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그는 주인을 지키는 맹수처럼 날카롭게 주변을 훑어보며, 라밀라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락센에게 여인이 있어. 알고 있었나?”
“네, 그럼요….”
제게 여인이 생겼다며, 선대 대공의 요부도 별거 없다 비웃던 락센의 얼굴이 떠올라 치를 떨었다. 그래 놓고 다른 사람들 앞에선 애처가인 척 위선 떠는 꼴이란. 라밀라는 지겹단 듯 도리질을 했다.
“그 여인, 하이레니아 후의 여동생이다. 그것도 알고 있었나?”
바닥만 바라보던 라밀라가 흠칫 놀라며 밀러를 올려다봤다. 이내, 놀란 기색이 역력하던 그녀의 눈가에 혐오가 들어찼다. 하이레니아 후작의 여동생은 부인들 사이에서도 제국에서 가장 안타까운 여인이라 불릴 만큼 비탄의 늪에 빠진 여인이니, 라밀라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불행이 이복 오라비인 하이레니아의 철저한 계획에 의한 것이란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 라밀라는 허가 찔린 사람처럼 숨도 쉬지 못했다.
“자신의 여동생을 어찌, 어찌……!”
밀러는 고개를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태를 보이며 충고하듯 말했다.
“당분간 락센과 하이레니아를 주시하도록.”
밀러는 그 짧은 말만 남겨 두고 대연회장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때, 어둠을 집어삼킨 것처럼 캄캄한 곳의 덤불이 사르륵거리며 움직이자, 그의 금안이 그 부스럭대는 덤불에 고정됐다. 마치, 맹수가 사냥하기 직전의 모습처럼 숨도 쉬지 않고 매섭게 응시했다.
“…….”
반질반질 잘 닦인 그의 구두코가 그 덤불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어둠을 삼킨 덤불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각하? 각하!”
밀러는 린느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제게 뛰어오는 그녀를 향해 곧장 몸을 틀었다.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저리 뛰면서까지 제게 달려오는지. 그는 잔소리 대신에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기다려 줬다. 린느는 두어 걸음을 앞두고 자리에서 헉헉대며 숨을 가다듬었다.
“후우, 후! 아니 무슨 걸음이 그렇게 빨라요?”
“내가? 그럴 리가.”
밀러는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다. 제국의 대공이 무슨 급한 일이 있어 걸음을 재촉하겠는가. 침실에 들어설 때도 과묵하고 진중하게 살라는 조부님의 조언을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거늘. 밀러는 확신에 찬 얼굴로 린느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의 미간이 흠칫 떨렸다.
“설마 제 다리가 짧은 탓이라고 말씀하실 건 아니죠?”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
그의 선명한 대답에 린느는 민망함이 올라와 얼굴을 붉혔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해서 민망함에 창피함까지 모조리 제 몫이 된 탓이다. 린느는 큼흠,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 대공님의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긴 탓이겠죠.”
“그대는 퍽 좋겠군. 그대의 가주가 비정상적으로 다리가 긴 사람이라서.”
밀러는 코웃음을 치며 장난스레 그녀를 타박했으나, 린느는 그의 대답에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방금까지도 숨도 제대로 못 쉬던 남자가 맞나 싶을 만큼 완벽한 탓이리라.
‘대공저에서 볼 때랑은 또 다르네.’
도대체 이 남자의 잘남은 끝이 있기는 할까? 약이 오른 린느는 팔짱을 끼며 그에게서 적당히 멀어졌다.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지만, 압도적인 그의 피지컬은 한눈에 살피기가 버거워 턱을 주억거리며 그의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살폈다.
‘신은 밀러를 편애하고 있어.’
한치의 변명도 댈 수 없을 만큼, 신은 그를 굳건히도 사랑한다. 그래서 아픈 그에게 린느를 안겨 줬겠지. 밀러는 그런 린느를 사랑스럽다며 바라봤지만, 그녀는 그런 그의 눈에는 한치의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잘난 얼굴과 몸을 바라볼 뿐.
“린느.”
그의 낮은 음성이 린느의 전신을 깨웠다. 진중한 목소리에서부터 그의 기개가 느껴진 탓이다.
“네?”
“어쩌자고 라밀라를 보내고 홀로 날 따라온 거지?”
“그야, 라밀라 님은 황후 폐하의 손님이시니까요. 전 그냥 원 플러스 원인 거죠.”
해괴한 말투. 또다시 그녀가 이해하지 못할 말을 쏟자 밀러는 비스듬히 고개를 꺾었다.
“애초에 라밀라의 초대장으로 입장을 했으면, 그대도 황후 폐하의 손님인 격이야.”
“하지만…….”
린느는 말을 하려다 말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차마, 그가 걱정되어 라밀라의 초대장을 빌려 황궁에 들어왔단 말을 할 수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요즘처럼만 행복하면 좋겠다는 대공저 사용인들의 콧노래를 지켜 주고 싶었고, 더는 졸부란 욕을 듣지 않게 된 아버지의 웃음을 지켜 드리고 싶었으며, 제게 이유 모를 호의를 베푸는 이 남자에게 다시 지옥을 안겨 주고 싶진 않았다. 그래, 그뿐이지. 다른 건 없어.
“대공님께서 난감한 상황에 처하실까 봐요.”
“난감한 상황이라.”
밀러는 그 번뜩이는 금안을 내리깔아 허공을 응시하더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픽 웃었다. 그러자, 그의 뺨에 전에 보이지 않던 우물이 잡혀 예쁜 미소가 그려졌다. 그는 앙큼하게도 그녀에게 팔을 내어 주며 잡아 달라 눈짓했다.
도도한 늑대가 등 뒤를 내어 주듯이 느릿느릿한 몸짓이었으나, 어딘가 위험한 분위기가 물씬 흘렀다. 못된 늑대가 사냥감을 유혹하듯이, 그에게서 쌉싸름한 알코올 향과 함께 색스러움이 가득 흘렀다.
“그대의 충복에 감복하여 전하께서도 출입을 금하진 않을 거야. 나만 믿어.”
“아, 아니. 출입이요? 저, 저기에 제가요?!”
린느는 길 잃기 딱 좋은 화려한 미궁의 문을 가리키며 마른침을 삼켰다. 도대체 황궁의 대연회장을 지은 건축가의 계획은 얼마나 장황했던 걸까? 온갖 보석과 황금을 모조리 발라서 인위적인 별을 만든 그 건축가에게 경외심마저 생겼으니. 린느는 대연회장을 보며 황제를 마주한 듯 긴장됐다.
“불편하면 혼자 다녀올 테니 무리하진 말…….”
“아니에요. 함께 가요!”
린느는 있지도 않은 소맷귀를 걷어붙이더니, 씩씩하게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단번에 거리가 가까워지자, 여유롭게 미소 짓던 밀러의 입매가 어정쩡하게 굳었다. 반면 린느는 당당한 걸음으로 대연회장을 향해 돌진하듯이 걸음을 내디뎠다.
* * *
굳어 있던 대연회장의 분위기가 두 사람의 등장으로 다시 풀렸다. 귀족들은 린느의 패기에 눌려 마른침을 삼켰다.
“어떤가! 술맛이 좋은가?”
10분 전까지도, 대공의 심기를 거스른 귀족의 목을 싹둑 자르네 마네 허리를 사각형으로 꺾네 마네 화를 내던 황태자가 린느와 밀러를 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린느는 그런 황태자 앞에서 평소처럼 원샷으로 술잔을 비웠고, 다 비운 잔을 얌전히 내려 두고 예의 바른 옅은 미소만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귀족들은 헛웃음을 삼켰다. 황태자 앞에서 거리낌 없이 술잔을 받는 모습도 가히 충격적이지만, 술잔을 쥐기만 하면 전쟁터에서 30년은 구른 노련한 기사의 눈빛을 띠는 게 더 충격이었다. 드레스가 아니라 기사 복을 입어도 이상할 게 없는 모양새가 아닌가.
“흡!”
경악에 질려 린느를 훔쳐 바라보던 귀족이 어깨를 떨며 시선을 피했다. 황태자 앞에선 그렇게 다정하게 웃음 짓던 그녀의 눈빛이 먹이를 뺏긴 맹수처럼 저를 노려본 탓이다.
‘상전이 둘인 줄 알았더니, 셋이구나.’
귀족은 괜스레 헛기침하며 곁에 놓인 냉수를 연거푸 마셨다.
“아하하하! 대공의 가신이 되고도 남을 기개로군!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린느 뷔 세르트이옵니다.”
또다시 린느의 눈빛이 아연하게 바뀌었다. 귀족들은 원수 보듯 보면서도 황태자의 물음에는 덧없이 사근사근 대답하니 그들은 당혹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때, 이 꼴을 바라보던 하이레니아가 술잔을 단번에 비우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화가 치미는 것도 치미는 거지만, 독한 술이 목구멍부터 위장의 위치를 알려 주듯 긁어 댄 탓이다.
‘도대체 이런 술을 마시고도 저런 웃음은 어찌 짓는지 모르겠군.’
하이레니아는 빈 잔을 바라보며 여인보다 참을성 없는 자신의 내장을 자조했다. 그것도 잠시, 황태자와 하하 떠드는 두 사람을 노려봤다.
‘망할 것들.’
하이레니아는 허탈하게 뒤통수 당한 꼴을 곱씹으며 화를 아득바득 참았다. 그렇게 대공이 좋으면 대공만 부를 것이지 뭐 한다고 우리를 불러냈는지 황태자에게도 화가 치밀었다. 그때, 하이레니아의 눈동자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원래 들였다던 시녀는 어떻게 됐지?’
제국에서 가장 외곽에 있는 영지에서 온 백작가 영애를 대공저의 시녀로 임명했다 했건만. 그 시녀는 정말 시녀일 뿐이란 건가?
‘그럴 리가……. 여태 시녀를 들인 적도 없는 게 시녀를 들였을 땐, 다 이유가 있을 텐데.’
귀족들이야 다 똑같지 않은가. 밀러가 미리안을 시녀로 뒀다는 소식에 하이레니아는 밀러를 비웃었다. 고고한 척은 다 하더니, 결국 하는 짓은 수없이 깔린 다른 귀족 남자와 다를 바가 없다며 말이다. 그런데, 그 시녀에 대한 소문이 갑자기 뚝 사라지고 난데없이 세르트 백작가의 영애라니!
‘뭔가가 분명히 있어. 젠장.’
그 뭔가를 다 알아내기 직전이었는데! 하이레니아는 이마를 짚다가 미간을 꾹꾹 누르기를 반복했다. 행복에 겨운 그들의 웃음소리가 거슬렸지만, 그는 밀러의 불행을 주문 외우듯 찾아 나섰다.
‘시녀를 먼저 캐 봐야겠군.’
락센을 압박해 라밀라의 입을 열게 하려 했으나, 보기 좋게 당했다. 오히려 눈이 튀어나올 만큼 라밀라에게 뒤통수를 맞았으니,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오히려 이 방법이 더 쉬울지도 모르겠군. 저 매정한 놈이 시녀의 가족들을 모조리 다 죽였으면 몰라도, 멀쩡한 가문을 하루 이틀 사이로 박살 낼 수는 없지.’
가던 길이 장애물에 막혔으나, 그 말고도 길은 많았다. 하이레니아는 음흉하게 웃음을 참았다. 그때, 하이레니아의 곁에 앉아 있던 남자가 소맷귀에 묻은 잎사귀를 테이블 아래로 버리며, 하이레니아에게 귀를 빌려달라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