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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73화 (72/122)

@73화

“무, 무섭다고요! 며, 몇 번을 말해요!”

“미안하다. 알았으니, 제발 떨어져 줄래?”

불안에 떨던 린느의 눈매가 처연하게 바뀌었다. 어둠보다도 그의 매정한 말이 더욱 아프게 느껴진 탓이다.

이 남자, 내 편이 아니었구나. 가진 적도 없었지만 괜히 뺏긴 기분이 들어 상실감에 속이 아렸다. 그래, 대공이나 되는 남자한테 내 두려움은 대공저 담벼락보다도 못한 존재지. 린느는 입술을 꽉 깨물며 울음을 참았다. 평소라면 쿨하게 맞받아쳤겠지만, 거친 파도에 던져진 것처럼 감정이 들쑥날쑥 넘실거렸다. 술기운이었다.

“린느.”

“저리 가요.”

누구 때문에 내가 오늘 그렇게 술을 마셨는데. 누굴 위해서 자리를 보전했는데! 처음에는 서운했지만, 점차 화가 나고 억울함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더불어, 어둠은 뭐 이렇게 짓궂은지 넘실거리는 감정 안에서 두려움도 가득했다. 최악이다.

“린느, 그런 뜻이 아니었어.”

구차한 변명이 등 뒤로 들렸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면 지금이라도 곁에 있어 달라 말하고 싶었지만, 자존심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안 죽어.’

어둠 속에 갇혀 엉엉 울 때도 결국 죽지 않고 살지 않았던가. 린느는 입술이 퉁퉁 부을 때까지 짓씹었다. 두려워, 아니야. 안 두려워. 하나도 안 무서워. 그래야만 해. 그렇게 되뇌던 순간, 따듯한 손길이 그녀의 머리칼을 정리해 줬다.

“미안해. 그게 그런 뜻이 아니었어, 절대.”

절절한 고백이었다. 그 오만한 남자가 내는 목소리가 맞나 싶을 만큼 애절한 목소리였으며, 말미에는 걱정 섞인 숨소리도 함께였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 목소리에 몸을 살짝 틀어 그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에 늘 날렵하게 벼려 있던 냉랭함은 온데간데없이 버려진 맹수처럼 불안만이 가득했다. 그도 이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구나. 믿기지 않았으나,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난 나약한 인간이라, 그대와 숨이 닿으면 어쩔 도리가 없어.”

그의 심장 소리가 쿵쿵 울렸다. 닿을 듯 말 듯 스친 그의 손이 뜨거웠고, 조용하게 가라앉은 공기 사이로 그의 심장 소리가 낮게 들렸다.

“거짓말.”

밀러는 그녀의 대답에 기꺼워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얇은 셔츠 너머 쿵쾅거리는 가슴팍에 가져다 댔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달빛에 닿아 신성한 성물처럼 빛이 났고, 그런 손이 린느의 손을 넉넉히 움켜쥐자 그녀는 온몸이 비비 꼬일 만큼 온몸이 달아올랐다.

“속고만 살았나?”

평소 그 무심한 얼굴에서 바뀐 거라곤 얕은 미소 하나뿐이었건만, 밀러의 심장은 린느를 주인이라 여겼는지 그녀의 손길이 닿자 더 크게 쿵쿵 울렸다. 그의 검은색 머리칼 끝이 울릴 만큼 선명한 두근거림이었다.

“미안해, 염치없어서.”

그렇게 그녀를 향해 모진 말도 서슴없이 뱉었던 자신인데, 이제 와서 그녀를 향해 심장이 두근거린다고 말하는 꼴이 저 자신도 몰염치하게 느껴졌다. 그것도 취한 여인에게 고백하는 꼴이라니. 밀러는 붉은 입술이 바싹 타들어 갔다.

이러려고 자신을 가신으로 뒀냐며, 의도부터 불순한 남자라며 손가락질할까 봐 울컥 두려움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녀가 저를 비난한다면 비난한 대로 기꺼이 손가락질을 받고자 했다.

“…….”

그러나 그녀가 택한 건 비난도 책망도 아니었다. 그저, 말없이 그의 품에 안길 뿐이었다.

그녀의 작은 체구가 남자의 한 품에 들어오자, 밀러는 기다린 사람처럼 그녀를 끌어안았다. 남김없이 서로가 닿길 바라듯, 서로를 끌어안고서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밀러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스르륵 눈을 감았다.

들끓던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더니, 여태 피곤한 줄 몰랐던 온몸이 노곤하게 풀렸다. 이 이상 욕심을 부린다면 그건 필시 사람이 아닐 테지. 밀러는 품에 린느를 안은 것만으로도 세상 모든 걸 발아래 둔 사람처럼 마음이 벅찼다. 당장 닥칠 일들조차 사소하게 느껴질 만큼, 여한이 없었다. 잠시나마 평화로운 적막이 이어졌다. 잠든 줄 알았던 그녀가 손을 뻗어 밀러의 뺨을 잡아끌기 전까진.

“취했어여? 취한 건 난데?”

린느는 밀러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꿈은 아닌 거 같은데 또 꿈 같기도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오만한 남자가 제게 그런 말을 할 리도 없고 이렇게 안아 줄 리도 없지 않은가. 린느는 그의 얼굴을 끌어와 빤히 바라봤다.

짙은 속눈썹 아래에 일렁이는 금빛 눈동자. 마치 시트린처럼 빛나는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더 황홀하게 빛을 뿜었다. 눈두덩이에 입술을 맞추고 싶을 만큼 깊고 탐스러운 눈이었다. 매번 제게 눈을 맞출 때마다 속까지 들여다볼 것처럼 그윽하게 응시하던 금빛 눈동자. 린느는 그가 자신의 청록색 눈동자를 사랑한다는 걸 까마득히 모르고 그의 그런 눈빛을 좋아하게 됐다.

달달한 술기운을 뒷배로 삼아, 린느는 밀러에게 물었다.

“뽀뽀해도 돼여?”

밀러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곧장 답하기를 꺼리며 고민에 빠졌으나 린느는 애당초 그의 대답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언제 답할지도 모르는 그의 대답은 가볍게 무시하고, 린느는 그의 작은 얼굴을 가져와 눈두덩이 위로 입술을 맞췄다. 그 탓에 밀러의 한쪽 눈이 가볍게 감겼고, 아직 그녀의 입술을 맛보지 못한 한쪽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이게 무슨 행복인지!

다른 한쪽 눈두덩이도 제 앞에 강림한 여신께 바치리라 다짐하던 순간, 린느가 밀러의 가슴팍을 밀치며 침대 위로 넘어트렸다. 반듯하게 넘긴 그의 흑발이 나풀거리며 침대 위로 흐트러졌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는 린느의 눈동자는 퍽 야릇했으며, 술기운이 가득 실린 그녀의 뺨은 발갛게 올라있었다. 그 탓에 밀러는 다시금 달아오른 건강한 자신의 신체를 힐난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린느는 밀러의 반응을 보며 즐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게 꿈인가 싶었으나, 그건 또 아닌 거 같아 꽤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에 그가 보인 행보를 보고 있자면, 냉정히 말해서 그가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단 건 거부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다정하게 굴었구나?’

이 똑똑하다 못해 영악한 남자가 제게만 솜사탕처럼 굴던 이유를 이제야 몸소 깨달았다. 입으로는 얼마든지 거짓말할 수 있겠지만, 이 순간에도 그녀 손바닥 밑에서 쿵쾅거리는 그의 심장은 주인을 닮아 거짓말엔 젬병이었다. 그녀는 턱 끝까지 채워진 그의 셔츠 단추를 톡톡 풀며 취기에 어눌해진 말투로 말했다.

“이젠 제가 아니라, 대공님께서 절 좋아하는 거네요?”

‘크흐, 꼭 해 보고 싶은 말이었는데 이렇게 해 보네.’

린느는 승리의 미소를 삼키며, 제게 백기를 든 남자를 응시했다. 그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확실히 맞는 말이야.”

“어……? 부정할 줄 알았는데…….”

취기 오른 린느의 눈매가 흠칫 굳자, 밀러는 제 옷을 탐하던 그녀의 손목을 느슨하게 잡았다. 마치, 그녀의 시선을 갈망하듯이.

“그럴 리가. 진심이야.”

“지금은 진심이겠죠오…. 지금은 절 좋아한다고 하셨으니까.”

“그건 또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럼 내가 오늘은 그대를 좋아하고, 내일은 다른 여인을 좋아할 거란 소리인가?”

“그야 모르죠? 대공님이 원해서 못 이룰 건 없으니까요.”

“내가 언제부터 그런 호색한이 되었는진 모르겠으나, 그건 오해야.”

그의 말엔 진심이 담겨 있었으며, 린느 역시 그가 호색한이 아니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내가 그쪽 반려일 리가 없잖아.’

술기운을 머금은 그녀의 눈매가 반쯤 뜨인 채로 말없이 그를 내려다봤다. 그러자, 밀러는 양팔을 펼쳐 그녀가 제게 안기기를 종용했다. 신이 그를 편애한다는 건 진즉 알았지만, 달빛마저도 그를 편애할 줄은 몰랐다. 달빛이 그의 뾰족한 코끝과 도톰한 입술에 맺혀 영롱하게 빛났다. 그가 펼친 양팔은 대천사의 날개처럼 굳건했으며, 거부할 수 없는 맹목적인 명령이었다. 린느는 그에게서 우위를 쟁탈했다며 기뻐하던 것도 미뤄 두고, 그의 품에 폭 안겼다.

“자, 잠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반쯤 풀린 셔츠 사이로 그의 탄탄하고 굵은 가슴 근육과 복근이 비쳤다. 린느는 취기와 함께 그의 몸매를 따라 살피며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옷을 걸쳐도 어울리는 남자는, 무언가를 걸치지 않았을 땐 더 아름답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탓이다.

그때, 남자는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눈꺼풀을 반쯤 내리깔았다. 마치 여신께 경배를 드리듯이 그의 움직임은 퍽 조심스러웠다. 한쪽 손등에 입을 맞춘 그는 눈동자만 움직여,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야릇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에 린느는 그만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까지도 이 오만한 남자를 침대 위로 넘어트렸단 사실이 흥미롭고도 재밌었다. 한편으론, 그를 시험해 보고 싶었고 그가 가진 그 마음이 진심인지 아닌지, 얼마나 깊은지 기어코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벌인 짓인데, 그는 당황하지도 않고 오히려 기다렸단 듯이 고요한 색기로 그녀를 휘어잡는 바람에 린느는 숨을 들이켜는 것밖엔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어질어질하던 찰나에 그는 뒤로 물러나 그녀의 새하얀 발을 두 손으로 쥐었다. 원만한 굴곡이 진 발등은 작은 상처도 하나 없이 잘 다듬어 둔 조각상처럼 예뻤다. 밀러는 그녀의 발등에 입을 맞추고자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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