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81화 (80/122)

@81화

“아가씨! 연회 일에 쓰일 카펫들도 도착했습니다!”

목청 좋은 하녀의 목소리에 살짝 열렸던 방문이 겁에 질린 듯 닫혔다. 닫힌 방문 앞으로 사용인들이 수도 없이 지나쳤으나, 한번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카펫들은 먼지가 앉지 않게 잘 보관해 둬. 예쁘긴 한데, 카펫이 워낙 먼지를 잘 먹잖아?”

“네! 아가씨!”

“아가씨, 냉수는 딸기 물로 할까요? 아니면 레몬 물로 할까요?”

“응? 당연히 레몬 물이지…?”

“그, 그렇죠? 혹시나 해서 여쭤봤어요!”

유능한 지휘자의 명령만큼이나 아랫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일도 없으니. 어린 하녀들은 자잘한 일까지 린느에게 물어보느라 줄을 섰고, 이를 목격한 넬 부인이 그녀들을 몽땅 데려다가 잔소리를 했다. 안 그래도 바쁘신 아가씨, 곁에서 정신없게 굴 테면 이번 연회에서 모조리 빠지라는 불호령이었다. 이에 어린 하녀들은 웃으며 사정했고, 넬 부인도 못이기는 척 금세 화를 풀었다.

축제였다. 혼내는 와중에도 넬 부인의 안색엔 참을 수 없는 웃음꽃이 피어났고, 혼이 난 어린 하녀들 역시나 금세 혼났다는 걸 망각하고 로비에 뛰어 들어와 솔선수범했다. 그 가운데에, 하인들은 열을 맞춰 커다란 가구들을 옮기고 오늘 도착한 물건들을 재배치하며 린느의 명령만 기다렸다.

“아가씨! 이쪽에 이 테이블이 맞습니까?”

“맞아요! 둥그런 테이블은 오른쪽으로!”

린느는 이곳저곳에 손때 묻은 배치도를 시시때때로 확인하며 연회장을 꾸몄다. 하여, 포크 손잡이 문양부터 시작해 석공 장인에게 직접 주문 제작한 샴페인 분수까지 린느의 손을 타지 않은 게 단 하나도 없었다. 그만큼이나 대공저 사용인들은 한마음으로 뭉쳐 린느를 도왔다.

물론, 린느의 명령이 곧 대공의 명령이라 여기라던 밀러의 명령이 있었기에 소음이 없는 것도 있겠지만, 단지 그 이유뿐이 아니었다. 타고난 린느의 안목 덕분이었다.

대공저의 사용인들이 보통 사용인이던가? 제국의 또 다른 태양이자, 제국에서 가장 깐깐하기로 소문난 페리하츠 대공가의 수족들이 아닌가. 그런 그들이 그저 린느의 명령에만 의존할 리가 없으며, 말도 안 되는 명령이라면 저렇게 진심으로 행복할 리도 없었다.

대공저에서 무려 수년 만에 열리는 연회는 밀러에게도 린느에게도 감회가 새롭겠지만, 이는 대공저 사용인들마저도 모두가 공유하는 감정이었다. 하여 아무리 대공저 사용인들이 린느를 잘 따르는 편이라 해도, 공은 공이고 사는 사였다. 그렇게 공과 사를 따져야 할 이들마저도 린느의 안목에 감탄하기 바빴다.

“연회가 너무 기다려져요…! 누가 저 좀 기절시켜 주실래요? 연회 날에 일어나게.”

“주접떨지 말고 거기 촛대 방향이나 틀어 놔.”

사용인들은 소풍 전날의 어린이들처럼 하루하루를 고대했다. 아침이 낮이 되고, 해가 사라지고 달이 떠오를 때까지도 사용인들은 먼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얼추 모양을 갖춘 로비를 바라보며 홍조를 띄웠다.

“요즘만 같으면 주급 없이도 일할 맛이 있구먼.”

“그르게. 그나저나 눈치도 없이 날씨가 왜 이런담? 밤새 비라도 오려나? 쯧.”

“망할. 연회 전까진 비 좀 안 왔으면 소원이 없겠구먼.”

“연회장에 황태자 전하께서 오신다고 하셨으니, 그 귀족들이 모진 비가 문제겠수? 태풍도 뚫고 오겠지.”

“그럼 그럼!”

손주의 귀여운 재롱을 보듯 헤벌쭉 웃던 사용인들이 하나둘 별관으로 넘어가자, 종일 축제처럼 행복이 가득한 로비에도 고요함이 우거졌다.

달칵.

종일 닫혀 있던 2층 방문이 그제야 열렸다. 눈치만 보던 미리안이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빼고 주위를 살펴봤다. 주위에 사람이 없단 걸 눈치챈 후에야 2층 계단 난간을 잡고서 로비를 내려다봤다.

“……와.”

마법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 오전과 밤이 또 달라 보였다. 이제 정말 연회 일까지 이틀 남짓 남았다는 게 피부로 와닿았는지 미리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게 다 린느 님의 작품이구나.’

종일 문밖에서 울리는 린느의 명령 소리를 떠올리며 미리안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을 보란 듯이 해내는 멋있는 사람. 같은 상황에 처했음에도 그걸 극복하는 사람. 미리안은 중앙계단 난간을 잡고 아직은 미완성이지만, 윤곽을 드러낸 연회장을 쭉 둘러봤다. 연신 미소를 짓던 미리안의 입꼬리가 서서히 굳어 갔다.

이 넓고도 화려한 연회장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탓이다. 오로지, 이 연회장을 닮아 환히 웃을 줄 아는 린느와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의 자리뿐.

‘…….’

미리안은 웃고 있던 표정을 굳히고 다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 * *

연회 준비는 린느에게 맡겼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수고들은 모조리 밀러의 차지였다. 린느라면 학을 떼며 귀찮아할 만한 일들은 밀러가 알아서 다 처리해 냈고 일 처리 속도는 유난히 오늘따라 다급했다.

“각하, 혹 어디 편찮으십니까?”

알렉스의 물음에 밀러는 휘갈기던 만년필을 뚝 멈췄다. 전장을 누비는 기사의 검처럼 빠릿빠릿하던 그의 손짓이 멈추고 아까와 똑같은 무표정으로 저를 빤히 바라보자 알렉스는 덜컥 겁이 올랐다. 괜한 질문으로 일의 흐름을 끊은 거라 판단한 탓이다.

“내 안색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아, 아닙니다. 일을 재촉하시는 듯하여 여쭈었습니다.”

밀러는 그의 대답에 만족하듯,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다시금 그의 만년필이 서류 종이를 긁으며 사각거렸다.

“오늘 저녁에 린느와 약속이 있어. 아, 그렇지. 말이 나온 김에 간단하게 취할 디저트 종류를 정찬실에 내와.”

물어보고 싶은 게 퍽 많았으나, 알렉스는 그저 묵례하고 곧장 문을 열어젖혔다.

덜컥.

“악! 깜짝야!”

린느는 심장께를 부여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막 자신이 문을 열어젖히려던 찰나에 알렉스가 먼저 문을 벌컥 연 탓이다.

“죄, 죄송합…!”

“괜찮나?”

방금까지도 알렉스가 있던 자리엔 밀러가 서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걱정을 홀로 떠안은 사람처럼 그의 표정은 사뭇 굳어 있었다. 괜찮냐 묻지도 못하고 손끝을 허공에서 달싹였다.

“괘,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제가 확인하고서 문을 열었어야 했는데…!”

린느는 알렉스가 무안할까 걱정되어, 희게 질린 얼굴로도 괜찮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알렉스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밀러를 바라보자, 밀러는 어서 가 보란 듯이 턱짓했다. 그런데도 알렉스는 서너 번이나 더 머리를 조아린 후에야 문을 닫고 집무실 밖으로 향했다.

“그대가 직접 여기까지 오도록 만들다니. 내 죄목이 하나 더 추가됐어.”

“놀라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시다시피 그날 이후로는 대공저엔 밤이 사라졌잖아요?”

하긴, 그렇게 밝게 불을 켜 두지 않았더라면, 린느가 이 저녁에 대공저를 홀로 돌아다닐 수도 없었을 터. 게다가, 대공저에서 지낸 기간이 길어질수록 린느의 불안 증세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그녀 역시 대공저에 적응하고 있단 뜻이었다.

“그깟 게 뭐 어렵다고.”

그의 귀 끝은 어느새 붉은 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린느에게서 시선을 뗐다.

타닥타닥.

집무실 가장 안쪽에 있는 벽난로가 잘 마른 장작을 태우며 따듯한 온기와 듣기만 해도 따스운 소리를 냈다.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고, 린느가 입술을 축이며 말했다.

“아직 일은 안 끝났어요?”

밀러는 하다 만 일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끝났어. 정찬실로 함께 가지.”

“정찬실은 왜요?”

곁에 있던 하인이 잘 걸려 있던 코트를 밀러에게 건네주며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밀러는 그 코트를 받지 않고 린느를 바라볼 뿐이었다.

“종일 나 대신에 일하느라 고됐을 테니, 그대가 좋아할 법한 디저트들을 준비해 둬라 일러뒀어.”

“디…저트요?”

“응. 디저트.”

맨날 디저트만 먹었더니, 정말 디저트만 먹는 줄 아는 건가? 종일 일하고 퇴근했으면 치맥은 아니더라도 시원한 술을 마셔야지 무슨 디저트? 린느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정찬실은 추워서 좀 그렇구요. 그냥 간단하게 집무실에 한잔 어때요?”

밀러는 코트를 향해 손을 뻗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집…무실?”

“네. 뭐, 집무실이 이렇게 넓고 또 넓으니 한잔 정도 해도 좋지 않겠어요?”

곁에서 린느의 말을 함께 엿들은 하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가엾은 아가씨….’

하인은 입술을 꾹 깨물며, 큰 소리가 오가지 않길 빌었다. 아무리 밀러의 신임을 받는 린느라 할지라도, 방금 꺼낸 말은 대공저의 금기 중 하나였다. 이는 집무실을 여인과 방탕하게 놀며 술을 마시던 선대 대공의 탓이었다. 일터와 술집을 구분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술병을 늘어놓으며 여인들을 품은 꼴을 보고 자란 밀러다. 그러니, 금기일 수밖에. 밀러는 코트를 집으려던 손에서 힘을 빼더니 말했다.

“다 나가. 레이디만 빼고.”

망했구나. 잠깐이나마 린느 덕분에 누렸던 호사와 행복은 이제 가슴속에 품어야 할 추억이 되겠다며 하인들은 어깨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들은 집무실 밖으로 나서자마자 이를 중재할 만한 안나를 데려오리라 다짐하며 하나둘 집무실 밖으로 나섰다. 마지막 하인이 나서려던 찰나에, 밀러가 그를 불러 세웠다.

“린느, 샴페인으로 하겠나? 아니면 와인?”

“움……. 둘 중 숙취 없는 거로 할래요.”

“뭐든 적당히만 마시면 숙취는 없어. 지난 연회에선 그대가 과음하여 숙취가 그토록 지독한 거지.”

밀러는 귀엽단 듯 그녀를 향해 애정이 어린 잔소리를 뱉더니, 하인에게 아연히 명령했다.

“샴페인, 와인. 셰프에게 직접 물어보고 괜찮은 거로 한 병씩 가져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