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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69화 (68/122)
  • @69화

    하이레니아는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가 웃음 참기가 힘들었다. 하늘에 떠 있는 북극성보다 높고도 찬란한 남자가 선대 대공 하나 때문에 저러고 있는 꼴이 우스워, 미칠 것만 같았다. 나이가 몇이고, 그의 어깨에 달린 목숨이 몇 개인데 고작 아비 때문에 저러고 있다니. 대공도 별거 없구나 라며 쯧, 혀를 찼다.

    ‘하긴 그 꼴을 보고 자랐으니, 멀쩡할 리가 없지.’

    선대 대공이 주최한 연회장은 난잡하면서도 가학적이었다. 웬만한 귀족들은 참석조차 꺼렸으며, 참석한 귀족들도 선대 대공의 지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석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죽이 잘 맞는 귀족들은 하하호호 떠들며 취한 선대 대공을 자극하며 밤새 연회를 즐겼다.

    그 난잡하고 폭력적인 연회장에서 밀러는 가장 높은 단상 자리를 지켰다. 그들이 하늘에 떠 있는 게 해인지 달인지 분간하지 못할 만큼 무너질 때도 대공저를 지키는 건 오직 밀러뿐이었다.

    대공자의 신분임에도 밀러는 대공저의 주인이 누구인지 각인시키듯이 그들을 샅샅이 살폈다. 그때부터 이미 밀러의 금빛 눈동자는 초롱초롱한 신성이 아니라, 무르익은 혜안으로 빛났다. 그 탓에 나이 든 귀족들이며 고위 귀족들은 어린 밀러를 꺼리는 동시에 두려워했다. 이는, 초식동물이 포식자 앞에서 몸을 사리는 것과 똑같은 이치였다.

    하지만 하이레니아는 초식동물이 아니었다. 고독한 맹수가 힘을 잃으면 가차 없이 목덜미를 잡아챌 하이에나다. 그는 밀러가 어서 자리에 주저앉길 바라며, 느긋하게 그를 동정했다.

    ‘저것도 사람은 사람이구먼. 저 악독한 것도 못 버티고 쓰러지는 날이 다 오는구나.’

    쯧, 하이레니아는 다시 혀를 차며 선대 대공과 제 앞에서 천천히 무너지고 있는 대공을 조롱했다. 밀러의 커다란 몸체가 휘청거리며 땅바닥에 처박히길 기다렸으나, 밀러는 자리에서 굳은 채로 미동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하이레니아는 불안해졌다. 거의 다 죽을 것처럼 빌빌거리던 대공이 자리에서 바위처럼 굳었으니 두려울 수밖에.

    그때, 웬 여인이 두 남자를 향해 걸어오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각하…?”

    ‘황궁의 시녀인가? 쓸데없이 돌아다니기는.’

    하이레니아는 건방진 얼굴로 그녀를 향해 벌레 쫓듯 꺼지라며 손짓했다. 하지만 그 자그마한 여인은 도망은커녕 되레 뛰어왔다.

    “각하? 각하!”

    하이레니아가 말릴 틈도 없이 여인이 대공의 몸을 흔들어 댔다. 원래라면 무엄하다며 떼어 내야 했지만, 하이레니아는 그들을 비웃으며 방관했다.

    ‘혼자 보기엔 아깝긴 하지. 황궁의 시녀 앞에서 쓰러지면 대서특필 감이겠군!’

    하이레니아는 하! 웃으며 팔짱을 꼈다. 그때, 밀러의 눈꺼풀이 천천히 뜨였다. 빛을 잃은 금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환각인가.’

    지금쯤이면 알렉스와 함께 있어야 할 린느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린느.”

    밀러는 린느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숨을 골랐다. 환각이든 뭐든, 린느와 눈을 마주치자 굳어 가던 폐가 활기를 띠고 힘차게 움직였다. 선선한 저녁 바람이 린느의 달콤한 향기를 안고 밀러의 속을 넘나들었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말릴 만큼 편안해졌다.

    ‘미, 미치겠네.’

    반면, 린느는 숨도 크게 들이쉬지 못하고 굳었다. 틈 없이 완벽하던 남자가 이렇게까지 흐트러진 모습으로 제게 기대고 있으니, 손끝도 달싹할 수가 없었다. 심장은 눈치 없이 쿵쾅거렸고, 입술이 바싹 말라 갔다. 그때, 린느의 시선에 하이레니아가 보였으니.

    린느는 밀러에게 어깨를 내어 준 채로 하이레니아를 빤히 응시했다. 뭘 보고 있냐며 따지고 싶었으나, 린느는 그 특유의 새초롬한 표정으로 하이레니아를 째려봤다. 그러자, 그는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소백작님! 거긴 가시면 안……. 각하?”

    라밀라는 입을 가린 채로 놀라 뛰어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라밀라는 하이레니아를 보자마자 능청을 떨었다.

    “각하께서 과음을 하셨나 봅니다. 소백작님, 마차를 부를 테니 잠시 기다려 주세요.”

    “아니에요. 라밀라 님은 어서 황후 폐하께 가 보셔요. 전 어차피 손님이었으니, 폐하께서 전 신경 쓰지도 않으실 거예요.”

    그러기엔 이미 황후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은 린느가 아닌가. 라밀라가 잠시 고민하던 중, 린느에게 기대어 있던 밀러가 상체를 세워 꼿꼿하게 자세를 고쳤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넥타이를 고치며, 린느를 내려다봤다.

    다정한 금빛 눈동자가 걱정하지 말란 듯이 반달로 휘었고, 린느는 안도하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때, 밀러는 하이레니아를 보지도 않고 나직이 으르렁댔다.

    “하이레니아 후.”

    “예, 가, 각하.”

    “다행이군, 말을 할 수 있다니. 난 그대가 거기 서서 바라보기만 하길래, 목이라도 떨어진 줄 알았어.”

    그제야 하이레니아는 자신이 저지른 짓에 아차 싶었다. 밀러가 자리에서 쓰러졌더라면 문제도 없겠지만, 이대로라면 취한 대공을 나몰라라 한 꼴을 피할 수가 없다.

    “제가 심히 당황하여……!”

    “당황은 개나 주고. 아, 전하께 체면을 상했다고 내게 화풀이하는 건가?”

    “화풀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한데, 굳이 내 뒤를 따라온 이유가 무엇이지?”

    밀러는 반만 고개를 돌려, 하이레니아를 사납게 쏘아봤다. 그와 언뜻 눈을 마주친 하이레니아는 기겁하며 혀를 깨물었다.

    ‘제대로 말렸군……!’

    “내 취기가 걱정되어 따라 나왔다는 헛소리는 하지 않겠지.”

    목덜미를 물어뜯을 기세로 나직이 으르렁대자 하이레니아는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댈 만한 변명도 없었으니 입을 다물 수밖에.

    그때, 린느가 소란을 부린 탓에 몰려온 귀족들이 소리 없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은 하이레니아에게 꽂혀 있었다.

    “당황하셔도 소백작님보다 당황하셨을까요? 소백작님이 아니셨다면 각하께서 욕을 보실 뻔하셨어요.”

    황후궁 근처 화원에서 연회를 즐기던 부인들이 몰려와 하이레니아에게 한마디씩 얹었다. 밀러는 말없이 몸을 돌려, 하이레니아를 빤히 내려다봤다. 역시, 북극성은 몰락하지 않아. 하이레니아는 뒤늦게 후회했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꼴사납게 멀뚱거릴 테면 대연회장 자리나 보전해. 전하께서 그대가 한 소리 들었다고 화원에서 질질 짜고 있을 거라 걱정이라도 하시면 어쩌나.”

    치욕적인 언사였으나 하이레니아는 이를 배려라 여기고 곧장 자리를 피했다. 그가 자리를 피하자 린느의 역성을 들던 부인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소백작님께서 또 큰일을 해내셨네요. 아까는 황후 폐하께 쏟아진 접시들을 받아 내시더니!”

    “그러게요. 재주가 좋으신 분입니다. 세, 세상에 내 정신 좀 봐.”

    부인들은 린느의 역성을 들다 말고 뒤늦게 총총 뛰어와, 밀러에게 예의를 차리기 바빴다.

    “존귀하신 대공 각하를 뵙습니다.”

    “각하께서 이리 헌앙하시니, 어찌나 기쁜지 모르겠나이다!”

    밀러는 린느의 어깨를 그러쥔 채로 그들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며 응했다. 값비싼 천을 조심스레 만지듯, 그의 손끝이 린느의 어깨선을 간지럽혀,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세가 자세인지라, 귀족들은 밀러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동시에 린느에게도 머리를 조아리는 모양새가 연출됐다.

    “근래에 황태자 전하께서 웃음꽃이 환히 피신 이유가 각하 덕분이었군요. 황후 폐하께서도 각하의 황궁 출입에 크게 기뻐하셨답니다.”

    “고맙군.”

    커다란 손가락이 린느의 어깨를 넉넉하게 그러쥔 채로 천천히 움직이자, 린느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찌나 고혹스럽게 움직이는지! 도무지 투박한 남자의 손이라 여길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웠다. 린느는 서둘러 그의 손등 위로 손을 얹어 꽉 잡았다. 더는 움직이지 말아 달라는 협박이자 부탁이었다. 부인들이 하나둘 황후궁으로 돌아가자, 린느는 서서히 긴장이 풀렸다.

    라밀라의 말대로 정말 취기가 오른 건지, 날카로운 금안엔 실크보다 보드라운 백금발 사이로 그녀의 가느다란 흰 목덜미만 보였다. 흰 목덜미에선 린느와 닮은 달콤한 향기가 올라와 그의 코끝을 자극하기까지 했으니. 돌연, 불순한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뒤덮자, 밀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태연한 척 물었다.

    “그런데, 린느,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지?”

    “라밀라 님의 초대장에 얹혀서 들어왔어요. 라밀라 님께서 황후 폐하께 연회 초대를 받으셨거든요.”

    린느는 자랑스럽단 듯 라밀라를 바라봤으나, 라밀라는 창피한 듯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얼마 전, 저택으로 황실 연회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제가 아끼는 하녀가 초대장을 숨겨서 제게 전해 줬구요.”

    라밀라가 쑥스러워하며 말을 아끼자, 린느가 말허리를 채갔다.

    “라밀라 님께서 지은 탁아소 덕분에 무사히 성인이 된 아이들이 벌써 천 명이 넘는대요. 몇몇은 아카데미 수석 졸업도 했다던데, 알고 계셨어요?”

    “알 리가 있나.”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겠냐는 듯이 밀러는 라밀라를 바라봤다. 린느는 두 사람 눈치를 살피며 말을 아꼈다. 잠시 정적이 오갔고, 그 끝에 라밀라가 입을 뗐다.

    “각하,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진 모르겠으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제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휴식에 방해가 될까 하여…….”

    “그대의 여동생은 죄가 없으니, 내게 고마워할 필요 없어.”

    밀러는 옷깃을 정리하며 무심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세 사람을 주시하던 시선이 냉큼 덤불에 숨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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