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린느가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건, 지독한 숙취와 그 숙취마저 깨울 만치 잘생긴 남자였다. 기억의 조각들이 드문드문 깨져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린느의 얼굴을 달굴 수 있었다.
“미쳤다.”
미쳐 돌아 버린 거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그간 얌전히 지내 왔는데, 여태 참아 온 노력이 수포가 되었다. 망연자실한 눈으로 꼭 감긴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제발 그라도 어제의 기억을 잃었기를 바랐다. 하지만.
“안녕, 린느.”
밤을 지새운 듯 퀭한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며 린느를 바라봤다. 그의 금안은 좋아하는 감정을 숨길 의지조차 없었다. 이미 다 들킨 마당에 마음 편히 사랑하겠다는 포부마저 보였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린느를 끌어안아,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 어떤 때보다도 경건했으며, 그의 진심이 담긴 입맞춤에 린느는 온갖 감정이 들어 웃을 수도 화낼 수도 없었다.
사실 어제 자신이 부린 객기를 밀러가 낱낱이 기억하고 있음에 짜증이 나야 한다. 아니면, 곤란하다고 여겨야 하는데……. 왜 안도감이 들까? 왜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걸까. 린느는 저를 향해 되물었으나, 답할 수가 없었다.
린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대 아래로 두 다리를 내렸다. 방금까지도 제게 안겨 있던 여인이 매몰차게 등을 보였음에도 밀러는 실망하는 기색도 없이 그녀를 바라만 봤다. 린느는 곁에 있던 가운을 걸치며, 무심하게 말했다.
“우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대공님께서 절 좋아하든 말든 그건 제 알 바가 아니지만, 황태자 전하와 약속한 연회는 제 알 바거든요.”
진지한 말투에 목소리였지만, 일 열심히 하는 이 귀여운 여인을 두고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밀러는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식사하며 계획을 짜 보도록 하지. 그대의 속을 달래 줄 식당을 내가 잘 알거든.”
“그냥 대공저에 가서 식사해도 돼요.”
“안 돼. 그대가 마신 술병만 늘어놔도 저만큼은 될 텐데, 속이 멀쩡할 리가 있겠어?”
밀러가 기다란 검지로 린느 몸집의 몇 배는 족히 넘는 카펫을 가리켰다.
“과장은. 제가 무슨 술 마시는 하마도 아니고 저만큼을 마셨다고!”
“정말이야. 못 믿겠으면 전하께 여쭤봐. 그대 덕분에 연회장에 친히 오신다 약속까지 하셨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오시겠지.”
그제야 묘하게 굳어 있던 분위기가 차츰 풀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정적이 흐르자, 참다못한 린느가 타박하듯 말했다.
“각하께선 걱정도 안 되세요? 어쩜 그렇게 남 일이에요?”
“어차피 열리기로 한 연회를 무를 방법은 없어. 게다가, 작정하고 몰려드는데 나라고 수가 있을까.”
“그럼요? 이대로 그냥 눈 뜨고 당하실 거예요?”
“그대가 전하를 불러들였고, 내게는 그대가 있는데 내가 당하긴 왜 당하나.”
대공저에서 연회를 여는 게 썩 탐탁지 않으나, 이번 연회를 끝으로 귀족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으니 그건 그거대로 이득이다. 물론, 촉새 같은 귀족들이 정말 연회를 즐기기 위해서 참석할 리가 없으니, 그게 퍽 꺼림칙하나 딱 그뿐이다.
“정말 궁금해. 이 작은 머리 안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이야.”
린느는 그의 말에 흠칫 놀랐으나, 태연한 척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그는 그녀의 손끝에 손끝을 대어 닿을 듯 말 듯 스치며 손장난을 쳤다.
“그 잠깐 사이에 전하를 초대할 줄이야. 정말 현명한 방법이었어.”
“그렇다고 안심하기엔 일러요. 어제 그 후작 금방이라도 일을 칠 것처럼 눈이 부리부리했다구요.”
“알아. 다 알아. 하지만 괜찮아, 린느.”
그녀가 제 몫까지 불안에 떨자, 밀러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끌어당겨 다시 침대에 앉혔다.
“조금만 더 있다가 식사하러 나가면 안 될까? 침대에서 시간 보내는 취미가 없었는데, 그대 때문에 생겼어.”
“새로운 취미는 환영이지만, 애석하게도 다음에 즐기세요. 배고파 죽겠거든요.”
“배가 고픈가? 아, 그럼 안 되지.”
기상 시간에 늦은 신병처럼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른 건 몰라도 숙취에 허덕이는 린느를 이대로 빈속으로 둘 순 없었기에, 그는 다급하게 움직였다.
“호텔 사용인들을 보낼게.”
그는 뒤늦게 머리칼을 쓱 넘기며, 어서 방 밖으로 사라졌다.
* * *
오랜만에 독주를 물처럼 삼킨 탓에 속이 말이 아니었다. 어제 마실 때까지만 해도 물처럼 쭉쭉 넘어갔는데 너무 마셨는지 대낮임에도 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아까 거의 못 먹던데 걱정되는군.”
“걱정은 감사한데 좀 떨어져 앉으면 안 돼요?”
“왜, 마차가 흔들리니 그대도 내게 기대는 게 편하지 않겠어?”
“그러니 제게서 손을 떼 주세요. 전 그냥 벽에 액자처럼 붙어서 가고 싶어요.”
“그건 너무 고독해 보여서 안 돼. 내게 기대어 낮잠이라도 자 둬. 대공저에 돌아가자마자 할 일이 산더미라며? 그럼 미리 쉬어 둬야지.”
‘뭐라는 거야, 정말. 속도 안 좋아 죽겠는데 아까부터 어울리지 않게 다정할 게 뭐람.’
린느는 밀러를 째려보며 기어코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러자 당연하단 듯이 그의 상체가 린느에게로 쏠렸다.
“그만!”
린느의 우렁찬 명령에 그는 그만 길들인 맹수처럼 자리에서 굳었다.
“앉아요. 따라오지 말란 말이에요.”
술 냄새가 진동하는데 저 남자는 뭐가 좋다고 자꾸 어깨를 내어 준다는 건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에게만큼은 아저씨처럼 술 냄새를 폴폴 풍겨 대고 싶진 않았다.
“속이 안 좋으면 바로 말해 줘. 참지 말고.”
린느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대공저 마차가 튼튼해서인지 흔들림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린느는 무사히 대공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차하다가 그의 정장에 숙취를 덜어 낼까 걱정했으나, 그건 과한 걱정일 뿐이었다.
‘어우, 이제 좀 살 거 같네.’
린느는 대공저에 도착하자마자 사용인들의 친절한 인사를 모조리 받아 주고도 멀쩡했다. 확실히 비싼 술은 숙취도 짧고 굵다며 헤헤 웃었다. 하지만, 당분간은 식전주도 마시지 않으리라 홀로 다짐했다. 술병처럼 생긴 것만 봐도 거친 파도가 치는 배에 올라탄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는 탓이다.
“우리 아가씨는 적응력도 좋으셔. 타지에서 숙면하셨나 봐요? 아주 피부가 뽀송뽀송하셔요!”
속도 모르고 메리는 헤헤 웃으며 린느의 짐가방을 정리해 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린느만큼이나 얼굴이 활짝 핀 루비가 들어섰다.
“아가씨!”
“루비!”
린느는 루비를 꼭 끌어안아 등도 토닥여 줬다. 한참이나 조잘조잘 수다를 떤 후에야, 린느는 밀러의 집무실로 향했다. 원래라면 하루쯤 쉴 테지만, 하이레니아의 눈빛이 자꾸만 떠올라 쉴 수가 없었다.
‘덤벼 봐, 아재들. 내가 아주 가만 안 둬.’
어제 밀러를 응시하던 하이레니아의 추악한 눈빛을 떠올리며, 린느는 또다시 없는 소맷귀를 걷어붙였다.
* * *
대낮부터 하이레니아 후작저가 시끄러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후작저의 집무실이 고성으로 가득 찼다.
“멍청한 놈.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찾아오길!”
하이레니아의 고함은 낯이 희게 질린 락센에게로 꽂혔다. 귀족들의 정보통은 이처럼 약삭빠르다. 고작 어제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이 락센의 귀까지 타고 들어와, 겁에 질린 락센이 자신의 가주가 저를 내칠까 알아서 후작저로 달려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오더라도 시간을 두고 왔어야지. 촉새 같은 자식이 그새를 못 참고 돼지 새끼처럼 여길 쳐들어와? 감히?”
“아, 아닙니다. 어르신이 걱정되어…….”
“아아, 내가 이젠 백작 조무래기에게 걱정까지 사는 가주구만?”
바닥만 바라보던 락센이 얼굴이 희게 질린 채 고개와 손을 마구잡이로 뒤흔들었다. 그러자, 앉아 있던 하이레니아가 벌떡 일어나 락센의 정강이를 휘둘러 찼다.
빡.
“억!”
“보기 좋게도 망쳤군. 네 놈이 해가 밝자마자 내 저택에 쫄랑쫄랑 찾아온 걸 그것들이 모를 줄 알고? 지금쯤이면, 이미 소문이 퍼지고도 남았겠지!”
라밀라에겐 툭하면 손부터 들던 락센은 하이레니아 앞에서는 한낱 잡초만도 못한 자세로 파르르 떨기 바빴다. 하이레니아는 눈주름을 접어 가며 락센을 향해 이를 드러내듯 미간을 좁혔다.
“다 필요 없고, 이번 일은 네 놈이 처리해.”
“예! 예예, 그럼요, 어르신! 뭐든 시켜만 주시면……!”
“대공저에 먼저 들어간 시녀. 그 시녀의 본가를 찾아내.”
락센은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멍청한 얼굴로 자신의 주인을 빤히 응시했다. 뒤를 캐려면 세르트 백작가를 캐야지, 난데없이 그 시녀의 본가를 캐기는 왜 캐는가. 이를 되물었다가는 정강이를 또다시 얻어맞을까 두려워 락센은 입을 다물었다.
“본가를 찾아내면 그 시녀의 가주를 찾는 건 시간 문제겠지. 그 가주 놈을 최대한 빨리 내 앞으로 데려와. 그럼, 그대의 과오는 땅에 묻어 다신 언급도 하지 않겠다.”
락센의 대답이 늦어지자, 하이레니아는 한심하단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황실 연회에 초대도 못 받은 무능한 자식. 이마저도 망치면 그땐 내가 널 묻을 줄 알아.”
“예, 어르신. 절대,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없어야지, 그럼! 고작 시녀의 본가를 찾는 일이 뭐 어렵다고! 쯧.”
하이레니아는 신경질적으로 곁에 있던 책상을 발로 찼다. 쾅 하는 소리에 락센은 머리를 바삐 굴렸다. 화난 주인의 기분을 풀어 줄 만한 이야깃거리를 궁리하다 뒤늦게 미친 사람처럼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