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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80화 (79/122)

@80화

하이레니아는 흡족하단 듯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번엔 잘못 건드렸어, 밀러.’

이미 자신이 토트린을 찾아내어 후작저로 불렀단 사실마저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까지 계산하지 못했을 거라며 하이레니아는 우쭐대며 웃었다.

“지참금은 받았겠지?”

“그럼요! 원래는 다달이 딸 아이의 이름으로 보내 주시기로 했는데, 석 달째부터 감감무소식입니다. 게다가, 편지 답장도 없으니 걱정이 되어 죽겠습니다…….”

“그렇구만. 자네나 영애의 입장이 곤란해졌겠어. 대공비가 될 줄 알았거늘, 시녀 신세라니. 게다가 세르트 영애까지 대공저로 들어갔으니 얼마나 눈엣가시일꼬.”

토트린은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그렇습니다! 애비 된 자로서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그래. 그 마음을 어찌 헤아리겠는가. 하여, 내가 직접 토트린 영애를 보고 싶은데.”

순간 머리를 조아리던 토트린이 이맛살을 구겨 가며 하이레니아를 응시했다.

“후, 후작 나으리께서 직접이요?”

하이레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만스레 찻물을 들이켰다.

“사실, 영애라는 말도 의미가 없잖나? 부인이라 불러도 이상할 게 없지.”

“그럼요! 이미 대공비가 되기 위해 대공저로 들어간 레이디이니, 부인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락센이 기다렸단 듯이 하이레니아의 말에 장단을 맞추자, 순식간에 판이 뒤집혔다. 뒤늦게 두 사람의 의도를 눈치챈 토트린이 얼굴을 구겼다.

“부, 부인이라니요. 영애입니다. 영애!”

“그럼 거짓이라도 고했단 말인가? 감히, 후작 나으리 앞에서?”

“그, 그건 아니지만… 대, 대공 각하께서 제 딸에게 손댔을 리가 없잖습니까!”

“웃기고 있군. 생긴 것과 달리 무척이나 순진한 소리를 해 대는군. 대공 각하께선 어디 사내가 아니던가?”

토트린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생각에 잠겼다.

‘괜히 미리안의 값만 떨어트리게 생겼구만. 제기랄!’

헛발질을 제대로 했다며, 후작저로 발을 들인 걸 후회할 때쯤 하이레니아가 그의 낯을 읽고 말했다.

“염려 말게. 내가 왜 그대의 영애를 보겠다 했겠나?”

“정부라면 안 됩니다, 어르신. 정말 애지중지 키운 딸이란 말입니다!”

“나를 뭐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가? 내 고작 정부로 들일 요량이면 그대를 이 자리에 불렀겠나?”

돈 냄새를 맡은 토트린의 눈이 번뜩였다.

“그, 그럼…….”

“내 정식 첩으로 들여, 그대의 가문과 화합을 맺을까 하네.”

토트린은 금방이라도 숨 멎을 사람처럼 헉헉댔다. 가문의 화합이란, 가주와 가신을 뜻하는 것이니, 절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공저에 틀어박혀 얼굴도 안 내놓는 걸 어떻게 데리고 나오나. 막막하구만.’

토트린이 이런저런 상념에 휩싸여 고민하자, 하이레니아가 상인이 거래 물을 내놓듯 툭 말을 얹었다.

“그대의 영지 근처에 광산 두 개가 놀고 있으니, 그것도 함께 주지.”

토트린의 구미를 당기고도 남을 법한 거래물이었다. 토트린은 기다렸단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가슴팍에 손까지 얹었다.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방방 날뛴 탓이다.

반면, 하이레니아에게 그깟 광산은 거래물도 아니었다. 어차피 폐광 직전의 광산일 뿐이니까. 다만, 귀족에게 광산이란 무척이나 의미가 깊어, 광산 하나 정도는 소유해야 어디 가서 귀족이라 목에 힘을 줄 수 있었다. 하이레니아는 토트린의 성격을 금방 파악하고 먹이를 던져 준 셈이었다. 탐욕스럽지만 단순한 토트린은 그가 던진 미끼를 확 물어 버린 것이고.

“물론, 그대의 영애를 이리 데려와야 거래가 성사될 것이야. 겉보기에 내가 그대의 영애를 갈취한 것처럼 보이지 않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시간이 조금 걸릴지는 모르겠으나, 제 딸 아이와 만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데리고 나올 수 있습니다.”

“시간이 없다. 어차피 지금쯤이면 각하의 관심은 세르트 영애에게 향했을 것이니 그리 어렵지도 않을 테지. 몇 달째 연락도 닿지 않는 이유가 뭐라 생각하나? 아, 아니지. 혹 모르겠군.”

하이레니아는 적당히 말끝을 흐리며 토트린의 불안을 자극했다.

“무, 무얼 말씀입니까?”

예상대로 그가 불안해하며 되묻자, 하이레니아는 안타깝단 듯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관심 밖이 된 여인을 각하께서 뭐 얼마나 챙겨 줬겠나. 배나 곯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대의 영애가 억울하게 죽임당해도 그대는 원정할 곳도 없을 테야. 아무튼, 난 인간 된 도리로서 그대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거니, 싫다면 지금이라도 무르게.”

협박과 회유에 이골이 난 능구렁이. 하이레니아는 단호하면서도 걱정스럽단 듯 탄식을 뱉어 댔다. 그 탓에 토트린은 고민을 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딸 아이의 답장 서신이 오지 않았으니, 이를 핑계로 대공저에 들르면 됐습죠!”

“대신에 최대한 서둘러야 할 테야. 곧 있으면 대공저에서 연회가 열릴 참이거든. 그 전에 일을 마무리하고 싶네만.”

“예! 맡겨만 주십시오, 어르신!”

토트린은 예상외의 수익에 헤벌쭉 웃으며 상체를 들썩이며 머리를 조아렸다. 토트린이 저택 밖으로 사라지자, 하이레니아는 락센에게 말했다.

“스테빈스 백작의 손녀가 토트린 영애와 친우라 했던가?”

“예. 본가를 알아내다가 우연히 알게 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최근에도 교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최근에?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각하께서 그 영애의 출입만큼은 늘 허락해 주는 모양이더군요.”

“그럼… 이번 연회에 그 영애도 초대될 수도 있겠군? 여신께서 이렇게 도와주시는군. 조만간 그 영애와 만나 봐. 뭐든 캐낼 게 있다면 다 캐내. 어차피, 뒷일이 잘못돼도 저 멍청한 놈에게 뒤집어씌우면 그만이니까.”

하이레니아는 광산 받을 생각에 신나 있을 토트린을 조소했다.

* * *

연회 일이 다가오자, 밀러만큼이나 린느를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왼쪽으로 두 걸음! 아니, 오른쪽으로 두 걸음이요. 아니다, 그냥 왼쪽으로 두 걸음이 낫겠네요.”

다소 허무한 주문임에도 사용인들은 하하 웃으며 린느의 명령에 착실히 따랐다. 미리안은 2층 계단 난간에서 그런 린느를 내려다봤다. 대공저에서의 삶이 만족스럽다는 린느의 말은 진심이 분명했다.

‘그렇게 좋으실까?’

도대체 무엇이 린느를 저렇게 활기차게 만드는 걸까. 미리안은 린느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뒷마당에 힘겹게 만든 탈출로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가볍게 무너졌다. 미리안은 그 탈주로를 망친 건 밀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사실 뒷마당에 상주한 사용인들의 작품이었다.

탈주로까지 철저하게 막힌 이후로 미리안은 뒷마당엔 나가 보지도 않았다. 망가진 탈주로를 보고 있자면 온갖 감정이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굴어, 뒷마당은 꼴도 보기 싫어진 탓이다.

“미리안 님!”

린느가 저를 보며 두 팔 벌려 인사하자, 미리안은 평소처럼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줬다. 미리안은 지금이라도 린느의 손을 잡고 묻고 싶었다. 정말, 정말로 이대로 행복한지 말이다.

그때, 밀러가 로비로 나와 당연하단 듯이 린느에게 향했다. 그러자, 기다렸단 듯이 미리안을 바라보던 린느의 시선이 밀러에게로 향했다.

“일 다 끝나니까 등장하는 느낌인데…….”

“그건 그대의 기분 탓이야.”

밀러는 들고 있던 시원한 냉차를 린느에게 건넸다. 쉬엄쉬엄하라는 말도 얹었으나, 린느는 조금 있으면 일이 끝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잔소리할 거면 어깨나 주물러 봐요.”

그녀의 주문에 일하던 사용인들이 물건을 내려놓고 린느와 밀러를 번갈아 봤다. 자신의 귀를 믿지 못하고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바보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분부대로.”

밀러는 커다란 손으로 린느의 작은 어깨를 부드럽게 마사지했다. 린느는 아저씨처럼 추임새를 가미해 분위기를 환기했다.

“어이구, 시원해라. 우리 대공님의 손은 금손.”

그녀의 칭찬에 그는 콧대를 들며, 손날로 토독토독 두드려 가며 마사지했다. 용돈을 바라는 아이처럼 성의껏 안마하던 남자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안마 값으로 저녁에 시간을 좀 내어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안마 값이요? 제가 받아야지, 왜 대공님이 받아요?”

그는 린느의 깜찍한 뻔뻔함에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린느는 팔짱을 끼며 콧대를 들었다.

“뭐, 생각 좀 하고 시간 내어 드릴게요.”

“영광입니다, 레이디.”

그때, 멀찍이서 알렉스가 다가오자 밀러의 표정이 굳었다. 이제 대화 좀 해 보려 했더니, 알렉스가 서류 더미를 들고 나타난 탓이다.

“어머, 어서 가 보셔야겠어요, 대공님.”

“어째 그대는 기뻐 보여 퍽 마음이 아프군.”

린느는 밀러의 등을 밀어 알렉스에게 보내고는 2층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미리안이 웃으며 인사해 주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소백작님?”

“아, 라밀라 님! 외출하고 오신 거예요?”

“네, 각하께서 루비 옷을 맞추라며 예약을 해 놓으셔서요.”

“오, 우리 루비 완전 기분 좋겠네요! 귀여운 루빙.”

라밀라는 이런 린느가 귀여워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한참이나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라밀라는 주변을 훑어보더니 린느의 손을 끌어 2층 구석으로 향했다. 그녀는 품에 넣어 뒀던 약통을 건네며 말했다.

“제 이름으로 받아 둔 그 약이에요. 이 약이면 각하의 병세도 문제없을 테니, 꼭 내일부터 한 알씩 빠짐없이 드시라고 전해 주세요.”

“감사해요, 라밀라 님. 제가 꼭 각하께 말씀드릴게요.”

린느는 품에 약병을 숨긴 후, 라밀라와 함께 1층으로 다시 향했다. 두 사람의 인기척이 지워지자, 두 사람이 대화하던 곳 앞 2층 방문이 천천히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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