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누군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해 본 적도 없는 자가 뒤늦게 얻는 법을 배우려 들다 보니, 욕심만 앞섰어. 지독하지? 부와 명예를 앞장세워 그대를 내 손에 담으려 했으니, 지독하게 멍청했다.”
그의 고백은 자조적이었으며, 퍽 씁쓸했다. 린느는 그의 말을 듣고만 있을 뿐 그 어떤 말도 얹지 못했다.
“언제부터 그랬느냐 묻는다면, 나 역시도 모르겠어, 린느. 그대는 누구보다 현명한 사람이니, 내 성정을 익히 알고 날 밀어냈던 거야. 아니, 밀어낼 수밖에 없도록 내가 그대를 밀어붙였어. 그대는 수도 없이 내게 싫다고 말했는데…….”
같잖은 마음으로 그녀를 대했다. 그게 사랑인지도 몰랐으면서, 좋아하는 마음인지도 몰랐으면서 무조건 린느를 위한 일이라며 그녀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밀어붙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늘.
“미안해. 그대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백작저로 거처를 옮겨 줄게. 그뿐만 아니라, 이미 저지른 과오도 다시 돌려놓을게. 내가 그대에게 마음을 고백하기 전에 미리 해야 했던 일들인데, 그걸 이제야 하고 있으니……. 멍청하지.”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화원의 꽃향기를 담아, 두 사람 사이를 드나들었으나. 낙엽을 머금은 바람처럼 밀러의 모습은 한없이 작아 보였다. 린느의 두 배도 넘는 몸집이건만, 속죄하는 그의 모습은 그토록 쓸쓸했다.
“있었던 일을 다시 없던 일로 만들 순 없다며요.”
정적을 깨트린 건, 린느의 대답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지른 과오를 다시 돌려요?”
“그러게. 그대를 볼 낯이 없어.”
다시금 정적이 찾아왔다. 밀러는 죄인의 얼굴로 린느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가 쉬이 용서해 주리라는 기대는 고사하고, 당장 마차를 내어 달라 명령해도 다행이라 여겼다. 그때, 린느가 말문을 열었다.
“진심이에요? 제 마음을 얻고 싶지만 서툴러서 그래 왔다는 말이요. 진심이냐구요.”
“응. 그대에겐 달갑지 않은 말이겠지만, 진심이야. 여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진심을 묻는 그녀의 물음에 밀러의 목소리가 힘을 얻어 강단 있게 울렸다. 눈치 없이 지나가던 사용인들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를 비켰으나, 밀러는 미동도 없이 린느만을 향했다. 저 금안이 자신만을 향하는데 어떻게 의심할 수가 있을까. 게다가, 이 남자 자신에게만큼은 거짓말에 젬병이지 않던가.
“그런데, 왜 없던 일처럼 굴었어요? 어제요.”
“어제?”
린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딴청을 피우며 물었다.
“마차 안에서는 오지 말래도 곁에 딱 달라붙더니, 대공저에서는 누가 볼까 봐 겁난 사람처럼 절 피해 다녔잖아요. 말투도 완전 딱딱하게 하고.”
“이런…….”
밀러는 어제의 자신을 향해 욕지거리를 퍼부어 주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종일 그녀의 머리칼을 빗겨 주고, 손을 잡고 이 화원을 거닐고 싶었으며 모든 걸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슨 낯으로 린느에게 그런 걸 바라겠는가. 적어도 양심은 있어야지.
“난, 짝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대를 배려하고자 한 거뿐이었어. 그대를 좋아하는 건 내 몫이지, 그대의 몫은 아니니까. 나로 인해 그대가 불편한 게 싫었거든.”
“참나. 핑계도 좋으시네요.”
“정말이야. 여신께 또 맹세하지.”
“여신님 오늘따라 바쁘시네요, 대공님 때문에.”
린느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그와의 시선을 피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안도감이 올라와 어제부터 불편하던 속이 단번에 풀렸다.
“믿어는 드릴게요. 하지만 방심하지 마세요.”
“절대. 절대 방심하지 않아. 내가 어떻게 그대를 두고 방심을 하겠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의 린느 뷔 세르트를 두고 어떻게 방심하겠는가. 여차하면 사라질까 발을 동동 구르는 건 밀러의 하루 일상이나 다름없는걸? 밀러는 검지를 하늘을 향해 세우며, 진심을 맹세하기 바빴다.
“아, 알겠어요. 목소리 좀 낮춰 주세요.”
“왜, 별채에 있는 사용인들을 모조리 데려와 말해 두고 싶은 걸 꾸역꾸역 참고 있는데.”
“중간이 없으시네요. 사무적인 관계 아니면 집착밖엔 없는 거예요?”
“하지만 집착은 그대에게 배웠어. 사랑하는 법 또한 그대에게 배우고 있고. 역시, 그대가 내게 배울 것보다 내가 그대에게 배울 게 더 많아.”
“집착을 제게 배웠다는 말씀만 빼면 나름 완벽했어요.”
밀러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가 없었다. 린느는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그의 검지를 꼭 잡았다. 허락에 감사하란 듯이 콧대를 올리자, 밀러는 가볍게 묵례했다.
“영광입니다, 레이디.”
이 도도한 여인이 평생 검지만 잡아 준다 해도 행복에 겨운 삶을 살 테지. 밀러는 드디어 평생을 시달리던 갈증을 해결하고, 넉넉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는 뒷짐을 진 채로 세 걸음에 한 번씩 린느를 바라봤고, 린느는 그만 좀 바라보라며 타박하길 반복했다. 화원 중앙에 도달하자, 린느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아직도 미리안 님의 본가에선 연락도 없는 거예요?”
“응. 아직은 없어.”
“연락 오기 전에 미리안 님이 먼저 도망가게 생겼어요. 물론, 도망가지 않겠다 약속은 하셨는데 또 모르죠.”
“앞으론 미리안 일도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어차피 하이레니아든 락센이든 움직일 때가 다 됐다. 연회장에서 그 정도 속을 긁어 놨으니, 지금쯤이면 미리안의 본가를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을 테지. 안 봐도 뻔했다.
“혹, 미리안이 성가시게 군다면 사실대로 말해도 좋아. 어차피 조만간 백작이 올 테니까.”
“후우, 드디어 말할 수 있다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아, 아니에요. 우리 저어기 가 볼래요?”
린느는 밀러의 팔을 잡아당겨 화원 끝으로 향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그림자가 2층 창문을 스쳤다.
* * *
오랜만에 긴 시간 동안 마차를 이용해서인지 속이 더부룩했다. 락센은 언제쯤 하이레니아 후작저에 도착하는지 마차 내실 창문을 힐끔거렸다. 그러자, 앞에 앉은 토트린도 괜스레 그를 따라 창문을 힐끔거렸다.
창문 밖을 살펴봐야, 후작저에 돈이 많은지 적은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게다가, 앞에 앉은 락센의 말이 허풍인지 아닌지도 알 턱이 없으니 토트린은 창문 밖을 열심히 살필 수밖에 없었다.
“큼, 토트린 경께서 운이 좋으신 겁니다. 저희 어르신께선 아무나 대면해 주지도 않는 분이시니 말이죠. 무려, 제국 다섯 개의 별 중 한 분입니다!”
“그럼요. 저 역시 영광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우리 딸을 애지중지 키운 덕을 이렇게 봅니다그려. 하하하하!”
토트린은 턱을 쓸어 만지며 겸연쩍은지 크게도 웃었다. 락센은 그의 웃음에 장단 맞추듯 함께 웃어줬다.
‘애지중지 키운 딸을 대공저에 시녀로 팔아넘기나? 거짓말을 웃으면서 하는군.’
락센은 속으로 토트린보다야 자신이 조금은 나은 인간이라 위안 삼으며 입꼬리를 움찔거렸다. 그때, 마차가 후작저를 가르고 들어섰고, 토트린은 창밖을 힐끔거리며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후작은 후작인가 보구먼. 아주 저택에 돈을 바르다 못해 처발랐구먼그래.’
때마침 마차가 본관에 들어서며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마차가 정차되고 잠시 기다리니, 마부가 문을 열어젖혔다.
“주인님, 후작저에 도착했습니다!”
락센은 토트린 앞에서 괜스레 몸짓을 과장하며 헛기침을 해 댔다. 촌뜨기 토트린의 기세를 미리 밟아 두려는 속셈이었으나, 돈 계산으로는 후작도 이겨 먹을 토트린이 아닌가. 그는 락센의 어쭙잖은 허세에도 허허 웃으며 후작저로 들어섰다.
‘돈만 많이 줘라. 망할 년이 구멍 낸 몫까지 배로 쳐서 주면 더 좋고!’
토트린은 한시도 뺨을 가만두질 못하고 히죽거렸다. 그때, 깐깐하게 차려입은 집사장이 두 남자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락센 경, 오셨습니까? 주인님께서 응접실로 모시라 하셨으니, 절 따라오시지요.”
락센은 몸에 밴 듯이 집사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토트린은 그들의 뒤를 따랐다가도 비싼 명화에 눈 팔려 멈추기를 반복했다.
‘이, 이건 또 무슨 돈지랄인고?’
토트린은 금칠 된 항아리를 보며 혀를 차며 욕했다. 이러니 황제가 귀족들을 상대로 시험을 보게 만드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이 저택의 주인이 이만큼이나 돈이 많은 거겠지 라며 위안 삼았다.
“큼흠! 토트린 경.”
“아, 예예! 갑니다!”
토트린은 헐레벌떡 뛰어가 락센의 뒤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섰다. 안내된 자리에 앉아 테이블이 얼마쯤 할까 고민하던 중에, 하이레니아가 점잔을 떨며 들어왔다. 토트린은 엉덩이에 도움닫기가 설치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났다.
“제국의 별을 뵙나이다!”
“먼 길 와 줘서 고맙군, 토트린 경.”
“아, 아닙니다! 하이레니아 후를 이리 뵐 수 있어 제가 영광이읍죠!”
토트린이 뺨에 경련을 일으킬 듯이 웃자, 하이레니아는 만족감에 젖어 자리에 앉았다. 세 사람이 한 테이블을 두고 자리에 앉자, 입이 떡 벌어지도록 진귀한 차 세트가 올라왔다. 토트린은 고급스러운 다기에 눈이 멀어 턱을 바닥까지 빼고 바라봤다. 그의 단순함에 하이레니아는 혀를 찼다.
‘아니지, 차라리 단순한 놈이 나아. 쓸데없이 머리 굴리는 놈보단.’
하이레니아는 찻잔이 다 채워지자마자 토트린에게 말했다.
“시간이 촉박하니, 본론부터 말하지. 토트린 영애는 대공저의 시녀로 들어간 게 맞나?”
“예, 그렇습니다!”
하이레니아는 한심하단 듯이 토트린을 빤히 바라보더니, 상체를 테이블로 기울였다.
“다시 묻겠네. 토트린 영애가 대공저의 시녀로 들어간 게 참말이냐 물었다.”
토트린이 도와달란 듯이 락센을 바라보자, 락센은 고개를 짧게 저었다. 토트린은 그제야 깨달았단 듯이 과장된 몸짓과 목청으로 답했다.
“아! 아아! 아닙니다! 어르신! 제 딸은 시녀가 아니라 대공비가 되기 위해 들어갔습죠! 그게 벌써 몇 달째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