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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85화 (84/122)

@85화

‘계약’ 결혼에 거부감이 들었다. 계약이란 건 결국 깨질 수밖에 없기에, 린느는 속이 아렸다. 더불어, 어젯밤 이랑처럼 제게 몰아친 파도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다신 갖지 못할 수도 있단 생각에 눈앞이 아찔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단 말을 뼛속이 에도록 겪어 온 린느였다. 끝만 겪어 온 그녀에게 시작이 두려울 수밖에.

‘어렵다, 진짜. 차라리 내가 이 원작을 몰랐더라면 밀러, 당신을 믿는 게 지금보단 쉬웠을까?’

만약 그랬더라면, 쉬이 그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사랑했을지도. 린느는 연기를 마신 듯이 속이 답답했다. 밀러로 인해 아프긴 두렵지만, 사랑은 하고 싶고. 사랑은 하고 싶은데 아플까 두려워 눈치만 보고 있는 꼴. 그래서 어젯밤 그와 그저 하룻밤 즐긴 거라 여기려 했는데, 그러기엔 이미 밀러는 린느에게 너무 큰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좋겠냐고 물어볼 사람도 없는데. 어쩌면 좋을까?’

친부모들조차도 사랑한다는 그 말을 책임지지 못해 그녀를 버리고 떠났다. 이 낯선 땅에서 마주친 저 대단한 남자가 또다시 그녀를 버리지 않을 거란 보장이 어디 있을까? 어디서 어떻게 보장받아야 할까? 린느는 헛웃음을 뱉었다.

‘보란 듯이 잘 먹고 잘살겠다던 계획안에 밀러는 없었어. 계획대로 하면 돼.’

부모에게 버림받은 이후로 관계에 대한 기대는 내려놨었다. 그러니까, 어차피 내려놓은 거 다시 줍지 말고 쭉 내려놓자 다짐했다. 그때, 그녀가 덮은 이불 위로 두루마리 서류가 놓였다.

“미안해. 그사이에 일어날 줄 알았으면 이깟 서류 조금 이따 가져올 걸 그랬어.”

그의 정중한 사과에 린느는 왠지 눈가가 시렸다. 이렇게 다정하게 굴다가 떠나면, 이곳에서 어떻게 살까 막막하기까지 했다. 그때, 세르트 경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보고 싶다.’

처음 눈을 떴을 때부터 줄곧 그녀의 편이었던 사람. 앞으로도 쭉 자신의 편일 사람. 설령, 그의 다정한 부정의 대상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린느일지라도……. 린느는 울컥 솟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도 연회 일에 모셔도 될까요.”

밀러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더니, 침대에 걸터앉았다. 울음 섞인 그녀의 목소리에서 다리가 풀린 탓이다. 그녀의 울음이 자신의 탓인지 곱씹어 생각을 되뇌었다. 간혹, 초야를 치른 신부가 신랑이 마음에 들지 않아 눈물로 밤을 지새운다던데. 밀러는 숨 쉬는 것마저 잊고 그녀를 바라보다 짧은 탄식을 뱉었다.

“세르트 백작저로 갈 초대장은 이미 보내고 없어. 제일 먼저 보냈으니까.”

“……네.”

그녀의 짧은 대답이 그의 속을 더 뒤집었다. 차라리 자신의 뺨을 내려치는 게 덜 힘들 테지. 밀러는 죄인의 얼굴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녀의 눈치만 살폈다. 하지만, 린느는 말없이 계약서를 바라볼 뿐이었다. 종이에 불과한 계약서를 린느는 꼼꼼히도 살폈다. 진작에 그녀의 이러한 성정을 알고 있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꼼꼼했다. 계약서에 담긴 내용을 포크로 찍어 먹을 것처럼 청록색 눈동자가 하나하나 살폈다. 그때만큼은 아까의 울음 섞인 눈망울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또랑또랑한 눈동자가 ‘계약’이란 단어에서만큼은 눈에 띄게 뚝뚝 멈춰 섰다.

“기간은 한 달로 할래요. 더는 대공님과 엮이고 싶지 않아요.”

린느는 계약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손해 보는 건 자신이라 여겼다. 기간이 늘어난단 소린 그에게 품은 정이 더 커진다는 뜻일 테니까. 반대로, 저 남자가 제게 품은 맹목적인 사랑의 유통기한은 끝을 달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러기 전에 끝을 내는 게 맞다며 홀로 단언했다.

“린느.”

낮은 음성이 부탁하듯, 그녀를 잡아끌었다. 하지만, 린느는 말없이 계약서만 바라볼 뿐이었다. 린느는 그에게 속을 들킬까 봐, 혹 눈물이 흐를까 봐 그와의 눈 맞춤을 피했다. 하지만, 이 영악한 남자는 그녀의 눈을 보지도 않고 알아차렸다. 자신이 그녀에게 또다시 큰 실수를 범했다고. 그는 자신의 잘못을 자각하자마자, 거침없이 저질렀다.

“사랑해.”

그제야 그녀의 놀란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그것도 잠시, 린느의 눈매가 금세 화가 난 듯 미간을 좁혔다. 어쩌면 저렇게 맥락 없이 사랑을 외칠까 싶어 짜증이 났으나, 그와 시선을 맞추자 짜증마저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사이 밀러는 그녀가 쥐고 있던 계약서를 미끄러지듯 잡아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툭.

그는 계약서 대신에 그녀의 손에 자신의 뺨을 얹었다. 저깟 계약서가 아니라 자신을 보란 듯이, 그의 금안이 그녀에게 속을 내놨다. 부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 얼마나 진심 어린 사랑인지 알아달란 듯, 그는 그녀에게 발가벗겨진 자신의 사랑을 전시했다. 격정적이지도, 활활 타오르지도 않았으나 나른하게 뜨인 금안에선 고요한 진심이 느껴져 린느는 감정이 울컥 쏟아졌다. 린느는 그의 뺨을 느릿하게 어루만졌고, 그는 기꺼워하며 그녀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진한 입맞춤과 함께 금안이 린느에게 무얼 믿지 못하냐며 다그치듯 사랑을 외쳤다.

그의 사랑 고백은 주문처럼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한번 거절당한 사랑은 두 번 세 번으로 늘어나 린느를 사랑에 파묻었다. 그의 고백은 린느의 발등과 손등. 눈꺼풀 위로 흰 목선 위로.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입맞춤과 함께 쏟아졌다. 그는 손에 깍지를 끼워 다정하게도 그녀를 제 안에 가뒀다. 두 사람의 움직임은 고요한 호수 같다가도 순식간에 불이 붙어 거대한 해일처럼 서로를 탐했다.

“사랑해.”

고작 하루 침실에서 함께한 것뿐인데도, 린느는 귀에서 ‘사랑해’라는 말이 환청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머리를 빗겨 주며, 슬리퍼를 신겨 주며, 잠옷 위로 이불을 여며 주며, 차를 따라 주며 종일 사랑을 외쳤다. 중간에 안나가 린느를 찾아왔으나, 밀러가 그녀를 돌려보내며 하루만 쉬도록 두라는 명령도 얹었다.

달칵.

안나를 돌려보내고 다시 침실로 돌아오자, 린느가 못마땅한 얼굴로 밀러를 바라봤다.

“사랑….”

“사랑한다는 말 좀 그만해 둬요. 알았으니까.”

“그대가 의심이 좀 많아야지.”

“합리적인 의심이었어요.”

과거형으로 끝난 그녀의 대답이 퍽 만족스러운지 밀러는 유려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닳지도 않는 거,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아껴 둔 거 같아. 사랑해, 린느.”

린느는 잘게 고개를 저으며 이불 속을 파고 들어갔다. 그러자, 밀러는 베개 밑으로 팔을 넣어 그녀를 꼼짝없이 가뒀다. 사춘기 아이들처럼 별거 아닌 일에도 침실 안에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 * *

린느가 과로하여 쓰러졌단 말에 안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간 무리하긴 했으나, 과로라니. 하녀장씩이나 되어서 그녀의 몸 상태를 부지런히 살피지 못한 거 같아 마음이 쓰렸다.

“아가씨?”

복도 끝에 미리안이 손을 가지런히 모아 두고 서 있었다. 안나는 걸음을 재촉해 미리안에게 다가갔다.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린느 님은요?”

안나는 소리 없이 흠칫하더니 눈치를 살폈다. 분명, 린느는 대공저 안방에 있을 텐데 이를 미리안에게 말해도 될지 퍽 걱정스러웠다. 괜한 말이 나올까 염려스러운 탓이다. 그때, 미리안이 안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린느 님이 요즘 일이 고되셨잖아요. 그래서… 걱정이 되어서요. 정찬실에도 나오지도 않으시구…….”

안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차피 이 일을 비밀에 부치라는 밀러의 명령도 없었으니 사실을 말해도 이상할 게 없다. 게다가, 미리안과 린느의 사이야 돈독하기 그지없으니 괜한 일도 없을 터. 안나는 걱정을 얹어 말했다.

“맞습니다. 실은 아가씨께서 가벼운 몸살에 걸리셨답니다. 그래서 지금 휴식을 취하고 계시지요. 아마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라 하셨으니, 금방 털고 일어나실 거예요.”

“몸살이요……? 하지만, 린느 님은 방에 계시지 않던데……. 혹시 의원이라도 찾아가신 건가요?”

“아가씨께선 더 따듯하고 안전한 곳에 계세요.”

“그곳이 어딘데요……?”

확답을 듣기 위함인지, 미리안의 물음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안나는 잠시 시간을 두고 예의 있게 답했다.

“대공 각하께서 직접 아가씨의 수발을 들고 계시니 걱정하실 일 없으실 겁니다. 아가씨, 제가 방까지 모셔드릴게요.”

미리안은 자리에 굳은 채로 복도 끝 집무실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응시했다. 병을 수발한다니, 밀러가 직접 수발을 든다니. 미리안은 참을 수 없는 불안감에 헛웃음을 삼켰다. 그녀는 뒤늦게 안나를 따라나섰고, 2층 방에 도착해 방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도 평소와 다름없이 말이 없었다. 안나는 하녀장으로서 일과를 마치고, 당직 사용인들의 새벽 참까지 신경 쓴 후에야 방에 들어섰다. 이 긴 하루도 끝났구나 싶었으나, 꼭두새벽부터 불청객이찾아왔다.

“하녀장 님! 바깥에 손님이 오셨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애커먼 경께서 말씀을 나누고 계시긴 한데…….”

창밖엔 이제야 동이 트고 있었다. 제국의 황제조차 대공저에 들를 땐 미리 서한을 보내는 게 법도이건만, 도대체 어떤 작자가 이런 무례를 끼치는지 안나는 머리가 저릿했다.

“바로 나가 볼 테니, 침착하게 하던 대로 해.”

“네!”

안나의 간단명료한 명령에 하녀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안나는 어서 옷을 차려입고 머리를 매만진 뒤 다급히 대공저 1층 로비로 향했다. 1층 로비가 가까워질수록 떠오르는 해가 대공저를 환하게 비춰 눈이 부셨다. 그리고, 로비에 도착했을 땐, 처음 보는 중년의 남자가 떡하니 서 있었다. 인사할 틈도 없이, 그는 알렉스와 집사장의 안내를 받으며 대공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올 것이 왔구나.’

안나는 곧장 방향을 틀어, 미리안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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