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웃기지도 않아. 어디 그딴 걸 광산이라 여기고 그대에게 던지려는 건지. 그대도 진즉 알아봤겠지만, 허울만 광산일 뿐 폐광 직전의 것이다.”
“마, 맞습니다. 각하께서 하시는 말씀이 모두 다 옳습니다.”
아첨하고자 답한 게 아니었다. 밀러의 말이 맞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오히려 속이 다 시원했다. 하이레니아 후작저에서 나오자마자, 토트린은 자신이 받을 거래물의 가치를 재느라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그 가치가 자신의 저택 값의 절반도 채 되지 않음을 깨닫고서 토트린은 고민에 빠졌다.
그런 헐값에 미리안을 팔아야 할지, 아니면 미리안에게 홀딱 넘어간 대공과 재협상을 맺을지 말이다. 한데 밀러가 알아서 재협상을 논하고자 하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을까! 토트린은 멍청하게 웃어 댔다.
“제, 제 억울함을 알아주시는 건 대공 각하뿐이 없습니다!”
토트린은 저 죽는 자리인 줄도 모르고 밀러의 말에 맞장구치느라 정신을 뺐다.
“그대의 영지와는 반대편에 위치하긴 했으나, 블랙 광산 하나를 내어주지. 이쯤이면 한배를 탔다 여겨도 되겠나?”
블랙 광산은 마르지 않는 샘이라 불리며, 제국에 단 열 곳만 존재하는 광산이다. 그중 7개의 광산이 페리하츠 대공가의 소유이니, 밀러의 말대로 한배를 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온갖 광물들과 자원들이 끊이지 않고 채광되는 그 마르지 않는 샘을 손에 쥘 수 있다니. 하이레니아가 약속한 광산 두 개와는 비교조차 민망할 지경이다.
“……예에. 예! 그럼요! 이미 벌써 한배를 타고 말고요! 각하, 제 뼈가 삭아 대공저 뒷마당에 묻힐 때까지 이 한목숨 바쳐 살겠나이다!”
밀러가 손바닥을 뻗자, 토트린은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며 눈치를 살폈다. 뻗은 그의 손에 손이라도 얹어야 하나 고민에 빠질 무렵, 알렉스가 두툼한 두루마리를 그의 손에 얹었다. 저만치 떨어진 테이블 위에서 무얼 적고 있나 했더니, 그 잠깐 사이에 계약서를 작성한 모양이었다.
“이번엔 읽어 보고 작성해.”
그의 말 한마디에 토트린은 목이 빠지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계약서를 펼친 토트린은 광대를 씰룩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꿈에서조차 감히 원하지도 못하던 블랙 광산을 얻었으니 웃음이 절로 날 수밖에. 반면, 토트린이 밀러에게 내어줄 거라곤 하이레니아와 나눈 대화를 낱낱이 적어 이를 보증하는 게 다였다.
하지만 결코 그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까딱하다가는 모든 걸 다 뒤집어쓰고 두 맹수들에게 뜯어먹힐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토트린은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금세 마음을 정리하고 다짐했다. 블랙 광산을 넘겼다는 뜻은 그 가문의 위세를 함께 넘겨준 것과 동일하니, 토트린은 의심 대신에 확신을 품었다.
‘내게 블랙 광산 하나를 넘긴다 해도 과반수가 대공가의 소유지만, 또 모르지. 한 개만 더 넘겨도 그 대단한 대공저의 위력도 절반으로 깎이는 걸 테니 날 함부로 내치지 못할 테고. 그럼 안전해.’
토트린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지장을 꽉 찍었다. 그리고, 바로 준비된 종이에 그날 무슨 대화를 나눴고, 어디서 무얼 했는지를 상세히 적었다. 토트린은 시키지도 않은 무얼 마시고 먹었는지까지도 적었다. 밀러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찻물을 삼켰다. 이 찻물이 식기 전에 어서 침실로 돌아가야겠노라, 그 생각뿐이었다.
“다, 다 적었습니다!”
“알렉스.”
“예, 각하.”
알렉스는 토트린이 작성한 종이들을 돌돌 말며, 곁에 있던 하인들에게 턱짓했다. 우악스럽게 생긴 하인들이 기세 좋게 다가와 토트린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넣었다. 그 험한 꼴을 뒤로하고 밀러는 린느를 향해 걸음을 돌렸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토트린이 발악을 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어쩐지 쉬이 문을 연다 했지! 망할, 내가 어디 한두 해 구른 줄 아시나? 오늘 낮에 내가 멀쩡히 살아 돌아가지 않는다면, 내 억울함을 풀어 줄 자들이 있소! 생각 잘하셔야 할 겁니다!”
토트린의 억울함을 풀어 줄 자들이라 해 봐야, 토트린이 고용한 그 용병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알렉스에게 매수된 지 이미 몇 주째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알려 주지 않고, 토트린이 마음껏 떠들도록 두었다. 집무실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가며, 토트린은 목청이 터져라 울부짖었다.
“그 계약서 말미에 여신의 문양이 있소!! 어찌 여신 앞에서 거짓을 맹세한단 말이오!! 망할, 놔!! 놓으라고!”
밀러는 그의 말이 같잖아 웃음도 차지 않았다. 그가 모시는 여신은 침실에서 새근새근 잠을 청하고 있을 텐데, 여신은 무슨.
* * *
저녁 내내 쪽쪽 입을 맞추던 남자가 막 동틀 녘에 침실 밖으로 향했다. 밀러라면 무슨 일이든 알아서 처리하고 알아서 침실로 돌아올 거라 여기고 린느는 다시 잠을 청했다. 그리고 린느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그의 품에 파묻혀 있었다.
린느는 온몸을 쭉 늘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물으려던 찰나에 그의 입술이 이마에 쪽 닿았다.
“아, 안 돼요. 이제 게으름은 그만 피워야 해요.”
“평생 부지런했으니 이 정도 게으름은 게으름도 아니야.”
“전 평생 게을렀으니 그만 게을러도 돼요. 대공님은 더 게으름 피우고 나오세요.”
“누가 그래? 그대처럼 부지런한 사람이 어딨다고.”
린느는 팔불출처럼 편파적인 남자를 보며 고개를 잘게 저었다. 연회가 이제 코앞인데 더는 게으름을 피울 수 없다며 설렁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밀러는 그녀의 흰 목덜미에 입을 맞춰 그녀의 손짓을 막았다.
“아…!”
“조금만 더. 딱 5분만.”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얇은 잠옷 위로 봉긋 솟은 살결을 그러쥐었다. 앙큼한 손이라며 치우려던 찰나에 그의 도톰한 입술이 등줄기를 따라 입을 맞췄다. 그때마다 그녀의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또, 또 시작이었다.
“대공님, 대공님…! 아아……!”
그의 굵은 손목을 두 손으로 뜯어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가 뿜는 뜨거운 숨결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새된 소리가 흘렀다. 마치 구름 위에서 신과 노니는 황홀경에 눈앞이 흐릿해졌다. 린느는 몸부림을 그만두고 고개를 돌려 그의 입술을 탐했다. 아랫입술을 장난스레 살짝 깨물더니, 진하게 빨아 넘겼다. 아래 뜬 금안이 린느를 바라보며 색스럽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함께 게으름을 피우자는 유혹이었으나, 린느는 입맞춤 끝에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단단히 말했다.
“끝.”
“안 돼. 그럴 수 없어.”
“다음 키스는 오늘 저녁에요.”
“그럼 돼. 그럴 수 있지.”
밀러는 두 팔을 느슨하게 풀어 그녀를 놔줬다. 빗을 들고 그녀의 머리칼을 빗겨 주고, 세안물도 대령해 줬다. 식사도 차려오겠다던 밀러를 말리고서야 린느는 침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원래는 그도 함께 그녀와 로비로 향하려 했으나, 그만 서류 더미를 들고 나타난 알렉스에게 발목이 잡혀 집무실로 다시 향해야만 했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는 썼으나, 밀러는 입술을 깨물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망할 업무. 린느는 그렇게 밀러를 떼어놓고 연회 준비가 한창인 로비로 향했다.
“아, 아가씨! 몸은 괜찮으십니까?!”
“어머, 아가씨! 얘들아, 아가씨 오셨어!!”
연회장에서 묵묵히 일하던 사용인들이 하던 일도 멈추고 달려와 린느를 둘러쌌다. 그들의 눈썹은 울상을 짓고 있었고, 중년의 사용인들은 감기에 좋다는 음식들을 줄줄이 외우며 몸보신 음식을 해드리겠다 단합했다. 어린 사용인들은 잠도 안 자고 수발을 들겠다며 앞다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린느는 가슴 한쪽이 찡하게 울었다.
‘나만 빼고 다들 진심이구나.’
처음에는 이 넓고 낯선 대공저에서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이들과 단순 친해지기 위해서 한 줄 편지를 쓰고 함께 일을 했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들에게 진심을 주지 않았다며 자조했다. 동시에, 갈피를 잃었던 마음에 굳은 심지가 생겼다. 이젠 마음 놓고 진심 어린 관계를 맺어도 되겠다며 린느는 마음을 굳혔다.
“하루 푹 쉬고 났더니 이젠 정말 가벼워요! 저기 저 동상도 들 수 있어요!”
“아유, 조금 나아졌다고 무리하시면 큰일 나요!”
“맞아요. 그리고 이제 거의 마무리되어 가니 연회 일 전까지 건강에 힘쓰셔요. 저희가 최선을 다해 도와드릴게요.”
린느는 그들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뭐 얼마나 연회장이 모습을 갖췄을까 싶었지만, 그녀가 미리 정리해 둔 배치도대로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어 오히려 할 일이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때, 중앙계단에서 내려오던 넬 부인이 린느와 시선이 딱 맞았다.
“아가씨?”
넬 부인은 후다닥 내려오더니 사용인들 틈을 비집고 다가왔다.
“몸은 괜찮으신 거예요?”
“보다시피 멀쩡해요.”
“쓰러지기 전날에도 보기엔 멀쩡했거든요? 그런데 쓰러지셨잖아요.”
예리한 지적에 린느는 말문이 막혔다. 그때, 넬 부인이 곁눈질하며 주변을 살피더니 린느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누면 안 될까요? 급한 일이어서 죄송해요.”
그녀의 말에 주위에 몰려 있던 사용인들이 다시 하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돌아갔다. 넬 부인은 주변을 샅샅이 훑어보더니, 린느의 귀에 속삭였다.
“안나는 괜찮다던데 저는 영 찜찜해서요. 지금 프레이 아가씨께서 와 계셔요.”
“프레이 님이요?”
“네! 글쎄 미리안 아가씨께서 새벽에 프레이 아가씨께 초대장을 보냈답니다. 한창 연회 준비로 번잡스러운데 이 틈에 프레이 아가씨를 왜 부르셨는지 모르겠어요.”
그때 중앙계단으로 프레이가 내려오며 린느를 향해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