 멈췄다.
“그래서, 아버지는 잡으셨나요? 잡았다면, 어디 있죠?”
“그건 대공님께 직접 여쭤보셔야……. 아, 아무튼 그건 나중에 대공님께 여쭤볼 테니까 걱정 마시구요. 다만, 오해를 푸셨으면 좋겠기에 말씀드리는 거예요.”
오해라는 말에 미리안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대공님께서 무작정 미리안 님을 대공저에 가둔 게 아니라는 걸 아셨으면 좋겠다구요. 그걸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아. 네….”
생각보다 미리안의 대답은 담백하면서도 심드렁했다. 린느는 그런 그녀를 보며 의아했으나, 그럴 틈도 없이 미리안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런데, 린느 님은 이 상황들을 어떻게 아셨어요…? 아, 대공님과 친하시니까 대공님께 들으셨겠구나. 알았어요, 린느 님. 그 오해는 이제 풀게요.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미리안이 무어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대화를 마무리한 탓에 린느는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복도 밖으로 나와 있었고, 이미 닫힌 문을 바라보며 린느는 어딘가 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프레이랑 무슨 대화라도 나눴나? 왜 저러지.’
미리안은 아무렇지 않은 척 애를 썼으나, 린느의 촉까지 속일 순 없었다. 린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무실로 향했고, 또다시 조용히 열린 문틈으로 미리안이 린느를 바라봤다.
* * *
선대 대공비가 눈을 감은 이후로 폐쇄된 거나 다름없는 감옥에 오랜만에 사람이 들어왔다. 지하 감옥은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토트린을 반겼으나, 토트린은 그 죽음의 냄새에 기겁하며 살고자 발버둥을 쳐댔다. 퀴퀴한 지하 감옥 냄새가 토트린의 코를 찌를 때마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것처럼 온몸에 진이 빠져나갔다. 토트린은 참지 못하고 녹슨 창살 사이로 뒤룩뒤룩 살찐 팔을 허우적거렸으나, 사용인들이 방망이로 그의 손을 톡 때렸다.
“거참 가만히 좀 계시오! 어째 쉬지도 않고 버둥거리는지!”
“내 딸 미리안! 미리안을 보게 해달란 말이다!! 내 딸이 대공의 이 추악한 꼴을 봐야, 제 아비 불쌍한 줄을 알 게 아닌가!”
“우리 주인님께서 그쪽이 계속 시끄럽게 굴면 혀를 뽑아도 된다고 하셨소. 서로 더러운 꼴을 보고 싶어 이러시는 게요?”
“혀, 혀를 뽀, 뽑아?”
“예. 혀요, 혀.”
덩치 좋은 사용인이 혀를 삐죽 내밀며 검지로 가리키자, 토트린은 입을 꾹 다물고 턱을 달달 떨었다. 하지만 효과가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내가 고용한 자들이 어떤 놈인진 알고 이러는 게지? 엉? 대공저 근처에 쫙 깔아 놨으니, 내가 여기 갇혀 있단 사실을 하이레니아 후께서 눈치채실 테다 이놈들아!”
“아, 예예. 어련히 찾으러 오시겠지요. 그 대-단한 겁쟁이 양반이 퍽이나 여까지 오시겠수. 오려면 이미 진작 왔겠구만. 엉덩이가 꽤 무거운가 보네.”
“이, 이놈들이! 감히 하이레니아 후를 욕보여? 이런 미친놈들이 다 있나!”
“이보시오, 귀족 양반.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 보시오. 나처럼 무지렁이도 상황이 딱 파악되는구만, 알 만한 사람이 자꾸 염병할 소리만 해 대니 원, 답답하게.”
토트린은 두 다리를 발발 떨며 그럴 리가 없을 거라 중얼거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를 조롱하는 사용인의 말이 얼추 맞았다. 하이레니아가 올 일이면 이미 왔을 테고, 자신이 매수한 용병들이 살아 있다면 이미 자신을 구하러 왔을 터. 혹시 몰라 설치해 둔 비상구도 무용지물이었으니, 대공저에 갇힌 생쥐 꼴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토트린에게 등을 진다 해도, 단 한 명은 포기하지 않을 테지. 토트린은 자리에 주저앉아 하나뿐인 아들 이름을 중얼거렸다.
“마르타, 마르타…. 네 아비 죽는다 이놈아…!”
“그래도 운 좋은 줄 아시오. 연회장에 대단한 악단이 온다던데, 그 악단의 노랫소리는 들을 수 있겠구만.”
토트린은 희게 질린 얼굴로 엉덩이로 뒷걸음을 쳤다.
* * *
연회 일이 고작 이틀 남았으나, 토트린의 행적은 여전히 묘연했다. 그로 인해 하이레니아와 락센은 딱 죽을 맛이었으니. 눈치를 살피던 락센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호, 혹시 그 얌생이 같은 놈이 대공 각하께 붙은 게 아닌지 염려스럽습니다.”
그들은 밀러가 토트린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선택지 따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되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에, 뒷갈망이 두려운 탓이다. 동시에, 일을 쓸데없이 키우는 것 또한 밀러의 성정과 맞지 않다는 그들의 안일한 판단도 한몫했다.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하긴, 아무리 대공이라도 토트린을 죽일 명분이 없지 않은가? 아무리 대공일지라도 이유도 없이 한 가문의 가주를 그렇게 죽일 순 없어.”
“그, 그렇지요! 만약, 그리했다가는 귀족들 사이에서 온갖 말이 나올 텐데, 각하께서 굳이 그런 일을 만들겠습니까?”
“가만 보자……. 그렇다면 그 박쥐 같은 놈이 대공과 거래를 했겠지? 거래물이야 뭐, 광산에 환장한 놈이니 광산을 달라고 했을 테고.”
“급해도 그렇지, 설마 대공께서 블랙 광산을 넘길 리가….”
“숨길 게 많다면 블랙 광산 하나쯤 넘겼을 수도 있다. 대공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그렇다면 남은 광산은 6곳. 페리하츠 대공가가 소유한 광산의 수가 줄어드는 것만으로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며 하이레니아가 웃었다.
“그깟 놈이 블랙 광산을 먹었다는 게 고깝긴 하다만, 한 개라도 대공에게서 뺏어 온 게 어디냐. 그래, 그러면 됐지.”
락센은 하이레니아가 하는 말마다 맞다 옳다며 주억거리기 바빴다. 그런 락센을 쏘아보며 하이레니아가 턱짓했다.
“그래서, 스테빈스 경의 손녀는? 토트린 영애와 만나 봤다던가?”
“예! 만나 봤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인지 토트린 영애가 먼저 만나자고 초대장을 보냈다던데……. 혹, 대공이 눈치채고 토트린 영애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 둔 게 아니겠습니까?”
하이레니아는 쯧, 혀를 차며 타박하듯이 말했다.
“그 무서운 세르트 영애가 대공을 홀려 놨는데, 대공이 토트린 영애에게 무슨 말을 하겠나? 짐을 싸서 대공저 밖으로 꺼지란 명령이나 아니면 다행이지.”
하이레니아는 미리안이 질투에 눈이 멀어 속이 문드러져 썩었을 거라며 쯧, 혀를 찼다.
“그래서. 그게 다인가? 대공저에 다녀왔으면 무슨 말은 듣고 왔을 게 아닌가?”
락센은 괜스레 주변을 훑어보더니, 퍽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대공께서 약을 드신답니다. 병명은 모르지만, 확실히 병을 앓는 건 분명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