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74화 (73/122)
  • @74화

    “히익!”

    린느는 너무 놀라 그의 머리를 잡는 동시에 그에게서 발을 뺐다. 더럽게 뭐 하는 짓이냐며 따졌고, 그제야 뒤늦게 자신의 손이 밀러의 머리칼을 잡고 있단 걸 깨달았다.

    “미, 미안해요! 너무 놀라서…….”

    “놀랄 게 뭐 있다고.”

    “종일 구두를 신었어요. 게다가 호텔에 와서 씻지도 않았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린느.”

    밀러는 또다시 그 다정한 목소리로 린느의 귀를 녹였다. 귀뿐일까? 당장이라도 저 넓은 품에 안기고 싶을 만큼 색스러운 목소리이거늘. 린느는 아주 잠깐 사이에 수천 번 뒤흔들렸다. 술은 이토록이나 위험한 액체다. 망상의 구석에 던져 놨던 일이 눈 앞에 펼쳐지자, 술기운이 린느에게 속삭였다.

    ‘당장 밀러를 덮쳐.’

    저 잘난 남자를 코앞에 두고 그냥 잘 거야? 아주 호강에 겨웠군! 그녀의 이성은 이미 취기와 함께 끊어진 지 오래였고, 남은 건 감정과 본능뿐이었다. 이성으로 칭칭 감아 뒀던 속마음이 린느의 사고를 정지시키고, 심장을 쾅쾅 울려 댔다.

    ‘저질러? 확?’

    린느는 그가 내뿜는 유혹에 정신 차릴 틈도 없이 휘둘리며, 나름대로 이성적 판단을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고고한 남자가 끝내 그녀의 발등 위로 입술을 포개자, 모든 사고가 정지됐다.

    “흣……!”

    도톰한 입술이 생경한 곳에 닿자, 그녀의 척추가 전율을 머금은 듯 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때나마 최애였던 남자가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레 발등에 입을 맞춰 대니 정신을 못 차릴 수밖에. 앓는 소리를 내던 린느가 참지 못하고 그의 우아한 이마를 손바닥을 텁 잡았다. 그의 입맞춤은 그토록 사람을 다급하게 만들었다.

    “그, 그만! 대공님 마음은 알았으니까 그만해요.”

    “싫은가?”

    “아, 아니….”

    그는 뒤로 살짝 물러나더니 할딱이는 린느를 지켜봤다. 그녀가 힘겨워하는 것처럼, 그의 몸도 상당히 고됐다. 온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맹목적으로 그녀를 원하는 통에, 여간 곤욕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는 뜨거운 숨을 뱉으며, 린느를 기다렸다. 숨을 고르던 린느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뗐다.

    “일단 대공저에서 내쫓거나, 가신 자격을 박탈하지 않겠다고 약속부터 해 줘요. 그리고 이 방에서 나서면 오늘 있었던 일은 사라지는 거예요. 그게 힘들면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구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눈치 빠른 남자는 그녀가 제게 하룻밤을 제안하고 있단 것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렸다. 밀러는 김빠진 듯 웃으며 그대로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도 없어.”

    “말이 그렇단 거죠. 그리고, 솔직히 그런 편이 대공님께도 좋을 거 아니에요?”

    “도대체 뭐가 내게 좋을 일이라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럼요? 그럼 대공님은 어쩌고 싶은데요.”

    대뜸 되묻는 말에 밀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 기회를 냉큼 물어, 대공비에 앉히겠노라 선언하면 저 말괄량이는 조금 남은 비누처럼 그의 손아귀를 피해 도망갈지도 모른다. 그 상상만으로도 아찔해, 밀러는 다른 대답을 찾아 나섰다.

    “솔직히, 저도 대공님이 싫진 않아요.”

    허공을 바라보던 밀러의 시선이 린느에게 맺혔다. 이왕이면 좋아한다는 고백이 더 듣기 좋을 테지만, 얼마 전까지도 제게 관심도 없다던 그녀가 싫진 않다고 표현했으니 그거면 됐다.

    “싫어하기엔 너무 잘생긴 건 사실이니까요.”

    “그것뿐인가?”

    “그럼요? 제가 뭐 예전처럼 자존심도 없이 대공님 그림자를 쫓을 정도로 좋아하는 줄 알아요?”

    “그러게, 그런 때도 있었는데…….”

    밀러는 침울한 표정으로 침대 시트를 바라봤다. 제게 관심도 없다는 이 여인이 저를 목숨보다 사랑할 때도 있었단 사실이 뼈저리게 아팠다. 그녀가 기억을 잃었다며 오해하지 말라 했을 때 그녀의 말을 믿어 줬어야 했는데. 그녀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다그치기까지 했으니, 그녀 앞에서 한없이 죄인일 수밖에.

    마음 같아서는 과거로 돌아가 자신이 저지른 일을 없던 일로 바꾸고 싶었다. 그 생각 끝에 밀러는 자조했다.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할 수 없건만.’

    바꿀 수 없는 과거가 그의 심장에 꽂혔다. 그는 처연한 눈으로 침대를 빤히 바라봤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아픈 걸까. 언제부터 그녀의 말 한마디에 이렇게까지 아파하게 된 걸까. 또다시 가랑비 같은 그녀에게 폭삭 젖은 게 분명하다. 그는 내색하지 않고, 린느에게 시선을 맞춰 말했다.

    “그대가 내게 정을 뗀 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어.”

    마치, 이 부강한 제국이 하루아침에 왕국보다 못한 대공령으로 바뀌듯,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다 못해, 그 여인이 제게 의미 없는 하룻밤마저 제안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가 제안한 하룻밤이 싫은 게 아니었다. 그렇게나마 그녀의 곁을 지킬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을 테니까. 하지만, 술이 깬 다음 날 그녀가 자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할까 그게 걱정이었으며, 그녀에게서 좀 더 의미깊은 사람이 되고 싶단 욕심이 일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요?”

    따지듯 되묻는 그녀의 음성에 밀러는 말을 이었다.

    “내가 그대에게 반한 것도 절대 일어날 리가 없는 일이었고.”

    “하.”

    린느는 팔짱을 낀 채로 밀러를 응시했다. 취기를 핑계로 저 잘난 남자의 등짝을 짝 소리 나게 때려 주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퍽 진중하여 차마 그럴 순 없었다.

    “한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났어. 그렇지, 린느?”

    대답 없는 물음에 밀러는 홀로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 순간에도 저를 노려보는 린느를 바라보며, 유연하게 말을 이었다.

    “앞으론 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날 거야. 가령, 내가 그대를 사랑해 마지않는다거나.”

    거만하게 뜨여 있던 린느의 미간이 단번에 좁혀졌다. 그의 입에서 사랑이란 단어가 나온 탓이다.

    “순간의 감정일 뿐이에요. 요즘 우리 너무 가까이 지냈잖아. 그래서 그래요.”

    “그렇게 시작하는 것도 좋아. 원래 오래 보다 보면 정이 들고, 정이 사랑이 되기도 한다잖아.”

    “하, 연애도 안 해 봤으면서!”

    린느는 헛웃음을 노골적으로 뱉어 댔다. 그러자, 밀러는 소맷귀를 걷어붙이며 나른하게 웃었다.

    “여태 안 해 본 연애, 그대와 질리도록 하지.”

    그대와 연애하려고 여태 연애를 안 했나 봐. 밀러는 그 고고한 낯으로 잘도 능청을 떨었다. 린느는 그의 호기가 다시 기승을 부리자, 흘깃 노려보며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요?”

    “잘생긴 남자라며. 그래서 싫진 않다며.”

    그는 어느새 오만한 얼굴로 그녀의 옆자리를 잘도 차지했다. 마치, 자신을 위해 비워 둔 자리처럼 그는 자신의 영역을 철저하게 주장했다.

    “싫진 않다고 했지, 좋다고는 안 했거든요?”

    “처음부터 좋을 리가 없지. 나도 그랬거든. 그래도 다행이야, 싫진 않다니까. 시작이 그리 나쁘진 않아.”

    린느는 뻔뻔한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헛웃음을 뱉었다.

    “시작이요? 무슨 시작이요? 전 대공님과 시작하겠다 한 적도 없는데요?”

    “그렇겠지. 내가 말한 시작은 우리 관계의 시작이 아니라, 관계 개선의 시작을 말한 거였어. 내가 감히 그대에게 무슨 낯으로 관계의 시작을 권하겠나.”

    말대답이 청산유수로 나오자, 린느는 그만 입을 닫았다. 거대한 장벽을 맞닥뜨린 신출내기 기사처럼 어정쩡한 자세로 헛웃음만 내뱉었다. 그러자, 밀러는 얄밉도록 어깨를 들썩이더니 린느의 옆자리를 제대로 차지했다. 그러자, 린느는 뭐 하는 짓이냐 따지듯이 눈썹을 굽이치며 밀러를 노려봤다. 눈으로 욕하듯 노려보자, 밀러는 뭐가 잘못됐냐는 듯이 주변을 스윽 훑었다.

    “왜. 이왕이면 잘생긴 남자가 옆자리를 차지하는 게 좋지 않겠나?”

    “어머, 재수 없어.”

    “재수 없이 잘생긴 남자가 잠도 재워 준다니 이용해 보지 그래.”

    밀러는 이불을 들추더니, 제 품에 안기라는 듯이 그녀에게 팔을 뻗었다.

    재수가 없긴 해도 썩 나쁜 조건은 아니었기에, 린느는 그의 품에 안겼다. 역시나, 예상대로 빠짐없이 탄탄했다. 간간이 이 도도한 남자의 품에 숨이 막힐 만큼 폭 안겨 보고 싶단 욕구가 치밀 때가 있었는데, 그 소원은 제대로 이룬 셈이다.

    ‘여차하면 기억 안 난다고 잡아뗄 거야. 아니면 정말 기억이 안 날지도 모르고…….’

    눈꺼풀이 무거워지자, 린느는 그의 널찍한 품을 욕심쟁이처럼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 어떤 고급 향수도 흉내 내지 못할 향기가 그녀의 코끝을 자극했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린느는 그의 품을 만끽했다. 밀러는 그런 그녀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눈을 폭 감았다.

    “잘 자, 린느.”

    그의 낮은 음성이 린느의 흰 목덜미를 타고 척추에 전율을 일으켜, 흠칫 몸을 떨었다. 린느는 그의 품에 파고들며 투정을 부렸다.

    “대공님은 잠 한숨도 자지 마요.”

    말미에 그가 커다란 손으로 린느의 뒤통수를 넉넉하게 받쳐 그를 향해 끌어당겼다. 그의 심장 소리와 하나가 된 것처럼, 린느의 심장도 콩콩 뛰었다.

    “그럼 내 몫까지 잘 자.”

    그 말을 끝으로, 그는 그녀의 손끝 하나 건들지 않고 재우는 데에만 집중했다. 린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 잠들었고, 밀러는 뜬눈으로 지새웠다. 애초에 그녀를 품에 안고서, 잠이 올 리가 없지 않은가. 무척이나 당연한 결과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