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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84화 (83/122)

@84화

“집무실이랑 침실이 이어져 있어요?”

“응. 잠만 자고 일하라는 선조의 뜻이지.”

거참 무서운 분들일세. 린느는 괜스레 침대 반대편에 시선을 돌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마음의 준비는 했으나, 이렇게 빨리 침실을 보게 될 줄은……. 그는 캐노피 침대에 달린 커튼을 살짝 열더니, 린느를 침대에 앉혔다.

“창문 커튼만 닫고 올게.”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와 손을 잡고 침실에 입성한 후로, 뇌우조차 잊은 지 오래였다. 이대로 태풍이 대공저에 몰아쳐도 겁나지 않을 만큼, 린느의 시선은 밀러의 손끝에만 달렸다.

그는 캐노피 침대에 달린 커튼을 조금 더 열더니, 린느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분명, 한 방에서 밤을 지새운 게 벌써 세 번째이건만. 전과는 비교하지 못할 만큼 심장이 쿵쾅거렸다. 밀러는 옆태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대의 속을 헤아릴 수가 없어. 함부로 그대의 속을 헤아리려던 내 잘못도 있겠지만.”

밀러는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상체를 숙여, 린느를 올려다봤다.

“그대의 허락이 없으면 난 오늘도 뜬눈으로 지새울 거야. 여태 그래 왔던 것처럼.”

그제야 린느의 시선이 밀러에게 닿았다. 그는 그 오만한 얼굴로 상체를 다시 꼿꼿하게 펴며 린느를 빠짐없이 바라봤다.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린느도 고개를 들어 기꺼이 시선을 맞췄다. 유난히 시끄럽게 굴던 초침 소리는 진작에 얌전해졌으며, 바깥에서 내리치는 빗소리도 잔잔하게만 들렸다. 낯설게 느껴지던 오감이 두 사람만을 위한 것처럼 고요하면서도 색정적으로 흘러갔다.

“린느.”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금빛 눈동자가 그녀의 두 눈을 번갈아 보더니, 그녀의 입술에 시선을 멈췄다. 마치, 그녀의 입을 당장이라도 삼킬 것처럼 위험한 시선이 이어졌고, 달뜬 숨이 서로를 달궜다.

그때, 린느의 입술이 밀러의 아랫입술을 먼저 삼켰다. 그러자 기다렸단 듯이 그의 커다란 품이 린느의 여린 몸신을 야릇하게 감싸 안았다.

쏴아아.

굵어진 빗발에도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를 탐했다. 무엇으로도 해갈할 수 없어 마시길 포기했던 자들이 맑은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서로의 달궈진 숨을 들이켰다. 풀어진 셔츠 사이로 조각처럼 잘 짜인 근육들이 그의 숨에 맞춰 움직였으며, 그녀의 드레스 끈이 헝클어졌다. 서로가 원하는 목적은 선명히 같은 것을 향했으나, 품은 뜻은 약간 달랐다.

밀러는 그녀에게서 진심을 품었지만, 린느는 그저 그의 몸을 품었다. 온몸이 녹아내릴 것처럼 달콤한 쾌락에 린느의 눈이 반쯤 감긴 채로 그를 향했다. 도톰한 입술을 슬그머니 깨물었다가, 가볍게 빨아 넘기며 그를 자극했다.

주욱.

등 뒤로 자그마한 지퍼가 그녀의 척추선을 간지럽히며 천천히 내려갔다. 갈라진 옷 사이로 찬 바람이 불어 린느의 입술이 뚝 멈췄다. 다음은 그의 손끝이 닿을 듯 말 듯, 그녀의 허리를 훑어내렸다. 눈앞이 희게 질릴 만큼 야릇한 쾌락에 밀러의 뺨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끝이 풀렸다. 녹아들 것 같았던 몸이 기어코 그의 손끝 한 번에 녹아내렸다.

그녀의 입술에서 자유를 얻은 그의 입술이 목선을 따라 얕은 입맞춤을 새겼다. 정중하고도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그의 뜨거운 숨이 머리칼과 빗장뼈에 닿자 앓는 소리가 절로 새었다. 그는 그녀의 흰 피부에 쪽쪽 입을 맞추며 사랑을 고백했다. 반면, 린느는 그의 입맞춤에 사랑보단 쾌락을 취했다.

꺼지지 않는 불처럼 그는 쉴 틈 없이 몰아쳤다. 어느 때는 잔잔한 파도처럼 그녀를 침식시켰고, 어느 때엔 숨 쉴 틈만 두고 빠듯하게 조여 왔다. 린느는 그의 몰아침에 힘없이 휩쓸리면서도 그가 선사하는 쾌락을 빠짐없이 취했다. 그편이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머리 아픈 계약이고 앞날이고 뭐고 간에, 미래의 린느에게 맡기고 현재는 그와의 밤에 집중하고자 했다. 그의 입술이 흰 살결에 닿을 때마다 온몸이 움츠러들다 파르르 떨렸다.그사이에 그녀의 드레스는 주인을 잃었고, 린느는 항의할 틈도 없이 그에게 다시 쓰러졌다.

“린느.”

그의 커다란 손이 살결을 그러쥐자 허리가 바짝 굳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긴장감을 삼켜 내듯 얇은 살갗 위로 진한 입맞춤을 남겼다. 린느는 그가 남긴 모든 게 다 버거워져 달뜬 숨을 뱉어 내며 숨을 골랐다. 그때, 그의 금안이 무척이나 오랜만에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머리가 길었어, 그때보다.”

호텔 방에서 함께한 지난 밤엔 그녀가 내어준 품이면 충분했다. 지금처럼 대공의 침실이면 모를까 타지에서 그녀와 사랑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그녀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귀 뒤로 넘겨 줬다. 손끝에 머리칼이 스칠 때마다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참을 수 없는 충동이 온몸을 달궜고, 또 달군 탓이다. 여차하면 이성이 끊길 만큼 달콤한 향기가 그녀에게서 뿜어져 탄성이 입에 맺혔으나 삼키길 여러 번. 온갖 충동에 휩싸여 잠길 때쯤, 그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말괄량이 같으니라고.

도대체 무슨 생각에 이렇게 예쁘게 웃는지 궁금했으나, 묻진 않았다. 장난기 어린 그녀의 미소가 예쁘긴 해도, 장미처럼 가시를 세우고 찌른 적이 한두 번이던가? 어쩌면 저 여인은 속으로 지금의 이 사랑조차 의심하고 있을지도 모르며, 계약 결혼을 앞두고 잘하는 짓이라며 배려 없는 대공이라며 조소를 뱉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밀러는 이 여인의 속을 알기보단 덮기로 다짐했다. 그때, 그의 목에 하얀 두 팔이 감겼다. 허락이었다.

“…….”

상관없어. 그녀가 자신을 무어라 생각하고 판단해도 어차피 결과는 똑같을 테니까. 그녀에게 품은 진심은 무슨 일이 있어도 번복되지 않고, 불변할 테니까. 말로 쫑알대기보단 행동으로 보여 주겠노라 다짐하며 그는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포개며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려 웃었다.

“그대에게서 달콤한 향기가 넘실거려, 알고 있나?”

계약 결혼? 시작이 계약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한가. 결국 결혼이란 것도 종신 혼인 계약이 아니던가? 그러니, 계약 결혼과 결혼은 그에게 다를 게 없었다. 밀러는 그녀의 덫에 일부러 발목을 내어줬다. 그렇게 발목이라도 잡혀야, 불쌍한 먹잇감 한 번이라도 더 돌아봐 줄 테니까. 린느라면 동정이든 연민이든 한 번은 돌아서서 덫에 물린 발목을 봐 줄 테지.

어둠 속에서 금빛 눈동자가 안광을 뿜으며 그녀의 품에 도달했다. 그때마다 젖은 눈으로 올려다보는 청록색 눈동자가 그를 미치게 했다. 초야에 일을 치겠구나 싶을 만큼, 평생을 무정과 무심으로 산 남자를 미치도록 애달프게 만들었다. 심해에서부터 시작된 지진이 그를 난도질하며 그 생채기마다 린느를 새겼다.

“처, 천천히……!”

안다, 알아. 천천히 해야 한다는 것은 퍽 알겠으나, 몸과 마음이 고집을 부렸다. 밀러는 잇새로 흐르는 흥분을 삼키며, 나지막이 으르렁댔다.

“분부 받들지.”

어느새 창밖으로 먹구름이 걷히고 달빛이 침대에 쓰러졌다. 자신의 그림자 안에 가둬진 여인의 몸신은 가느다랗고 사랑스러워 견디기가 곤욕이었다. 대공으로 살면서 더러운 꼴도 많이 봐 왔으나, 적잖이 아름다운 것도 보며 누리며 살아온 터였다. 하나, 제 그림자에 갇힌 린느는 아름답길 초월하여 황홀경을 선사하고 있으니. 그가 놓친 탄성이 잇새로 흘렀다. 곡선이 진 그녀의 몸신에 입을 맞추며 존경을 표했고, 감사함과 사랑을 남기며 그녀의중심으로 점차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눈치 빠른 여인이 할딱 숨을 들이쉬었다.

상체를 숙여 그녀의 귀여운 잔머리가 앉은 이마에 입을 맞췄다. 살갗이 닿을 때마다 그녀의 작은 몸이 흠칫 놀랐다. 그때마다 그는 더 천천히 잔잔한 물이 간지럽히듯 움직이려 애를 썼다.

“흣……!”

새된 소리에 그의 짙은 눈썹이 움찔했다. 금안이 그녀의 표정과 안색을 살피며, 그의 굵은 몸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물 흐르듯이 유연한 움직임에도 침대가 크게 울었다. 그리고 린느 역시 울었다. 그녀가 울며 찾은 게 침대 시트라는 점이 퍽 안쓰럽고도 죄스러워, 그는 서둘러 그녀의 손가락 마디 사이 사이에 손가락을 쥐여 줬다.

그녀에게서 눈물을 보려고 한 게 아니거늘. 그가 죄스러움에 표정을 굳힐 때쯤, 그녀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그림자에 덮여 잘못 본 걸까 싶었으나, 선명한 미소였다. 그제야 그는 마음을 놓고 허리를 올려 쳤다. 야릇한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고, 움직일 때마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가 몸에 밸 듯이 가득 차올랐다. 밀러는 나른한 미소로 그녀를 안정시켰다.

하지만 그의 그런 배려에도 린느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그를 퍽 버거워했다. 린느는 달이 스러질 때쯤에야 그의 품에서 풀려날 수 있었고. 눈을 뜨니 정오가 훨씬 지난 시간이었다.

* * *

린느는 어느새 깨끗하게 씻겨진 몸과 단정하게 입혀진 잠옷을 보며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의 제안대로 고작 계약 결혼일뿐인데도 그는 어제 사랑을 보여 줬다. 린느는 그의 사랑을 외면하고 쾌락만 취하고자 몸부림쳤으나, 결국 해가 뜰 때쯤엔 그의 사랑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밤사이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그의 의지대로 움직인 적이 없었다. 눈치 빠른 남자는 그녀의 표정만 보고도 무얼 원하는지 귀신처럼 알아채어, 충실히도 움직였으며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엔 사랑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쾌락만을 취하고 싶어도, 그의 사랑과 진심을 외면하고자 했어도 모조리 실패했다. 린느는 어제 그의 입맞춤을 떠올리며 마른세수했다.

‘이럴 거면 계약 결혼은 왜 하자는 거야. 아니면 정말 혼인을 원하는 거야? 진심으로? 하지만… 나와의 결혼을 원했다면 계약 이야기는 왜 한 거야, 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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