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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76화 (75/122)
  • @76화

    “케, 케시아는 다시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전하께서 괜히 케시아를 두고 어르신을 힐난하셨다기에…….”

    케시아라는 이름에 후작의 미간이 사납게 찌푸려졌다. 발로 찬 책상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락센에게로 꽂혔고,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살려서 보냈나?”

    하이레니아의 목소리가 묘하게 떨렸고, 락센은 그 떨림을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서 신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요!”

    락센은 식은땀으로 뒤덮인 얼굴로 억지웃음을 내보이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하지만, 하이레니아는 웃는 얼굴에도 기꺼이 침을 뱉는 남자였다.

    빡.

    “아악!”

    살려서 보냈다는 말에 하이레니아는 락센의 정강이를 다시 찼다. 아까보다도 더 잔악한 발길질이었으며, 때린 곳을 또 때리며 락센을 고깝단 듯 응시했다. 그는 한참이나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더니, 버럭 화를 내질렀다.

    “이참에 처리하고 자결로 위장을 했어야지……!”

    그는 살기 어린 눈으로 락센을 노려보며 입매를 부르르 떨었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거, 눈엣가시인 그녀를 자결로 위장하는 게 하이레니아 입장에선 더 달가웠을 테지. 하이레니아는 한참이나 씩씩대더니,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하나같이 멍청해서 내 명이 먼저 닳게 생겼군. 썩 꺼져! 그 시녀의 본가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다신 내 저택에 발도 들일 생각도 마!”

    쾅.

    정신 차려보니 락센은 후작저 집무실 바깥으로 내쫓긴 후였다. 한참이나 자리에 멍하니 서서 눈동자만 굴렸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하이레니아의 속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린지를 모르겠군. 시녀? 무슨 시녀!’

    대공저로 떠난 라밀라가 대공에게 무슨 말을 지껄였을지 모르니, 매 순간이 지옥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 대공저의 시녀 뒤를 캐라고?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당장 하이레니아가 두려워서 시키는 대로 하겠다며 큰소리는 쳤으나 앞길이 막막했다.

    ‘차라리 대공저에 가서 무덤을 파놓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겠군. 젠장맞을.’

    락센은 얻어맞은 정강이를 문지르며 욕을 삼키더니, 탐욕스러운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생각해 보니, 그 시녀가 백작가의 영애라는 소문이 자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제국에 백작 가문의 수는 다른 작위 가문들보다 월등히 적은 수이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 나이 또래 영애가 있는 백작가로만 추려도 손에 꼽을 테지. 그중에서도 혼인하지 않은 영애들만 추린다면 다섯은 되려나? 생각보다 빨리 끝나겠군.’

    락센은 비릿한 웃음과 함께 절뚝거리며 마차로 직행했다.

    * * *

    밀러는 대공저로 돌아오자마자, 미리안의 아비가 대공저에 들렀는지부터 확인했으나 애석하게도 이번에도 오지 않았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이러다가 그 겁쟁이가 더는 찾아오지도 않고 꼭꼭 숨으면 어쩌시겠습니까? 그렇다고 계속해서 아가씨를 대공저에 모실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알렉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밀러에게 물었으나, 밀러는 되레 코웃음을 쳤다. 평범한 귀족이라면 알렉스의 말대로 겁에 질려서 진작 도망갔을지도 모르나, 상대는 미리안의 아비였다.

    “그 일은 거의 마무리 되어 가니, 그대는 린느를 도와 연회 준비나 해 둬.”

    “맞아요! 알렉스 님 이리 오셔서 이것 좀 봐 주실래요?”

    린느는 배치도가 그려진 두루마리를 펼치며 알렉스에게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알렉스는 그런 그녀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때였다. 집무실 의자에 앉아 있던 밀러가 만년필도 내려놓고 알렉스보다 먼저 린느에게 다가갔으니. 린느는 화들짝 놀라며 배치도를 가슴팍에 숨겼다.

    “왜, 왜요? 각하께선 초대장에 이름이나 적어 두세요. 전 알렉스 님과 상의할 테니…….”

    “머릿수가 많을수록 좋지 않겠나?”

    황실 연회에 참석하기 전처럼, 그의 말투는 대공저에 도착한 이후로 다시 사무적인 말투로 바뀌어 있었다. 린느는 그런 그에게 또다시 여러 감정을 느꼈지만, 이를 낱낱이 드러낼 만큼 어리숙한 편은 아니었다. 린느는 무감정한 얼굴로 배치도의 중앙을 꾹 눌렀다.

    “이 지점을 기점으로 연회장을 꾸밀 거예요. 측면에는 테이블을 세팅하고, 10시 방향과 2시 방향에는 샴페인 분수를 설치하구요.”

    “오…… 역시 아가씨의 안목은 대단하십니다. 샴페인 분수라니 생각도 못 했잖습니까?”

    알렉스는 엄지까지 치켜세우며 샴페인 분수에 대한 찬양을 이어갔다. 칭찬에 무척이나 약한 편이나, 린느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더 린느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랐으면서, 왜 이제 와서 또 변덕일까! 린느는 저 자신이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았다.

    ‘애초에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라던 거 아니었어? 미친. 정신 차려라. 상대는 집착남주 밀러야. 그리고, 저 남자의 상대는 내가 아니라고…….’

    린느는 근래에 밀러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 기댈 곳 없는 남자가 자신에게 눈을 돌린 거라 확신했다. 그렇다 해서 외로운 밀러의 곁을 날름 차지하고 싶단 원대한 포부도 없다. 그런 포부를 갖기엔 린느는 그에 대해 아는 게 너무 많았으며 동시에, 모르는 것도 많았다.

    그 복잡한 마음을 다 뒤로하고, 원래 계획대로만 이행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으나, 어디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만 흘러가던가? 린느는 변덕을 부리는 제 마음을 어찌할 도리가 없어, 죄 없는 배치도만 빤히 응시했다.

    ‘엑스트라는 엑스트라일 뿐이야. 이대로만 지내다가 백작저로 돌아가자고.’

    린느는 다짐한 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마자, 저를 바라보는 금안과 딱 마주쳤다. 밀러는 눈을 얕게 뜨고선 그녀를 바라봤다. 저 여자가 또 무얼 혼자 다짐했는지 퍽 의심스러운 탓이다.

    “알렉스, 이 배치도대로 진행해.”

    “네, 각하.”

    알렉스는 배치도를 도르르 말았고, 린느는 알렉스가 먼저 집무실 밖으로 나서기 전에 걸음을 재촉했다.

    “린느, 그대는 잠시 대화 좀 하지.”

    눈치 빠른 남자는 그녀의 도망을 알아채고선, 곁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그러자, 주인을 닮아 역시 눈치가 빠른 알렉스는 묵례하고서 재빨리 집무실 밖으로 도망쳤다.

    달칵.

    알렉스의 걸음이 저토록 빨랐던가? 린느는 그대로 그에게 다시 잡혀 올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말씀하세요.”

    “속은 어때? 몸은 괜찮아? 필요하다면 의원을 불러 줄 테니, 며칠 푹 쉬는 게 어떨까 싶은데.”

    “괜찮아요. 대공저에 도착하자마자부터 아주 멀쩡해졌거든요. 없던 일처럼요.”

    밀러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마신 술이 없던 일이 되고, 앓았던 속이 없던 일이 될까? 그는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언제부터 일벌레가 되었는지 퍽 걱정스러워.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가?”

    얼어붙은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밀러는 웃음을 얹어 물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시작부터 막혔으니. 그녀가 그의 물음에 대답을 거부한 탓이다.

    린느는 말없이 소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의 사이가 좁혀지자, 밀러는 선명히도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의 머리칼에 손을 뻗었다.

    짝.

    린느의 손바닥이 야무지게도 그의 손등을 쳐냈다.

    밀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린느를 바라봤다. 자신이 또 그녀에게 무슨 실수를 했는지 알 수가 없어, 그의 금안이 미세하게 떨렸다.

    “…미안. 그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아무 때나 만지지 마세요. 우리 그런 사이도 아니고, 설령 그런 사이라 해도 싫어요.”

    이렇게 쉽게 감정을 드러낸다고? 린느는 자신이 방금 뱉은 말을 도로 주워 담고 싶을 만큼 창피했다. 아주 서운하다고 대놓고 말하는 게 낫지, 뭐? 우리 그런 사이도 아니잖아요? 망했다. 이미 뱉은 말을 뒤늦게나마 수습하려 했으나, 뭐라 수습하기도 무척이나 난감했다. 린느는 당혹감을 감추며 그에게서 시선을 뗐다.

    린느는 자신의 단어 선택 능력에 애도를 표했다. 한번 말이 꼬이자, 마치 사랑에 빠진 어수룩한 소녀처럼 모든 게 다 꼬였다. 반면, 밀러는 그런 그녀에게 죄책감 가득한 눈으로 린느에게 수도 없이 사죄했다.

    “미안해. 난 그대를 절대 쉬이 만지려던 게 아니었어.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던 거라…….”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는 핑계에 린느는 다시 서운해졌다. 그러기에는 남들 앞에선 손끝 하나라도 스칠까 봐 조심하던데? 그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 확신하며 린느는 타박하듯 말했다.

    “그건 너무 티 나는 거짓말 아니에요? 됐어요. 어차피 우리 그날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피차일반이다. 서로 부둥켜안고 잔 게 뭐 어떻다고 연인 행세람? 연인 행세를 할 거면 아주 대놓고 할 것이지, 숨어서 하는 건 또 뭐냔 말이다.

    ‘대놓고 연애를 하기엔 창피하다 이거야, 뭐야.’

    린느는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밀러는 바보처럼 입매를 뻐끔거리기만 했다. 그 잘난 남자를 침대에 눕힌 것도 신기했으나, 말 한마디에 다 죽을 것처럼 구는 모습도 신기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맹목적으로 자신만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가차 없이 등을 보이던 린느가, 다시 걸음을 돌려 밀러를 바라봤다.

    “만지더라도 제가 좋을 때, 제가 대공님을 만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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