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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72화 (71/122)
  • @72화

    “크흐…!”

    린느는 구수한 감탄사와 함께 말린 고기를 어금니로 질겅질겅 씹으며 하이레니아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까는 전쟁터에서 구른 노련한 백전노장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제국의 해상을 누비는 거친 선장의 모습이 보였으니. 속이 아릴 만큼 독한 술을 매일 위장에 들이부으며, 거친 바다를 누비는 해적을 어금니에 박힌 금니로도 능히 씹어먹을 베테랑 선장 같은 눈이었다. 하이레니아는 그런 그녀를 보며 진저리를 치며 린느에게서 시선을 뗐다.

    밀러를 안주로 삼으려던 하이레니아는 린느의 안주로 전락했다.

    * * *

    “내 그대를 위해 다른 이들을 먼저 보냈건만! 동트는 걸 함께 봐야지 않겠나! 내 친우들과 함께 말일세!”

    황태자와 린느의 술자리는 끝을 모르고 달렸다. 밀러는 독주를 물처럼 마셔 대는 그녀에게서 잔을 뺏기도 했으나, 린느는 황태자의 권력 뒤에 숨어 밀러에게서 잔을 되찾길 반복했다.

    “크흐! 부황께서 입이 닳도록 하신 말씀이 있네. 대공과 같이 과묵하고도 힘 있는 자가 내 곁에 둘만 있으면, 더는 걱정할 게 없다 말일세!”

    “아이구, 그런 말씀 마세요. 전하께선 대공님 없이도 잘만 하실 분입니다! 안 그래요? 각하?”

    저 얄미운 웃음을 보고 어찌 실소를 참을 수가 있을까. 밀러는 린느를 타박하듯 째려봤다.

    “아하하! 정말 그대의 입담은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군! 그래, 대공저의 가신이 되려면 이 정도 입담은 구사해야지. 게다가, 그대의 그 기개는 또 어떻고! 내 그대의 이 패기를 잊지 않으리라!”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귀족들 천지인데도 린느는 그 무거운 분위기를 가볍게 압도하며 가지고 놀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황태자는 린느에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간혹, 장난하듯 밀러를 타박하며 그녀에게서 이런 점은 배우라는 말도 얹었다. 그럴 때마다 밀러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린느의 입에 온갖 안주를 물려 줬다. 마음 같아서는 망할 술병을 뺏고 싶었으나, 그건 무리였다

    얼큰하게 취한 황태자가 밀러의 손을 잡고 황궁에서 묵고 가라며 떼를 부리는 통에 호텔로 향하는 걸음이 늦어졌다. 밀러는 자신의 품에 안겨 잠든 린느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삼켰다. 말릴 틈도 없이 독주를 마셔 대는 건 도대체 무슨 오기인지. 밀러는 한숨을 내쉬며, 커다란 침대 한가운데에 그녀를 눕혔다. 그러자, 원래도 작아 보이던 그녀의 가느다란 몸이 더욱 가녀려 보였다.

    “…….”

    밀러는 홀린 사람처럼 린느를 응시하다가 끝내 코트를 벗으며 시선을 뗐다. 더 오래 홀렸다가는 위험하겠다는 정확한 판단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왜 여인들의 옷은 하나같이 저렇게 위험하게 생긴 걸까? 제국군의 군화보다도 강하게 동여맨 몸통이 끊어질까 불안했다. 잠깐이라도 그녀를 깨울까 고민하다가 그만,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덜컥.

    난데없이 열린 문에 문을 지키던 이들이 숨을 들썩이며 놀랐다.

    “가서 라밀라를 데려와.”

    “라, 라밀라 님을요? 지금쯤이면 이미 잠드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뭐 어쩌란 거지? 잠들었으면 깨우면 그만인 것을, 별걸 다 걱정이란 듯이 금안이 그들을 무심히도 쏘아봤다. 그때, 등 뒤로 인기척이 들리자, 그는 다시 문을 닫고 린느에게로 돌아갔다.

    “일어났나?”

    린느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간간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독한 숙취가 날카로운 망치로 머리를 때리듯 괴롭힌 탓이다. 린느는 말없이 검지로 입을 막으며, 입을 다물라는 무언의 명령을 내렸다. 밀러는 제 입을 막은 얇은 검지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뱉었다.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짓이냐며 따지려던 찰나에 꼭 감겨 있던 린느의 눈꺼풀이 뜨였다. 게슴츠레한 눈빛에선 평소 그녀에게 느낄 수 없던 색기가 가득했다.

    “저, 왜…… 여깄죠?”

    “하…. 기억 안 나나?”

    초대된 귀족을 모두 내보내고 세 사람만이 대연회장에 남아 술잔을 나눴고, 술에 취한 린느와 황태자는 천하를 호령하는 친우가 되자며 어깨동무까지 해 댔으니. 밀러는 그 꼴을 자신만 목도하여 퍽 다행이라 여겼다. 부디 황태자가 내일 아침이면 오늘의 일을 잊길. 될 수 있으면 린느가 대연회장에 들어선 그 순간부터 끝까지 모조리 싹 잊길.

    “기억 좀 안 날 수도 있지. 뭘 또. 원래 술을 마시면 완벽한 사람도 실수하기 마련이에요.”

    취했으면서 말대꾸는 여전히 재상이 될 재목이군. 린느는 뻔뻔하게도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밀러는 실소를 뱉으며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의 몸을 받쳐 줬다.

    “이왕 일어난 김에 드레스를 정리하고 자는 건 어때.”

    린느는 듣기 싫은 말은 눈을 감고서 답을 피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밀러는 못 말리겠다며 다시 얌전히 침대에 눕혀 줬다.

    “이불 차지 말고 자도록.”

    “잘 때도 명령.”

    뭐라 했냐며 따질 틈도 없이 린느는 눈을 감고 뒤로 돌아누웠다. 그래, 차라리 잠을 자는 게 나아. 밀러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향했다. 그때, 스르륵 뭔가의 끈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툭.

    밀러는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자신이 귀가 어떻게 잘못된 게 아니라면, 분명…….

    투둑.

    옷가지가 침대 밖으로 던져지는 소리가 들리자, 밀러는 저주받은 동상처럼 자리에서 그대로 굳었다. 마치, 침실 바닥에서 손이 올라와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 거 같았으며 심장은 또 왜 그리 빨라지는지 저 자신이 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아씨…….”

    그녀는 옷가지를 집어 던진 걸로 모자랐는지, 무언가를 자꾸만 내던지고자 풀고 또 풀었다. 간간이 짜증을 부리며 왜 안 풀리냐 한탄하기도 했으나, 그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혼난 아이처럼 얌전히 소파에 앉아 벽을 바라보는 게 최선일 테지.

    하지만 그마저도 녹록지 못했다. 발목만 잡힌 줄 알았으나 아랫배가 당기는 동시에 앞섬이 부풀어 한 걸음 내딛기조차 쉽지 않았다. 그는 괜스레 건강한 자신의 몸을 욕하며 다그쳤으나, 그의 건강한 신체는 죄가 없었다. 굳이 죄를 따지자면, 그가 그녀에게 품은 감정에서 온 상황 탓이겠지.

    “굿나잇, 밀러!”

    그 발랄한 여인은 제 몸에 자유를 선사하더니, 이젠 그를 향해 호기로운 굿나잇 인사마저 던졌다. 발칙하고도 앙큼한 짓에 밀러는 코웃음을 치며 뜨거운 숨을 뱉었다. 누군 누구 때문에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데, 굿나잇? 절대 굿나잇하지 못할 그에게는 조롱이나 다름없었다.

    인고의 시간 끝에 겨우 소파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밀러는 늘어지게 뒤로 기대며, 눈꺼풀 위로 손등을 얹고서 불순하지 않은 생각을 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래, 대공저 뒷마당을 생각하자. 자연보다도 건전하고 건강한 게 어딨겠는가. 농부들의 땀으로 일군 드넓은 밭에는 그들이 자식처럼 돌본 작물들이 신성한 과실을 맺어, 초록빛 천지로 가득한 공간. 초록빛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이지. 긴장으로 굳어 있던 그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초록색…. 청포도, 린느.’

    침대 위에서 늘어지게 잠을 청하는 여인의 눈동자와 비슷한 색. 생기가 가득한 맑은 눈동자가 밀러의 머릿속에 그려진 대공저 뒷마당을 모조리 지우고, 린느의 말간 얼굴만 떠올리게 했다. 게다가, 그 사랑스러운 여인은 엎드리면 코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새근새근 잠을 청하고 있지 않은가. 밀러는 그만 상상을 포기하고 잔인한 현실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

    난데없는 명령조에 밀러는 두 눈을 번뜩 뜨고 깜빡거렸다. 자신이 헛것을 들었나 금안을 좌우로 움직이던 찰나였다.

    “물!!”

    “물.”

    물이란 말에 밀러는 저도 모르게 채신없이 말을 따라 읊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이제 막 임관한 신병처럼 그의 행동은 무척이나 빠릿빠릿했다. 반면, 린느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물만 외쳤다.

    달그락.

    그는 생전 처음 하는 물심부름에도 그녀의 속이 걱정되기만 했다. 대공저에서 연회가 열릴 것이 걱정되기도 했으나, 그날에도 이처럼 과음을 할까 걱정이 앞섰다. 그렇다고 마냥 그녀의 음주 생활을 막는 건 비인격적인 처사일 테고, 이 말괄량이를 무어라 설득시켜 당분간이라도 금주를 시킬지 걱정이었다.

    “물! 물!”

    “그래, 물.”

    린느의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단번에 타파했다. 그는 즉각 침대로 달려가 그녀에게 물잔을 건네며 시선을 벽에 고정했다. 차라리 사용인 노릇을 하고 말지 이게 무슨 고문인가.

    “고마워!”

    말이 무척이나 짧아졌으나, 밀러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기 위해 그녀의 말투 따윈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린느는 물컵을 단숨에 비우더니 협탁 위에 컵을 거칠게 내려놨다. 그제야 울렁거리던 속이 차분해졌으나, 주변에 깔린 어둠이 그녀를 향해 아구를 들었다.

    “…….”

    금방이라도 깨질 적막이 흘렀고, 린느는 주변을 돌아보며 숨을 할딱 들이쉬었다. 안 그래도 머리는 아프고 속은 울렁거리는데 눈앞에 어둠이 가득해지자 숨쉬기도 벅찼으니. 린느는 이불을 얇은 옷가지 위로 여몄으나, 어둠은 점차 침대 위까지 번졌다.

    원래부터 어두웠으나, 그녀 눈에는 검은색 연기가 침대 위까지 번진 것처럼 보였고 그녀는 두려움에 찬 얼굴로 밀러의 셔츠를 잡아당겼다.

    “뭐, 뭔가?”

    “무, 무서워. 저, 저것 좀!”

    두려움이 턱 끝까지 닥치면 술기운이라도 가셔야 하는데, 술기운과 두려움은 별개의 문제였다. 린느는 진득하게 올라온 숙취와 취기에 맞서면서도 어둠과도 싸워야만 했으니. 누가 봐도 그녀가 질 싸움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녀는 든든한 지원군을 침대 위로 올려 두길 자처했다.

    털석.

    그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그만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것도 얇은 속드레스만 입은 린느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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