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82화 (81/122)
  • @82화

    귀를 의심하느라 자리에서 굳어 있던 하인이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인이 황급히 문밖으로 나섰다.

    덜컥.

    문이 닫히자, 밀러는 커다란 티 테이블로 향했다. 원래 가주들의 집무실엔 술 테이블이 있지만, 밀러의 집무실에는 술 테이블 대신에 티 테이블만 있었다.

    자고로 집무실이란, 가주들의 일터인 동시에 비애를 달래는 고독의 공간이 아닌가. 차마 맨정신으로 처리하지 못할 서한은 독주의 힘을 빌려 쾅, 인장 찍는 게 그들의 비애라면 비애이니 말이다. 밀러는 그런 흔한 가주의 비애 따위야 선대 대공의 애장품인 술 테이블과 함께 버렸다. 그리하여, 그의 집무실에는 고상한 티 테이블만 존재했다.

    밀러는 그 티 테이블로 그녀를 안내해,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얼굴을 맞대고 앉았다.

    취한 모습이야 진작 그에게 들킨 후이긴 하지만, 단둘이 테이블 하나 두고 술잔을 나눌 생각에 린느는 괜스레 뺨이 달아올랐다. 머리칼을 넘기며 손등으로 뺨을 어루만지자, 그 고고하던 남자가 비스듬히 고개를 누이고 린느를 바라봤다. 걱정과 사랑이 한데 묻어 있는 금안이 유독 오늘따라 밝게 빛을 뿜었으니. 린느는 헛기침을 핑계로 그의 고백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린느, 어디 아픈가?”

    “네니요? 전혀요.”

    “뺨이 뜨거워 보여. 이마에 손을 얹어도 되겠어?”

    그의 물음에 린느는 수줍음을 숨기고 고개를 저었다. 아직 술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 왜 이러는지 그녀도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반면, 밀러는 그녀의 명령대로 허공에서 달싹이던 손을 그만 내려놨다. 함부로 손대지 말라던 그녀의 명령이 있었으니, 그는 그게 곧 대공저의 금기이니라 여기며 악착같이 지켰다.

    하지만 그의 판단은 실로 과한 처사였다. 세상에. 만지지 말라 했더니, 정말 머리칼 끝도 안 스치는 건 너무하지 않냐며 린느가 홀로 속을 삭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황제 속도 거울처럼 잘만 읽어 대는 밀러는 린느의 속은 티끌도 읽지 못하고 하란 대로만 겨우 흉내 내는 데도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린느는 그의 손짓이 그만 멈춘 게 아쉬우면서도 아쉬워하는 자신에게 유감을 표했다.

    똑똑.

    노크 소리 끝에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사용인들이 쏟아졌다. 종일 연회 준비에 그들 역시 피곤할 법도 한데, 그들의 안색은 지친 기색조차 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뻐 보였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이들이 한 명씩 집무실 바깥으로 나갔고, 순식간에 테이블 위는 멋이 날 만큼 세팅되어 있었다. 밀러는 테이블 위를 가로지르며 샴페인 병을 가져왔다.

    “그대의 몸 상태가 퍽 걱정되는데, 정말 마셔도 괜찮겠나?”

    “마시면 나을 병인데요, 뭘.”

    술병은 술로 치료한단 소리인가. 밀러는 뒤늦게 어이없단 듯 미소를 지었다.

    “이상한 병이군.”

    말끝에 밀러는 미동도 없이 샴페인을 능숙하게 따더니, 린느 앞에 놓인 크리스털 잔에 샴페인을 따랐다. 그의 눈동자보다 옅은 금빛의 샴페인을 보며 린느는 마른침을 삼켰다. 잔잔하게 올라온 피곤함이 청량한 술 한잔에 눈이 녹듯이 사라졌다. 게다가, 이 잘나다 못해 완벽하기까지 한 남자와 함께이니, 피곤함을 느낄 틈도 없었다.

    “마셔 보고 입에 맞지 않으면 다른 거로 준비해 두지.”

    “알았으니 어서 잔 들어요! 짠하고 마시게요.”

    금세 활기를 찾은 여인을 보며 밀러는 장단을 맞춰 주듯 서둘러 잔을 들었다. 밀러는 그녀의 잔에 짠 부딪치며 유려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봤다. 사람을 홀리는 미소였다.

    “그대의 노고를 위로하며.”

    “그리고 대공님의 노고도 위로하며!”

    그녀는 우렁찬 건배사를 마치자마자 평소처럼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녀가 원하던 시원한 생맥주는 아니었으나, 꽤 만족스러운지 눈을 크게 뜨고 잔을 이리저리 뜯어봤다. 린느가 벌써 한잔을 비우고 딴짓할 동안에도 밀러는 잔의 기다란 목을 잡고 그녀가 남긴 건배사의 여운을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노고를 위로한다라. 그녀의 배려심이 스며든 사랑스러운 건배사 앞에서 밀러는 또다시 귀 끝을 붉게 물들였다. 그는 한 모금을 입에 머금고 금방 잔을 내려놨다. 그러자 린느가 그를 빤히 바라봤다.

    “잔이 비었는데 뭐 하고 계시는 거죠?”

    “아.”

    그는 서둘러 병을 들어 그녀의 잔을 채워 줬다. 감히 다른 이들은 누리지도 못할 호사를 누리며, 린느는 내내 방긋 웃었다.

    “누가 이걸 보면 절 욕할 거예요. 그렇죠?”

    “묫자리를 파 놓은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할 소리지.”

    “그렇잖아요. 대공님께 잔을 채우라는 명령을 내리다니요. 하지만 남들 앞에선 눈치껏 할게요. 이런 거 막 안 시키구.”

    “이런 게 어때서? 당사자가 기꺼워 죽겠다는데 웃기는 오지랖이군.”

    “기껍기까지야…….”

    “그대가 내 집무실에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기꺼워 죽겠어. 왜, 이 또한 거짓말 같은가?”

    밀러는 뻔뻔하게 자신의 가슴팍을 검지로 팍팍 꽂아 대며 당당하게도 말했다. 거짓말 같으면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는지 만져 보라는 일종의 사인이었다. 물론, 그녀가 정말 만질 거란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헐, 진짜 엄청나게 빨리 뛰네요?”

    그녀의 작은 손바닥 너머로 그의 심장이 터질 듯이 쾅쾅거렸다. 마치, 주인을 찾은 심장이 그의 가슴을 뚫고 나올 기세였으니. 밀러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행동에 그대로 얼어붙어 눈동자로만 그녀의 손을 바라봤다. 아니, 그녀의 손에 잡힌 자신의 가슴팍을 바라볼 뿐이었다.

    “…….”

    그의 안색이 곧 죽을 것처럼 파리해지자, 린느는 서둘러 손을 떼며 시선을 뗐다.

    ‘어, 엄마야……. 내가 지금 뭘 만진 거야. 나 왜 갑자기 이 남자 가슴을 만졌…지? 미쳤어? 미쳤구나.’

    린느는 시원한 샴페인으로 오른 열을 달래려 애썼으나, 역부족이었다. 이게 다 손바닥 너머로 여실히 느껴지던 그의 탄탄한 근육 탓이지! 어쩌자고 손을 댔을까, 퍽 의미 없는 후회를 곱씹었다. 린느는 눈동자만 도르르 굴려 그의 표정을 살폈다. 먼저 손대지 말라던 여자가 대뜸 자신의 가슴을 만졌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린느는 1분 전쯤 자신이 저지른 짓에 타박을 해 대며 아랫입술을 씹었다.

    “죄, 죄송해요. 그, 그 좀 모양새가 이상하긴 해도 전혀 이상한 뜻은 없었어요. 그냥, 정말 심장이 뛰는지 보려고 만진 건데.”

    그럼 심장이 멈춰 있었을까? 자신이 뱉어도 시답잖은 변명인 줄 알았는지 린느는 허둥댔다. 그때, 밀러는 곁에 있던 접시를 린느 앞으로 끌어당겼다.

    “솔직히 괜찮지는 않아.”

    “예? 아, 그, 그렇죠. 괜찮지 않겠죠. 제가 대공님의 가슴을 만졌으니…….”

    가슴이란 단어에 밀러는 들이쉬던 숨을 뚝 멈추고 당황에 찬 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게 괜찮지 않단 뜻이 아니라, 그대의 손이라서 놀랐단 뜻이겠지.”

    “아, 넵. 그렇군요….”

    “린느.”

    그의 시선을 피하던 린느가 움직임을 뚝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난 태어나 한 번도 무언가를 아껴 보거나 관심을 두고 사랑해 본 적이 없었어. 간혹, 어린 귀족들이 보모나 어머니가 짜 준 인형을 목숨처럼 아끼기도 한다던데. 난 그런 흔한 인형조차 없었거든.”

    하긴, 그 포악한 선대 대공이 어린 밀러를 그냥 뒀을 리가 없겠지. 방금까지도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던 린느는 화가나 얼굴을 붉혔다. 반면, 밀러는 그 아픔이 이젠 흉터조차 옅어진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말했다.

    “그래서 그대에겐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다 서툴러. 서투른 나를 봐달라는 뜻이 아니다. 서툴고 싶지 않아 노력하는데도 서투른 내가 싫은 거지.”

    밀러는 그제야 잔을 비웠고, 말미에 입을 뗐다.

    “내가 서툴러서, 그대가 내 눈치를 살피는 것도 싫어. 그대가 내 눈치를 볼 때마다 우리 사이에 벽이 있음을 느끼거든. 그 벽 없었으면 좋겠어. 아이처럼 허무맹랑한 투정일지 몰라도, 난 그래.”

    그의 고백에 린느는 손가락을 만지작대며 조심스레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제가 대공녀님이나 황녀님 정도는 되어야 벽이 없겠죠. 아니지, 제가 황녀님이라 해도 대공님 가슴을 만지는 건 벽이 있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싶은데…….”

    밀러는 횡설수설하는 린느를 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정적을 선사했다. 그때, 금빛 눈동자가 그녀의 눈동자를 사랑스럽단 듯 번갈아 바라보며 고백하듯이 읊조렸다.

    “린느, 내가 내려갈까, 아니면 그대가 올라올래?”

    “제가 올라갈 수도 있어요?”

    “그럼. 그대만 원한다면.”

    그의 단언은 실로 담백했다. 함부로 단언하는 성정도 아닌 남자가 이토록이나 단언하는 데엔 확실한 이유가 있을 테지. 린느는 눈을 얕게 뜨며 호기심과 의심이 엉킨 시선을 보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마한테 사탕 물려 주고 유인하는 거 같긴 한데요. 그 방법이 조금 궁금하네요.”

    “물론 내가 말한 건 작위일 뿐이야. 그 외의 것은 이미 그대가 내 우위를 차지했으니 오해는 마.”

    “알아요. 대공님이 절 짝사랑하고 있잖아요?”

    그녀 특유의 발랄한 웃음이 밀러의 뺨을 어루만지듯 스쳐, 그의 입꼬리를 말려 올렸다.

    “맞아. 지독한 짝사랑이지. 그대도 이렇게나 아팠을까?”

    린느는 잠시 멈칫하더니, 의미 모를 미소로 답했다.

    “아마, 그랬겠죠.”

    그는 그녀가 기억을 잃은 게 다행이라 여기며, 씁쓸한 얼굴로 잔을 기울였다. 두 사람 사이에 적당히 정적이 감돌았다. 밀러는 그녀의 앞에 그릇을 쟁여 놓고 말없이 그릇에 음식을 세팅하며 그녀의 속이 아프지 않게 단단히 애를 썼다. 반면, 그녀는 아기 새처럼 그가 얹어 주는 음식들은 맛있게 먹느라 바빴다. 그때, 밀러가 입을 뗐다.

    “린느, 날 그대의 백작비로 맞이해 줘.”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