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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71화 (70/122)
  • @71화

    귀족의 콧잔등엔 땀이 가득했으며, 어디서 묻혀 왔는지 그의 정장에는 자잘한 잎사귀가 가득했다.

    “후께서 명하신 대로 숨어서 지켜봤습니다.”

    하이레니아는 그의 말에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무리 대연회장이 넓고 황태자의 웃음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해도, 밀러와 황태자 앞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건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다. 귀족의 입을 틀어막기도 전에 그의 가벼운 입이 신난 듯이 말했다.

    “단순한 취기가 아닌 듯했습니다. 분명, 병을 숨기고 있…….”

    하이레니아는 그의 입을 막기 위해 빈 잔을 검지로 톡톡 쳤다. 그러자, 귀족은 하던 말을 멈추고 그의 잔을 채웠다. 하이레니아는 반쯤 채워진 잔을 유연하게 들어 마셨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곁에 있던 귀족뿐 아니라 금안도 존재했다.

    ‘귀신 같은 놈.’

    금안과 마주치자마자 억 소리를 내며 놀랄 뻔했으나 방방 뛰는 심장을 뒤로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척 연기했다. 다년간 이 지독한 귀족 사회에서 살아남으며 얻은 결과물이었다. 밀러는 말없이 하이레니아를 응시했고, 하이레니아는 그의 잔악한 시선에 등줄기를 덥혔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시선을 달래고자 했으나, 밀러는 한참이나 빤히 바라본 후에야 시선을 거뒀다.

    ‘저런 놈이 아프다고?’

    정녕 아픈 사람의 눈인가? 두 번 아팠다가는 눈빛만으로도 사람의 숨통을 끊을 기세이거늘! 하이레니아는 헛웃음이 올라왔다. 하지만, 어떻게 얻은 정보인데 이를 쉬이 넘길 순 없었다. 하이레니아는 신나게 떠들고 있는 황태자를 바라보며, 그의 시선이 제게 닿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황태자는 반평생 떨어져 지내다 만난 친우를 대하듯, 린느와 재잘거리기 바빴다.

    “오호, 그래서 그대는 독주를 주로 즐긴다는 말인가?”

    “네, 전하. 와인도 맛이 좋긴 하나 과일주는 숙취가 있어 다음날 눈뜨기가 버겁습니다.”

    “그렇다 하여 이 독한 술을 한입에 털어 넣는 여인은 또 처음이구나! 아니지, 대공도 한입에 털어 넣는 건 못 본 듯한데?”

    “그건 전하께서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밀러가 웃으며 말을 받아치자, 황태자는 하하 웃으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오랜 친우가 대공저에서 은거한단 소식에도 황태자인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넉살 좋은 공작이 황태자의 몫까지 대공 곁을 지켜 줬고. 그 덕분인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털고 일어나 함께 술잔을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웃음이 가시지 않을 수밖에. 황태자는 말없이 밀러와 린느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상하게도 어울리는군.’

    제국에 있는 모든 어둠을 삼킨 것처럼 퇴폐미가 가득한 대공과 제국에 존재하는 온갖 달콤함을 지닌 이 여인이 퍽 어울려 웃음이 났다. 대공저의 가신이라 소개하긴 했으나, 밀러가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남달라 황태자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연애라곤 학을 떼던 친우가 사랑에 빠져 바보처럼 웃는 모습에 홀로 보기 아쉽단 생각마저 들었다.

    ‘공작이 이 꼴을 보면 배를 잡고 뒹굴겠군.’

    섀르넌의 표정을 상상하며 황태자는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그때, 하이레니아와 시선이 닿자 황태자는 웃음기를 쏙 빼며 시선을 돌렸다. 이를 지켜본 린느가 눈으로는 한없이 순하게 웃으며, 자연스레 손으로 입을 가리고 황태자에게 일렀다.

    “저기 자리하신 분께선 무척 무서운 분인 거 같습니다.”

    “응?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두 사람이 소리죽여 속닥거리자, 올곧게 앉아 있던 밀러의 상체가 미세하게 두 사람을 향해 기울어졌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길래 귀까지 내어 주고 속닥거린담. 밀러는 실소를 뱉었다. 린느는 머리칼을 만지는 척하며 말을 이었다.

    “그냥 저 부리부리한 눈매가 무섭습니다. 힉, 또 보셨어요? 우리 쪽 쳐다보는 거 같은데.”

    그래, 저 목석같은 남자가 왜 린느와 시선만 맞추면 바보처럼 느슨하게 웃는지 잘 알겠다. 황태자는 웃음을 참으며 헛기침을 하더니, 린느의 귀에 속삭였다.

    “그래봐야 대공의 눈보다 무서울까. 후작의 눈보단 대공의 금안이 더 무섭다네. 그대도 잘 알 텐데.”

    “그, 그러긴 해요.”

    “이런, 그대가 대공의 역성을 들 줄 알았건만. 이리 쉬이 공감할 줄은 몰랐다.”

    황태자는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짓궂게 웃었다. 참다못한 밀러가 무슨 대화를 하냐며 물었으나, 황태자는 입을 꾹 닫고 린느에게 곁눈질했다. 물어볼 테면 그녀에게 물어보란 무언의 대답이었다. 그러자, 방금까지도 경계로 가득하던 밀러의 눈매가 느슨하게 풀린 채로 린느를 향했다. 린느는 대답을 피하고자 과일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황태자는 기분 좋게 올라온 취기에 귀여운 커플을 바라보더니, 나아가 대연회장을 천천히 훑어봤다. 이제 모든 게 다 제자리를 찾았으니 대공과 그의 가신을 위한 연회도 준비해야겠다. 황태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잔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이 잔을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으니, 진풍경이었다.

    “올해 연회는 빈자리 없이 가득 채워져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구나! 앞으로도 자리 비는 곳 없이 잘 지내봄세.”

    황태자는 잔을 단번에 비우며 턱 하니 빈 잔을 내려놨다. 그러자, 자리에 있던 귀족들도 역시 잔을 비우기 시작했으나 대부분은 채 비우지 못하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때, 린느가 잔을 단번에 비우며 머리 위로 잔을 털었다.

    “황공합니다!”

    말로는 황공을 떠들었으나, 그녀의 눈엔 두려움이나 경외심은 없었다. 존경은 있었으나, 실로 패기로운 청록색 눈동자였다. 그런 그녀는 노련한 귀족들 사이에서도 단연 존재감을 뿜어 대며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그래, 말이 나왔으니 해 두겠네. 대공, 내 그대를 위한 연회를 베풀고 싶은데 언제가 좋겠나?”

    린느만 바라보던 금안이 뒤늦게 황태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무슨 전쟁에서 승리를 쥐고 돌아온 개선장군도 아니건만. 됐다며 정중히 거절하려던 찰나였다.

    “때마침 연회 시즌이니, 좋은 자리가 될듯합니다!”

    “맞습니다! 부디 저희를 초대해 주시어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각하께서 주최하신 연회에 꼭 참석하고 싶습니다.”

    귀족들의 우렁찬 바람들이 대연회장을 무섭게 울렸다. 한 명이 말을 꺼내자 곁에 있던 귀족들도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고, 곧 그들의 말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이를 조용히 지켜보던 황태자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래, 내가 먼저 운을 뗐으니, 그대의 연회를 성대하게 차려 주지.”

    “황궁의 연회장을 황족도 아닌 대공이 누릴 순 없습니다. 전하의 깊고도 깊은 뜻을 제가 모두 헤아릴 순 없으나, 영광으로 삼아 전하의 뜻을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말도 잘하지. 됐어. 이번엔 나도 봐주지 않아.”

    황태자는 고개까지 휘휘 저으며 밀러의 입을 막았다. 그때, 또 다른 귀족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황궁 연회가 불편하시다면 대공저에서 연회를 여시는 게 어떠신지요?”

    “그래! 대공저에서 연회를 열게. 내 모든 비용을 사비를 들여서라도 보탤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가 돈을 걱정할 리가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황태자는 기어코 대공저에서의 연회를 약속했다. 그러자, 밀러는 묵묵부답을 유지했다.

    “그 넓은 대공저를 이럴 때 써먹는 게지. 대공, 너무 연회를 귀찮게만 여기지 말고 이번에야말로 즐겨 보게나.”

    어린 황태자가 무얼 알까. 밀러의 사정을 모르는 황태자는 신난 귀족들과 함께 연회를 약속했다. 반면, 능구렁이처럼 기회만 엿보던 하이레니아와 그의 심복들은 웃음을 삼키기 바빴다.

    ‘가만히 있었는데 이게 무슨 복인지를 모르겠군!’

    하이레니아는 희게 질린 밀러의 표정을 보며 그의 불안을 안주 삼아 잔을 기울였다.

    ‘선대 대공에게 시달린 악몽과 재회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해 참을 수가 있어야지. 고작 선대 대공이 아끼는 술 한 잔 마셨다고 다 죽어 가던데, 아주 대공저에서 연회를 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감도 안 잡히는군!’

    의원들 손에 실려 나가는 게 아닐까 불손한 상상을 이어 가며 하이레니아는 밀러의 표정을 낱낱이 살폈다. 황태자와 술잔을 나누던 여유는 사라지고, 그의 흰 피부가 더욱 희게 질려 갔다. 다른 귀족들은 읽지 못할 테지만, 불안을 먹고 자란 하이레니아는 귀신처럼 불안을 감지하고 읽어 내는 재주가 있었다.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이복 여동생에게서 열등감을 느끼고 불안을 물먹듯이 마셔 대던 그였다. 그러니, 남들보다 불안을 더 잘 읽어 낼 수밖에.

    하이레니아는 관전하는 자세로 밀러를 바라봤다. 언제까지 고고한 척 점잖을 떨지 궁금하단 듯 조소를 섞어 바라봤다.

    “그럼 그날 전하께서도 참석하실 수 있으신가요?”

    청량한 목소리가 황태자를 향해 꽂혔고, 목소리의 주인은 린느였다.

    “그럼 당연하다마다. 연회를 베풀어 놓고 내가 빠지면 꼴이 우습지.”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 대공님을 위한 연회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술이 깬 건지, 애초에 취한 적이 없던 것인지. 린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황태자를 바라보며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밀러에게서 쥐구멍이나 찾는 쥐새끼 꼴을 기대하던 하이레니아가 미간을 찌푸린 채 린느를 빤히 응시했다.

    ‘건방지게, 낄 자리 못 낄 자리 구분도 못 하는 조무래기가 감히……!’

    하이레니아가 눈으로 욕하듯 린느의 옆태를 응시하자, 린느가 고개를 휙 돌려 하이레니아를 빤히 응시했다. 시선이 마주친 하이레니아는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쳤다. 그녀 역시 저를 욕하듯 노려보며 무식하게 가득 차 있던 술잔을 단숨에 비운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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