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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86화 (85/122)
  • @86화

    아직 집무실 주인은 코도 비추지 않았건만, 토트린은 벌써 집무실이 선사한 중압감에 압도되어 손에 땀을 쥐었다. 중도를 지킨 화려함에 선대에서부터 내려온 대공들의 손을 탄 집무실에서 일개 귀족들은 흉내 내지 못할 고풍스러움이 가득했다.

    “여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알았소.”

    토트린은 수건을 꺼내 이마를 스윽 닦았다. 그 꼴을 보며 알렉스는 통쾌하기는커녕 소름이 돋았으니. 자신이 모시는 주인의 혜안은 도대체 어디까지 닿는 건지 두려운 탓이다.

    “가, 각하는 언제쯤 뵐 수 있소? 시간이 촉박하여 그렇소.”

    “각하께서 대면에 응해 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아셔야 할 겁니다. 토트린 경.”

    알렉스의 타박에 토트린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시선을 피했다. 대공가에 사는 것들은 눈초리가 다 저렇게 매섭나 따지고 싶었으나, 그럴 용기는 티끌도 없어 입을 다물었다.

    덜컥.

    문 열리는 소리에 토트린의 어깨가 잘게 흔들렸다. 그는 허둥대며 문소리의 발원지를 찾아 나섰고, 머지않아 맹수처럼 이채를 띈 금안과 마주쳤다.

    “이 토트린, 제, 제국의 또 다른 태양을 뵙나이다.”

    밀러는 무심한 눈으로 토트린을 내려다보더니 입꼬리만 올려 픽, 웃었다. 그의 미소는 가히 송곳처럼 날카로웠으며, 체격은 웬만한 기사보다 건장했다. 저 주먹으로 한 대만 얻어맞아도 대공저 뒷마당의 무덤 신세를 못 피하겠구나 직감했으니. 토트린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오랜만이군, 토트린 경.”

    낮은 음성이 위협적으로 갈라졌다. 신경질적으로 흐트러진 흑발이 그의 흰 피부와 대조되어 흡사 흡혈귀와 비슷했다. 토트린은 마음속으론 그의 인사에 대답했으나, 입 밖으론 끙 앓는 소리만 겨우 나왔다.

    “아무런 기미도 없이 얼굴을 마주할 만큼 편한 사이라 생각한 적은 없는데, 그대가 우리 관계를 그쯤으로 높이 샀으니, 응당 대면에 응했다.”

    “여, 영광입니다, 각하.”

    “하나, 별것도 아닌 일로 내 단잠을 깨운 거라면 각오해야 할 터.”

    밀러는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거만하게 그를 내려봤다. 그의 호출로 새벽에 겨우 잠든 린느를 깨운 게 짜증이 올랐다. 침실에서 저를 기다리는 린느가 눈에 밟혀 토트린을 망가트리고 싶단 충동마저 올랐으니. 밀러는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토트린을 빤히 응시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무언의 명령이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하오나….”

    “송구할 말씀은 안 하는 게 낫지.”

    시작부터 말문이 턱 막히자, 토트린은 숙였던 고개를 차마 들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분명 대공저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저렇게 구슬려 보자는 포부가 있었는데, 막상 그와 눈을 마주치자 야산에서 맹수를 맞닥뜨린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답답했다. 나아가, 미쳤다고 이 무덤에 제 발로 들어왔는지 아까의 자신을 뜯어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대가 꼭두새벽부터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구나.”

    “제, 제 딸이 잘 지내는지 근심이 쌓여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했나이다. 벌써 몇 달째 연락이 닿질 않고 있으니, 아비 된 자로서 딸의 얼굴은 확인해야 할 듯하여……!”

    “그대의 딸을 왜 내게서 찾지?”

    “예……?”

    토트린은 눈을 끔뻑거리며 밀러와 시선을 맞췄다. 바보처럼 멍하던 눈매가 굽이쳤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미리안 토트린. 제 딸아이는 대공저에….”

    “토트린 가문의 미래가 심히 염려스럽군. 가주란 자가 계약서를 읽지도 않고 도장부터 찍나? 성미하고는.”

    밀러는 뜨거운 찻물을 삼키며, 빠짐없이 토트린의 안색을 살폈다. 곧 죽을상인 게 조금은 마음에 드는 표정이었다.

    “우매하군.”

    “하, 하오나 도무지 무슨 말씀이온지 모르겠나이다. 미리안이 제 딸이 아니라니요……! 젖먹이부터 애지중지 먹여 키운 딸입니다. 토트린 가문에 딸이라곤 그것 하나뿐이건만……!”

    “이러니 제국의 광대들이 설 자리가 없지.”

    그는 오만한 눈으로 토트린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쏘아보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미리안 토트린. 그런 이름은 토트린 가문에 존재하지도 않던데? 그냥 미리안이라면 몰라도.”

    토트린은 미리안을 귀족의 이름으로 곱게 키우기 싫다며, 미리안에게 토트린이란 성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니, 미리안 토트린이란 이름은 처음부터 존재할 리가 없었으니. 토트린은 입술을 달싹였다.

    “하, 하오나 지금은 존재하옵니다! 그게 중간에 일이 꼬이는 바람에 아주 잠깐 누락되었을 뿐입니다!”

    “아주 잠깐의 누락이 20년인가? 미리안에게 성이 생긴 지 고작 2주 안팎이던데. 아, 그쯤이면 내가 황궁 연회에 참석한 후로군.”

    토트린은 희게 질린 얼굴로 입술과 눈꺼풀을 떨었다. 어디까지 간파당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아 죽음의 냄새를 맡은 사람처럼 간담이 서늘해졌다.

    분명, 그가 처음 밀러를 마주했을 땐 파리한 안색에 뭐에 홀린 사람처럼 미리안을 데려가려 하지 않았던가. 사실 홀렸다기보단 죽은 어미와 재회한 어린 공자처럼 눈동자를 떨며 미리안을 데려갔으니, 토트린은 호구 잡았노라 했었다.

    게다가 그 당시 소문에 의하면 대공은 대공저에서 은거하며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 산다고 하였으니, 토트린은 대어를 낚았다 여겼었다. 어디 그뿐일까? 그가 건넨 계약서에는 토트린의 눈이 돌아가고도 남을 조건들이 줄줄이 적혀 있었으니, 추후에 오늘날 같은 일이 발생할 거라 생각지도 못했다. 토트린은 과거의 자신을 책망하고 또 책망했다.

    ‘안일했다. 안일했어.’

    미리안에게 홀딱 반해서 앞도 뒤도 따지지 않고 시녀라는 명목으로 곁에 둔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호구 잡힌 건 밀러가 아니라 자신이었던 셈이다.

    “설마 고작 이 말을 하려고 내 잠을 깨웠는가?”

    밀러가 사납게 토트린을 다그치자, 그는 바싹 탄 입술을 축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에서 물러나면 미리안은 당연지사고 어쩌면 대공을 능욕했다며 목숨까지 내놓고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정신을 바짝 차리겠노라 다짐하며 입 안 살점을 꽉 깨물었다.

    ‘작전을 바꿔야겠구만. 망할…….’

    이젠 거래물이 뒤바뀌었다. 미리안에서 토트린, 자신의 목으로. 그는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하, 하이레니아 후께서 이, 이, 일을 도모하고 있나이다!!”

    토트린은 무릎을 바닥에 꿇고 이마를 바닥에 콱 찍었다. 거래물이 자신의 목으로 바뀌자, 단번에 태세를 바꾼 것이다. 밀러는 그런 그를 보며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얼마 전 하이레니아 후께서 저를 후작저로 초대하셨나이다!! 그, 그 자리엔……. 락센! 그래, 락센 경이 함께하였고! 제게 미리안을 대공저에서 빼 오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저 같은 일개 백작놈이 무얼 알겠나이까! 하라면 해야 하는 처지이읍죠!”

    “그래서 하라는 대로 내 저택에 발을 들였다?”

    바닥에 입을 맞출 기세로 머리를 조아리던 토트린이 상체를 들었다.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제가 겁이 많아 그런 삿된 자들과 어울렸나이다! 저, 절대 대공 각하께 위해를 가하고자 한 뜻은 티끌에 터럭조차 없습니다! 여신께 맹세도 할 수 있습니다!”

    밀러는 기다란 다리를 꼬며, 그를 빤히 응시했다. 토트린은 그의 시선에 숨을 뺏길까 허겁지겁 숨을 들이쉬며 뒤룩뒤룩 살찐 몸을 파르르 떨었다. 태어나 그가 하던 짓이라곤 간 보는 것과 눈치 살피는 게 대부분이 아니었던가. 정말 이 자리에서 죽어 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처절하게도 몸을 숙였다. 하지만 밀러는 그의 몸부림을 달가워하거나 기꺼워하지도 않고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 그리고 말씀입니까?”

    “말할 게 더 있을 텐데.”

    토트린의 눈동자가 난잡하게 굴러갔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눈치채고 던진 말인지 알 수가 없어 그는 암담했다.

    “그, 그것이……. 그러니까, 그것이…….”

    설마, 미리안의 납치를 사주한 이들이 밀러에게 잡혔을까? 하지만 잡혔다 하기엔 말이 맞지 않았다. 기민한 대공저 사람들이 용병의 존재를 깨닫고 잡아 죽이거나 납치해 고문하여 누가 사주했는지 알아낼까 싶어, 토트린은 매일 용병들의 수를 파악하고 있었으니. 그 문제만큼은 들키지 않았을 거라며 자부했다.

    “없나이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하나라도 더 있었으면 죽이려고 했거든.”

    “절대 없습니다! 있다면 제 목숨을 내놓지요!”

    “그래서 하이레니아 후는 무얼 얻고자 그대를 내게 보냈을까. 난 그게 더 궁금한데.”

    밀러의 물음에 토트린은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밀러의 앞이니 삿된 자들이라며 하이레니아와 락센을 욕하긴 했으나, 그렇다 하여 무작정 그들과 척지기엔 또 위험하지 않겠는가. 살살 머리를 굴리며 토트린은 빠져나갈 길을 궁리했다. 그때, 밀러가 툭 빠져나갈 길을 던져 줬다.

    “그대 영지 근처에 하이레니아 가문 이름으로 광산 두 개가 있는 걸 알아. 아마, 그걸 준다며 그대의 눈을 가리려 들었겠지. 안 봐도 뻔해.”

    밀러는 품에 있던 시가 케이스를 테이블 위로 쾅 내려놨다. 그에게 간파당한 게 놀라워서인지, 케이스가 테이블을 치며 내는 소음에 놀란 것인지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토트린은 꼴사납게 몸을 파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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