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미리안이 쪼그려 앉아 땅을 만지고 울타리 끝을 만지는 동안, 린느는 푸른 꽃에 시선을 뺏겼다.
‘이 꽃을 찻잎으로 우려먹으면 좋다고 했던가?’
린느는 자리에 쪼그려 앉아 꽃을 빤히 바라봤다. 생긴 건 독버섯처럼 예쁘게 생긴 탓에 정말 독초가 아니냐는 의심도 들었으나, 안나와 셰프에게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테지. 린느는 꽃을 꺾어 부케처럼 들었다. 그러자 미리안 역시 일을 마쳤는지, 린느를 돌아보며 웃었다.
“이걸 이렇게 만지면 바깥으로 나갈 수 있어요.”
역시나, 탈주로를 마련했구나. 린느는 할 말을 잃고 미리안과 그녀의 손끝을 번갈아 봤다. 지난번, 벽난로 옆 창문으로 도망가려던 걸 밀러에게 알렸건만 미리안은 어째서 또다시 제게 도망을 예고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린느는 부케를 한 손으로 꽉 잡고서 따지듯 말했다.
“미리안 님, 저랑 약속했잖아요. 다시는 도망간다는 말씀하지 않겠다고요.”
“맞아요. 전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그건 또 무슨 말이냐며 되물으려던 찰나에, 미리안이 섬뜩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제가 아니라 린느 님을 위해서 만든 탈출구에요. 이 망할 대공저에서 시들어 죽는 건 저 하나로 족하니까요.”
미리안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오자, 린느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네? 아니, 왜 그렇게까지 생각해요? 그리고 시들어 죽는다니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아뇨? 우린 시들어 말라 죽어 버릴 거에요. 각하께선 위선자예요. 우릴 도와주는 척 위선을 떨면서…….”
미리안은 손을 바들바들 떨더니,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린느 님께 험한 일을 시키고 온갖 연회장에서 부려 먹을 리가 없잖아요?”
“예? 누가 뭘 시켜요? 아니, 잠깐만요. 미리안 님, 지금 오해하고 계신 거예요. 전……!”
“세뇌당한 거예요? 린느 님도 그러셨잖아요. 이 대공저는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지루하고 재미 좀 없다고 시들어 죽을 것까지는 절대 아닌데……? 고작 그 몇 마디가 시들어 죽어 버릴 거라는 극단적 결과까지 가져올 줄은 몰랐다. 린느는 최선을 다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뇌라니요. 전 대공저 생활에 나름 만족해요. 물론, 미리안 님께선 답답하시겠지만, 다 이유가 있어요. 정말이에요.”
“이유요…? 그럼 그 이유를 제게 말해 주세요.”
린느는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며 고민에 빠졌다. 알고 있는 사실들을 털어놓을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둘 것인지. 밀러가 그 사실들을 미리안에게 숨기는 이유가 분명 있을 텐데, 제멋대로 미리안에게 설명해 줘도 될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러자 미리안은 실소를 뱉으며 읊조리듯이 말했다.
“말씀 못 하시겠죠. 이유가 없으니까…….”
“그래요,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전 미리안 님을 속인 적 없어요. 지금은 말할 수 없지만, 미리안 님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전 미리안 님의 도망을 막아야만 해요.”
“그러니까요. 제가 린느 님 대신에 대공저에 남아 말라 죽을 테니깐 린느 님이라도 도망치시라구요.”
미리안은 젖은 눈으로 린느를 바라봤다. 미리안이 갑자기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언제부터 이런 무서운 일을 해 왔는지 린느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녀의 진심이 느껴져 미안하면서도 안타까웠다.
“미리안 님은 이 흙구덩이를 파며 제 탈출을 기대했을 텐데, 전 속없이 연회장이나 쏘다녔네요.”
순간, 소름 끼치게 비틀려 있던 미리안의 표정이 놀란 토끼처럼 순해졌다. 미리안은 놀란 눈으로 린느를 올려다보며 손까지 떨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린느 님께서 속이 없다니……. 절대 그렇지 않아요……. 이 대공저에서 잘못된 건 저와 각하뿐이에요….”
린느는 미리안의 손을 잡아 흙을 털어 줬다. 그러자, 미리안은 손을 쏙 빼내어 더럽다며 린느의 손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다시 린느에게 붙잡혔다. 린느는 미리안의 손을 탈탈 털어 줬고, 미리안은 말없이 제 손을 바라봤다.
“미리안 님, 사람은 다 잘못된 부분이 있어요. 가령, 각하께선 필요한 말도 쓸데없이 과묵하게 굴어서 이렇게 오해를 키우는 부분이 잘못 됐구요. 저는 과거의 아픔을 지금까지 끌고 와 두려워한다는 점이 잘못됐고, 미리안 님은 저를 너무 쉽게 믿고 의지하고 애정을 베푸시는 게 잘못됐어요.”
“전, 매번 린느 님께 받기만 한걸요?”
“받기는 뭘 받아요? 솔직히, 저번 도망도 제가 각하께 일러서 도망도 못 가셨잖아요?”
“아, 그, 그건…….”
린느는 어린 동생을 타박하듯이 미리안의 손을 잡고 대공저로 향했다.
“전 미리안 님이 생각하신 만큼 착한 사람이 아니에요. 하지만, 미리안 님을 위해서 도망가지 않는 거란 건 알아주세요. 연회 끝나는 대로 각하께 말씀드려서 함께 외출이라도 해요, 우리.”
미리안은 여느 때처럼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린느가 미리안의 속마음까진 알 순 없었으나, 당분간은 조용할 거라 여겼다. 그때, 멀찍이서 라밀라와 루비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루비는 미리안을 보며 얼굴이 희게 질렸다. 또 도망치려던 거냐며 묻고 싶었으나, 할 말을 꾹 참고 후다닥 뛰어왔다.
“뒷마당에 다녀오셨나 봅니다!”
“웅. 루비, 미리안 님 환복 좀 도와줄래?”
“네!”
다행히 미리안은 별다른 반항 없이 루비를 따라나섰고, 자연스레 라밀라와 린느만 자리에 남았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정원을 천천히 걸었다. 라밀라는 린느 손에 담긴 꽃을 보며 말했다.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그 꽃이란 걸 어떻게 바로 아셨죠?”
“뒷마당에 푸른 꽃은 이 꽃밖에 없더라구요.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이 꽃의 약효를 높일 좋은 방법은 없을까요?”
“약효라면… 아마 알약처럼 정제하는 방법이 효과적이긴 합니다. 차로 식음하는 건 아무래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럼 알약으로 정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공저 안에서 만들 순 없는 거겠죠?”
“연회 때문에 마음이 급하신가 보군요.”
“아무래도……. 라밀라 님도 그날 보셨잖아요. 하이레니아인가 뭔가 하는 후작이 부리부리하게 노려보는걸요. 으, 대연회장에서는 어찌나 노려보던지 제 옆통수가 아플 지경이었어요.”
린느는 몸서리를 치며 라밀라의 대답을 기다렸다. 라밀라는 잠시 골똘히 무언가 생각하더니,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제 이름으로 약을 만들어 올게요. 대공님과 소백작님은 제게 은인이십니다. 그깟 약을 정제하는 건 응당 제가 해야죠. 말고도 할 일이 있다면, 뭐든 제게 맡겨 주세요.”
라밀라는 결연하게 린느에게서 꽃다발을 뺏어 들었다. 린느의 부탁이라면 목숨도 내어 줄 것처럼 라밀라의 표정이 실로 진지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말미에 락센과 하이레니아의 험담으로 자연히 말꼬가 터졌다. 누가 더 겁쟁이네 뭐네 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대공저 로비에 도착하자 라밀라는 다정하게 웃었다.
“그럼 저는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소백작님.”
“네? 잠깐 차라도 하고 가시지 그러세요!”
라밀라는 흐뭇하게 웃더니, 린느의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그러자, 린느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고, 그곳엔 족히 일주일은 밤새운 듯한 밀러가 서 있었다.
“…….”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오가자, 라밀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자리를 비웠다. 휑하니 빈 대공저 로비는 두 사람의 대화를 종용했으나, 밀러는 죄책감에 입을 떼지 못하고 린느만 바라봤다. 차라리 말을 하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말없이 바라만 보자, 린느는 헛기침을 하며 손짓했다. 그러자, 그는 기다렸단 듯이 걸음을 재촉해 린느에게 다가갔다.
“대공님은 걸음이 절대 빠르지 않다며요?”
“아냐. 그렇지만도 않아. 절대.”
밀러는 그녀가 허락한 곁을 기꺼워했다. 누군가 이런 자신을 두고 채신머리없는 팔불출이라 욕해도 상관없었다. 그깟 말이 무슨 힘이 있을까? 게다가, 팔불출에게 팔불출이라 한 거뿐이니, 그다지 놀라거나 화낼 일도 아니지. 밀러는 린느를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오전 정찬은?”
“혼밥했죠, 뭐. 다들 약속한 것처럼 자리를 비워서요.”
“아,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어.”
“알아요. 설마 속 좁게 삐져서 아침밥을 거르셨겠어요?”
린느는 장난스레 웃으며 밀러를 올려다봤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내내 시달리던 불안 증세가 바람에 씻겨 날아갔다. 발걸음이 가볍고 속이 편해졌으며, 눈알을 뽑을 듯이 들이치던 두통도 사라졌다. 그들을 바라보던 사용인들은 쓸고 있던 빗자루까지 쥐고서 자리를 피해 줬다. 귀여운 커플에게 자유를 주기 위함이었다.
“린느, 그대의 손을 잡아도 되겠나?”
“네?! 아, 아니요.”
“그래, 괜찮아. 그대 손에 흙이 묻어서 털어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머뭇거리며 한다는 대답이 저거라니. 린느는 밀러의 어수룩함이 낯설면서도 귀여워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어제 보여 준 사무적인 태도가 떠올라 웃음이 뚝 멈췄다.
‘정신 차려.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헤헤 웃어 댈까? 내가 아니라, 저 남자가 날 좋아하는 거라고. 절대 잊지 마.’
린느는 자신에게 단단히 충고했다. 저 남자에게 쉬이 웃음을 허락하지 말자고. 하지만 두 걸음에 한 번씩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밀러가 귀여워 웃음 참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별채 앞에 있는 화원에 도착할 무렵, 밀러가 말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