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77화 (76/122)
  • @77화

    죄인처럼 바닥을 바라보던 밀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만진다는 표현에서 그녀가 저를 얼마나 짐승처럼 느꼈을지 죄책감이 들었다. 린느는 그런 그를 홀로 두고 집무실 밖으로 향했으나 마음이 후련하진 않았다.

    찝찝한 기분을 안고서 그대로 방으로 향했다. 숙취는 사라졌지만 원인 모를 피곤함이 몰려온 탓이다.

    ‘속이 다시 울렁거리려고 하네. 윽.’

    린느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방으로 향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면 겨울잠 자는 곰처럼 잠을 자야 한다며 린느는 일과를 일찍 마치고 내내 잠을 청했다.

    * * *

    하루를 통으로 쉬었더니 컨디션은 금방 회복됐으나, 오전 정찬 자리에 밀러도 미리안도 나오지 않아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 린느는 써니룸에서 홀로 찻잔을 기울며 푸릇한 창밖을 바라봤다.

    “린느 님!”

    린느는 미리안을 마주하자마자 오전 정찬 자리에는 왜 나오지 않았느냐며 투정을 부리고자 했다. 하지만, 미리안 치마 밑단에 묻은 흙에 말문이 막혔다.

    “헐, 밭일하셨어요?! 오전 정찬도 거르시구요?”

    “밭일은 아니고, 뒷마당에 잠시 다녀왔어요.”

    “세상에. 아침부터 무슨 일로 뒷마당까지 다녀오셨어요? 그것도 오전 정찬까지 거르시고!”

    “괘, 괜찮아요……. 그건 그렇고, 어제 린느 님 찾아뵈려 했는데 쉰다고 하셔서…….”

    “걱정하지 마요. 긴장이 풀려서 어제 하루 푹 자고 일어났더니 말짱해요!”

    린느가 찻잔을 기울며 무해한 미소를 짓자, 미리안 역시 환하게 웃었다. 자세히 살피니, 그녀의 검은색 머리칼에 이름 모를 잎사귀가 묻어 있었다.

    ‘얼마나 열심히 뒷마당을 헤집은 거람?’

    린느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칼에서 잎사귀를 떼어 줬다. 그러자 미리안은 놀라며 웃었다.

    “뒷마당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네! 이젠 눈 감고도 뒷마당 지리를 다 알 수 있어요…!”

    “눈 감고… 까지요? 뒷마당에 자주 나가는 건 좋은데,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네, 그럼요. 전 괜찮아요.”

    미리안 그녀가 여태 준비한 탈출로가 드디어 자리를 잡아 간다. 이 사실을 린느에게 알려 주고 싶어 입이 간질간질했으나, 미리안은 꾹 참았다.

    ‘내일 직접 보여 드리면 더 좋아하시겠지?’

    미리안은 린느와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노곤하니 긴장이 풀렸다. 그간 안나의 눈을 피해 울타리를 매만지고, 구덩이를 파느라 몸살이 온 듯 상태가 별로였다. 게다가, 매일 탈출로를 만질 때마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긴장감에 잠도 제대로 못 자, 낮에는 두통에 시달렸다.

    그런데도 린느와 함께면 그 긴장감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건 왜일까? 이유 모를 안정감은 마치, 오라버니의 품처럼 따듯했다.

    미리안에게 오라버니는 유일한 그녀의 편이었으나, 눈치 빠른 아비가 두 사람을 떨어트리는 바람에 그녀는 서서히 무너졌다. 그리고 정신이 완전히 깨질 때쯤, 밀러에게서 구출됐고. 다시 불안이 극에 달할 때쯤에는 린느와 마주쳤다.

    ‘린느 님은 꼭, 꼭 제가 탈출시켜드릴게요.’

    관심과 애정도 받아 본 사람이 베풀 줄도 안다던데. 미리안은 천성이 착했지만 상대에게 애정을 베푸는 방법을 몰랐다. 게다가, 받아 본 적이 없어 작은 애정조차 제국의 산맥보다 크게 여겼다. 미리안은 결연에 찬 얼굴로 물었다.

    “린느 님, 혹시, 대공저에서 연회가 열릴 거라는 소문이 정말인가요……?”

    “알고 계셨군요? 맞아요, 아마 곧 열리지 않을까요? 물론 준비할 게 많아서 더 길어질지도 모르지만요.”

    “정말, 정말 연회가 열리는군요….”

    “그럼요! 이참에 미리안 님도 저와 함께하실래요? 물론 처음엔 어렵겠지만, 힘들지 않은 선에서 즐기는 게 어때요? 제가 함께 있어 드릴게요! 모처럼 대공저에서 열린 연회잖아요?”

    린느는 여느 때처럼 활짝 웃으며 다정하게도 물어봤으나, 미리안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린느의 표정이 갑작스레 밝아진 탓이다.

    ‘연회가 좋으신 건가?’

    설마. 린느가 대공저 생활을 즐길 리가 없다고 믿고 싶은데, 그러기엔 린느의 안색이 너무나 밝았다. 한배를 탄 줄 알았던 린느가 자신을 놓고 대공저에서 내린 게 아닐까 덜컥 겁이 올랐으나, 미리안은 애써 그 생각을 지웠다.

    ‘그, 그럴 리가 없잖아. 이딴 곳을 왜 좋아하겠어.’

    미리안이 엄지손톱을 툭툭 뜯으며 불안해하자, 린느는 그녀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물론, 미리안이 연회를 반길 이유는 없으나, 그렇다고 저렇게 시무룩할 일도 아니지 않은가. 미리안에게 괜찮냐며 물으려던 찰나에 미리안이 먼저 말했다.

    “그럼, 그날은 대공저가 혼잡스럽겠네요……?”

    “그렇기야 하겠지만, 무려 대공저에서 열리는 연회이니 안전이나 보안에 더 힘쓰지 않을까요?”

    노골적인 미리안의 물음에 린느는 단호하게 답했다. 혹여라도 혼잡한 틈을 노려 도망이라도 칠 생각이라면, 어서 접으라는 무언의 충고였다. 하지만, 미리안은 굴하지 않았다. 도망의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린느이니까.

    “린느 님, 보여 드릴 게 있어요….”

    미리안의 목소리가 차분하다 못해 낮게 깔리자, 린느는 불안을 삼킨 것처럼 초조해졌다. 또 왜, 뭐! 도대체 무얼 보여 주려는 거길래 이러는 거냐며 되묻고 싶었으나, 린느는 말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 요즘 조용하다 싶었지. 아오, 도망여주.’

    린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급한 일 없으니 지금 보러 가요. 당장.”

    미리안은 린느가 탈출로를 보고도 도망가지 않고 대공저에서 살겠다 할까 봐 겁이 났으나,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에 그 걱정을 지웠다.

    ‘그럼 그렇지. 우리 린느 님이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할 리가 없잖아.’

    미리안은 그간 자기가 만들어 둔 탈출로를 보여 줄 생각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리고 그녀는 린느의 예상대로 뒷마당으로 걸음을 옮겼고, 린느는 한숨을 삼켰다.

    ‘두더지처럼 땅굴을 판 건 아니겠지. 미쳐 버리겠네.’

    린느는 죄 없는 입술을 꾹꾹 짓씹으며, 미리안이 이끄는 대로 향했다. 그녀의 시선 끝에 흰 울타리가 보이자, 린느는 탄식을 뱉었다.

    ‘꼭 이런 예상은 들어맞더라? 하아…….’

    미리안은 린느의 속도 모르고 해맑게 웃으며 망가진 울타리를 가리켰다. 하지만, 린느의 눈에는 망가진 울타리보다 푸른 잎의 꽃이 먼저 보였다. 라밀라가 말한 아낙시스라는 꽃이 분명했다.

    * * *

    어제저녁부터 밀러의 말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자, 알렉스는 가시방석에 앉은 게 아니라 통째로 삼킨 듯이 불편했다. 원래도 그는 말수가 적은 편이긴 했으나, 이 정도일 줄이야.

    “각하? 연회 일을 정하셔야 다른 일정들도 계약할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도 멀쩡하던 그의 안색이 퀭하게 바뀌어 퇴폐적인 분위기마저 흘렀다. 알렉스는 그의 불안증이 다시 도진 걸까 걱정이 치밀었으나, 그 말만은 아꼈다. 황궁 연회장도 잘 다녀왔다 하셨으니, 더 이상의 걱정은 걱정이 아니라 잔소리나 다름없기 때문이리라.

    “린느와 상의해.”

    알렉스는 이맛살을 접어 가며 눈꺼풀을 크게 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이 중대한 사안을 린느와 정하라니! 하지만 평소처럼 안 된다는 말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이미 밀러의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탓이다.

    “각하, 혹, 다른 문제가 있으십니까?”

    그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고, 할 말이 없다면 그만 나가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이제야 하루 업무가 시작이건만 밀러는 하루 일정을 지금처럼 멍하니 집무실 테이블만 바라볼 작정인 게 분명했다. 알렉스는 그만 묵례를 마치고 그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내어 줬다.

    달칵.

    “…….”

    밀러는 마른세수하며 미간을 파르르 떨었다. 어젯밤 한숨도 잠들지 못하고 밤새 린느의 그 표정과 말을 곱씹었다. 물론, 고백한 순간부터 그녀의 반응이 썩 달갑지 않긴 했으나, 어제 집무실에서는 그녀가 자신을 짐승 보듯 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자신이 그녀에게 커다란 실수를 한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밀러는 휑하니 빈 린느의 집무 테이블을 보며 자조했다.

    ‘또 어딜 간 걸까.’

    나비처럼 훨훨 날아다니는 이 여인이 또 어디로 도망간 건지 불안했다.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엄지 끝에 앉았다가 희망 고문 끝에 도망가는 그녀는 또 어딜 찾아 날아갔을까. 밀러는 자신의 손을 처연하게 내려다봤다. 그리고 아무것도 잡지 못한 허전한 손이 그에게 경종을 울렸다.

    그렇구나…. 애초에 저 따위에게 잡힐 여인이 아니구나. 아니, 감히 잡아선 안 되는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를 감히 잡으려 하다니, 벌 받아 마땅하다.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대공저로 데려와 가신이라는 족쇄를 채우고 시녀처럼 부렸다. 게다가, 이미 귀족들 사이에선 린느를 두고 대공비가 될 여인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돌고 있으나, 정작 린느는 제게 마음조차 없다. 자신을 좋아하지도 않는 여인을 강제로 곁에 잡아 두다니, 밀러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동시에, 조금은 그녀의 말뜻이 이해됐다.

    밀러의 고백 끝에 그녀가 대뜸 하룻밤을 제안한 이유 또한, 이 무자비한 대공에게서 진심을 기대하지 않은 탓이겠지. 밀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제게 하룻밤을 건네는 그녀의 마음은 얼마나 상했을지 짐작조차 두려운 탓이리라. 밀러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한숨을 내쉬었다.

    ‘일에는 순서가 있는데 그걸 모조리 다 무시했어. 내가 대공이란 이유 하나로.’

    그녀를 생각해서 했던 선택들이 결국, 그녀를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을 위한 선택이란 생각에 죄책감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그런데도 그녀를 포기할 생각은 티끌만큼도 들지 않았으니. 그는 끝까지 제 감정에 충실한 자신이 개탄스러웠다.

    불안 증세가 발현된 것처럼 온몸이 찬기가 돌고, 거인에게 밟힌 것처럼 온몸이 비명을 질렀으나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또다시 그는 자신에게 벌을 내렸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