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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83화 (82/122)
  • @83화

    린느는 벙찐 얼굴로 밀러를 바라봤다. 이 남자가 제게 뭐라 말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사고를 정지하고 그의 입술만 빤히 응시했다.

    “그게 싫다면 대공비라는 자리도 있어.”

    청록색 눈동자가 당혹감을 머금은 채 오만한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서 멈췄다.

    “아니 지금 이게 다 무슨 소리예요…? 배, 백작비요? 대공비는 또 무슨…….”

    “그대가 대공비가 싫다면 내가 그대의 백작비가 되어야겠지.”

    “저한테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어요?”

    “난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그대의 곁에 있고 싶어.”

    “정말 그렇게까지요? 너무 맹목적이지 않아요?”

    “난 이렇게까지 그대에게 맹목적이야.”

    린느는 결연에 찬 금안을 이해할 수 없단 듯이 바라봤다. 그가 하루 이틀 고민해서 뱉은 말은 아닌 듯해, 린느는 입을 다물고 고민에 빠졌다.

    “오래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나라면 당장 대공비가 되겠다 할 텐데.”

    “전 작위에 욕심 없어요. 백작이면 딱 맞죠, 뭐. 그것보다 당황스러운 건, 대공님의 프러포즈예요.”

    “프러포즈?”

    “예, 프러포즈! 대공비가 되어달라 혹은 그대의 백작비가 되겠단 뜻은 곧 결혼하잔 소리 아니에요?”

    “맞아. 난 그대와의 결혼을 꿈꿔. 그대처럼 사랑스러운 사람과 함께라면, 나도 행복이란 걸 곁에 둘 수 있지 않을까 욕심이 나서 꿈꾸게 되거든.”

    그의 잔잔한 고백은 달콤하면서도 어딘가 쓰디쓴 맛이 났다.

    “행복해지고 싶은 건 사람의 본능이니까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정말 확신해요? 저와 함께라면 행복해질 수 있을 거란 그 마음이요.”

    “확신해. 그대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자신에게서 행복을 확신한다니, 린느는 밀러의 대답에 미간을 좁혔다. 그의 맹목적인 사랑이 진실한 사랑인지, 사랑이란 가면을 쓴 소유욕인지 알 수가 없기에. 그녀는 가시를 세워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밀러는 그녀의 가시마저 품을 듯이 말을 이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결혼을 물러 줄게.”

    “……이미 한 결혼을 어떻게 무른담.”

    “계약 결혼을 하잔 뜻이야. 내가 그대의 진심까지 탐낸다면 양심도 없는 거겠지. 하여, 제안하는 바야.”

    상처를 받을 만큼 그에게 흔들린 게 사실이었나 보다. 계약이란 말에 린느의 가슴이 쿵 하며 울렸다. 그가 자신의 진심까지 탐낸다면 양심 없단 말도 그럴싸한 포장지라 여기며, 린느는 표정을 굳혔다.

    “받아 보지도 않고 거절하진 말아 줬으면 하는데.”

    그녀의 속을 꿰뚫는 듯한 그의 말에 린느는 미끄러지듯 샴페인 잔을 바라봤다. 그가 한 말들을 곱씹자, 린느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샴페인 잔을 3잔이나 비웠고, 비워진 잔을 채우는 건 오롯이 밀러의 몫이었다. 그는 유능한 보좌관처럼 그녀의 빈 잔을 얌전히도 채웠다.

    “계약 기간은요?”

    “그대가 원하는 대로.”

    “……그래요. 전 손해 볼 게 없으니까 하죠. 어차피 아버지께선 제게 혼인하지 않아도 된다 약속해 주셨고, 저도 딱히 혼인할 마음도 없으니까요.”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은 태연하게 잘도 움직였지만 린느는 빈속에 독주를 마신 것처럼 마음이 아렸다.

    ‘맹목적인 사랑 웃기고 있어. 결혼이면 결혼이고, 연애면 연애지 계약 결혼은 뭐야. 뭐긴 뭐야……, 우리 사이가 딱 그만큼이란 거지. 여지 남기는 사이.’

    자로 잰 듯, 일 처리에 똑 부러지도록 능한 남자가 굳이 계약 결혼을 들먹인 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린느는 그의 성정을 잘 알기에 더 속이 아팠다. 그리고 제 속이 이렇게 아픈 걸 보아하니, 짝사랑은 밀러가 아니라 자신이 하고 있다 여겨져 더 침울했다. 린느는 표정을 지우고서,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대공님은 저와 상황이 다르지 않나요? 계약 중에 저한테 소박이라도 맞으시면, 잃을 게 산더미일 텐데.”

    “맞을지 안 맞을지도 모를 내 소박까지 그대가 고민해 주는군.”

    “…전 정말 모르겠네요.”

    당신의 속을 정말로 모르겠어. 린느는 말을 삼키기 위해 샴페인을 입에 털어 넣었다.

    “해 보고 고민하는 게 어때? 그대의 말대로, 그대가 손해 볼 건 없는 일이지.”

    지난날, 그가 건넨 사과와 고백이 남긴 잔잔한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았건만. 오늘은 감당키 힘든 커다란 파도마저 안겨 줬다. 그 파도는 그의 성정을 닮아 그녀의 뿌리마저 뽑을 기세로 쉴 틈 없이 린느에게 몰아쳤다.

    “알았어요. 대신에 계약서를 쓰는 게 어때요? 후에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세르트 경이 이 모습을 보면 그대의 신중함을 크게 칭찬하겠어.”

    “왠지 비꼬는 거 같은데.”

    “전혀. 날이 밝는 대로 알렉스에게 격에 맞는 계약서를 짜 오라 해 둘 테니 걱정하지 마.”

    “걱정은 무슨요. 오히려 걱정은 대공님의 것이 아니겠어요?”

    린느는 일부러 얄밉게 입꼬리를 바짝 올려 웃어 보였다. 그의 속을 뭉텅뭉텅 앗아 갈 만큼 귀여운 미소였으니. 밀러는 제 속이 타는 줄도 몰고 그녀의 미소에 홀려 웃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린느 역시 자신이 짓는 미소로 속이 타들어 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속을 숨기고서, 잔을 부딪쳤다. 말없이 또 잔을 채우고, 다시 잔을 기울던 그 찰나에 창문 밖이 대낮처럼 훤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이 무너지듯이 천지가 진동했다.

    콰과광.

    소리 없이 찾아온 뇌우가 그녀의 온몸을 석고에 넣고 굳혔다. 창문에서 눈을 떼고 싶었으나, 그 잠깐 사이에 어둠에 잠식된 것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차게 식어 가던 오른뺨에 생기를 머금은 심장이 쿵쿵 울렸고, 뻣뻣하게 굳은 허리에 힘이 풀렸다.

    “괜찮아. 괜찮아, 린느.”

    순간, 깊은 물에 침식되어 가던 몸체가 단번에 지상으로 끌어 올려진 것처럼 주변의 소음이 귀에 닿기 시작했다. 그의 심장 소리를 시작으로 걱정 어린 목소리까지. 그 끝으로 쏟아지는 빗소리와 천둥소리가 한데 섞여 난장을 부렸다.

    “아무 일도 없어. 창문을 닫으면 비도 들어오지 못해. 커튼을 치면 저 번개도 보이지 않아, 린느. 그 어떤 것도 그대가 있는 곳까지 닿을 수 없어.”

    그의 위로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그녀의 손가락에 힘이 실렸다.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살겠다고 그의 팔뚝을 잡아끌었다. 어찌나 간절한지, 밀러는 속이 타듯 아팠다. 제국은 지역적으로 뇌우를 동반한 비가 자주 내리는 편이다. 어릴 적에는 또 얼마나 어둠을 두려워하며 자랐을지…. 밀러는 입 안이 쌉싸름한 시가를 피운 것처럼 까끌까끌하여 그녀를 품에 꼭 안고, 하늘을 노려봤다. 어둠 속에서 금빛 눈동자가 이채를 띄었다.

    똑똑.

    작은 노크 소리에도 린느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밀러는 몸을 낮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집사장이 상황 보고하러 온 모양이야. 놀라지 않아도 돼.”

    그의 다정한 말씨에 린느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대답을 확인한 밀러가 입을 열었다.

    “들어와.”

    문이 열리자마자 집사장이 머리를 조아리며 상황을 보고했다. 촛대로 키운 불들은 멀쩡하지만, 샹들리에와 같이 커다란 불빛들은 모조리 정전됐다는 보고였다.

    “다행히 내일이면 복구할 수 있는 정도랍니다. 지금 당장 복구하도록 사용인들을 붙여 놓겠습니다, 각하.”

    “됐다. 비 오는데 작업해 봐야 위험하기밖에 더 하겠나. 비가 그치면 그때 하도록.”

    “예, 각하.”

    집사장은 그의 품에 안긴 린느를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노련한 집사장의 배려였다.

    달칵.

    문이 닫히자, 린느가 그의 품에서 스르륵 빠져나왔다. 아직도 두려움이 있으나, 아까와 비교할 바가 못 됐다. 두렵긴 해도, 아주 못 견딜 만큼은 아니었다.

    “일어날 수 있겠나? 안 된다면, 안아 줄 테니 이리 와.”

    분명 못 견딜 만큼 힘들지 않은데,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린느는 자신과 시선을 맞춰 한쪽 무릎까지 바닥에 내어준 그를 바라봤다.

    “내가 그대를 안고 계단에 오르다 넘어질까 걱정인가?”

    그녀의 걱정을 덜고자 시답잖은 우스갯소리를 얹었으나, 린느는 웃지도 않고 그의 손가락을 콱 잡았다. 금안이 그녀에게 잡힌 자신의 손을 내려보는 틈에, 린느가 말했다.

    “같이 자요.”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취기를 핑계로 음험한 생각이 그녀의 목소리로 위장한 줄 알았으나, 그녀와 시선을 맞추고서야 깨달았다. 그녀가 제게 동침을 요구한 게 맞다고.

    “취기인가?”

    “그게 마음 편하시다면, 그렇다고 해 둘게요.”

    “아니, 편하지 않아. 그럴 리가 있겠어?”

    “그럼 맨정신이라 믿으세요.”

    린느의 표정은 어딘가 무심해 보였다. 밀러는 그녀의 굳은 표정이 방금 내리친 뇌우 탓이라 여겼으나 다른 이유였다.

    ‘계약 결혼도 하는 마당에 하룻밤이 뭐 어때서.’

    함께 호텔 방에서 밤을 지새운 것도 두 번이요, 계약 결혼이란 말까지 나온 마당에 굳이 본능을 억누를 필요가 있을까? 지난번 호텔에서 보내지 못한 밤을 지낸다 생각하며 되지. 린느는 그를 향한 마음을 깃털처럼 가벼운 거라며 홀로 되새겼다. 그래야 덜 아플 테니까.

    어느덧 두 사람은 침실로 연결된 문 앞까지 닿았다. 그 문은 그가 린느에게 줄 담요를 가지러 드나들던 문이었다.

    덜컥.

    문이 열리자, 그의 품에서 맡아 왔던 그 익숙한 향이 미세하게 코를 자극했다. 햇살 아래에서 잘 말린 세탁물 냄새 같기도 하며, 그가 즐겨 피우는 시가의 쌉싸름한 향도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도 침실은 본 적 없었네.’

    병적으로 침실에 여인을 들이길 거부한 밀러였다. 원작에서만큼은 그렇게 아낀다던 미리안조차 대공 침실에 들인 적이 없었다. 그가 그렇게 고집스레 세운 수칙들은 린느 앞에선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린느는 미궁을 발견한 탐험가처럼 주변을 둘러봤다.

    그 커다란 침실 중앙엔 짙은 색상의 커튼이 침대의 모습을 연기 속 환상처럼 야릇하게 감싸고 있었으니. 린느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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