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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68화 (67/122)
  • @68화

    밀러는 전장에서 통각을 잃은 군인처럼 무심한 얼굴로 떨리는 왼손을 꽉 눌렀다. 전에는 이렇게 손이 떨리기 시작하면, 급물살에 빠진 것처럼 금세 패닉이 왔었으나 이번은 다르다. 밀러는 술병을 빤히 보며 말했다.

    “하이레니아 후가 전하께 올린 술이었나 보군요.”

    “알다시피, 하이레니아 후가 술에 또 일가견이 있잖소? 그래서 내 친히 부탁했지.”

    “그러고 보니, 후나 락센 경은 술을 참 좋아하는 거 같습니다. 이러니 가신과 가주 사이가 돈독할 수밖에요.”

    밀러는 하이레니아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목구멍에 얇은 칼이 들어찬 것처럼 아슬아슬했으나, 죽더라도 함께 죽자는 미소였으니. 하이레니아는 웃음을 뚝 그치고 헛기침을 했다.

    “한데, 락센 경의 연회에서는 왜 금방 자리를 떴나?”

    “각하께서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셨단 말씀은 익히 들었습니다. 아쉽게도 그때 때마침 일이 바빴…….”

    “일이야 늘 바쁘지. 변명치고는 성의도 없어. 아, 그대들의 사이가 좋다는 건 내 억측인가?”

    하이레니아는 미간을 좁혀 밀러를 빤히 응시했다. 무슨 말을 꺼내려고 저런 말들을 늘어놓는지! 그는 두려움이 울컥 치솟았다.

    “사이가 좋지 못해도 가신의 행태는 곧 가주의 낯이니, 단속 좀 해 둬.”

    “단속?”

    “락센 경이 제 가신에게 실수했습니다. 실수인지 경의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잔잔한 한마디에 대연회장 내부에 북부의 바람이 몰아쳤다. 허허 웃기만 하던 황태자의 얼굴이 대번에 노기로 가득 찼으며, 그의 시선은 하이레니아에게 딱 멈췄다. 황태자의 노기 어린 눈빛만으로도 숨통이 턱 막히는데, 밀러는 나른하게 말했다.

    “그대나 락센 경이나 술을 너무 사랑해서 맛이 간 건지 궁금해. 혹, 맛이 가더라도 피해는 끼치지 마. 받아 줄 아량 없으니까.”

    밀러 그에게는 독이 든 술이나 다름없는 그 독주를, 그는 하이레니아와 눈을 맞춘 채로 단숨에 털어 넣었다. 심장이 귀를 통해 튀어나올 만큼 머릿속이 아찔하고 숨쉬기가 버거웠다. 밀러는 깊은숨을 푹 내쉬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내 가신은 목숨을 걸고라도 지킬 텐데, 그대의 가신은 어떻게 지킬 요량인지 궁금하단 듯이 밀러는 하이레니아를 바라보며 협박하듯 웃었다. 그러자, 하이레니아는 입매를 떨며 마른침을 삼키더니, 바싹 마른 입술을 축였다.

    “제가 꼭 따끔히 말씀해 두겠습니다, 각하. 노여움을…….”

    “뭐 어린 자식을 훈육하나? 따끔히 말씀을 해? 후, 지금 나와 대공을 두고 장난을 하는 겐가?”

    밀러는 여태 단 한 번도 황태자의 눈앞에서 누군가를 찍어 비난한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직접 언급한 것은, 당장 도륙을 내고 싶을 만큼 화가 치민다는 뜻이었으니. 황태자는 제 일처럼 화가 났다.

    “감당을 못 하겠으면 멍청한 가신은 두지 말았어야지.”

    황태자의 목소리가 그르릉 하며 울렸다. 이에 다른 후작들은 하이레니아의 역성도 들지 못하고 죄인처럼 싸잡아 입을 다물었다. 밀러가 황궁 연회에 얼굴을 비치지 않고 부재한 동안 해 먹을 만큼 해 먹었던 그들인지라, 알아서 사리자는 생각도 다수였다. 그때, 그들을 오만하게 지켜보던 밀러가 입을 뗐다.

    “그대의 여동생을 직접 락센 경에게 보낼 정도로 경을 아끼면서, 충고는 아끼면 쓰나?”

    밀러는 빈 술잔을 손끝으로 두들기며 묵직하게 던졌다. 그가 던진 폭탄이 대연회장을 덮쳤고, 술렁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하이레니아는 희게 질리다 못해 잿빛으로 변한 얼굴로 입술을 떨었다. 그는 자신의 이복 여동생을 락센에게 내던지며, 이참에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도 짓밟고자 했다. 그런데, 밀러가 이 일을 언급할 줄이야!

    변명할 틈도 없이 밀러가 말을 얹었다.

    “그나저나, 그렇게 되면 라밀라만 안됐군. 뭐, 똑똑한 여인이니 알아서 하겠지.”

    밀러는 라밀라를 안타까워하는 척 점잖을 떨며, 하이레니아의 가족사와 황태자의 가족사를 엮어 하이레니아의 속을 긁었다.

    1황자는 자신보다 뛰어난 현 황태자를 미워했으며, 결국 무능력함에 후계를 박탈당하고 유폐당했다. 황태자는 그런 이복형을 안쓰럽게 여기지만 지금도 1황자는 황태자를 없는 이유를 만들어서까지 증오한다.

    하이레니아와 그의 막냇동생 역시 이복 남매이니 1황자와 황태자 사이와 묘하게 비슷했으나. 하이레니아의 여동생은 황태자와 달리 비극을 맞이했다.

    선대 후작은 막둥이 딸에게 조금만 빨리 태어났으면 그녀에게 후계를 줬을 거란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그러니 하이레니아가 여동생을 꺼릴 수밖에. 선대 후작이 눈을 감은 그날, 하이레니아는 곧장 여동생을 후작저에서 내쫓았고, 귀족들의 이목에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겐 남작 작위만 던져 줬다.

    소문에 의하면 그 이후로 그녀는 평민과 다름없이 살며 입에 풀칠하기도 버겁다더니. 밀러의 발언 하나로 그 악독한 소문이 기정사실이 된 셈이었다.

    하이레니아는 그 어떤 말도 뻥긋하지 못하고 밀러와 황태자를 번갈아 볼 뿐이었고, 황태자는 기분 나쁜 기색이 역력했다. 후작의 여동생에게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비친 탓이다.

    “정녕, 그게 그녀의 뜻인가? 하이레니아 후작, 그대의 뜻이 아니라?”

    황태자의 노기 어린 눈동자가 맹렬하게 하이레니아를 비난했다. 그 탓에 하이레니아는 눈도 끔뻑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얼었다. 황태자는 짙은 한숨을 내쉬더니, 초연한 얼굴로 말했다.

    “오래전 그대의 여동생을 본 적이 있어. 선대 후작의 손을 잡고 황궁 정원을 노닐던 모습이 눈에 선하거든. 내 또래나 되었을까.”

    그녀에게 무슨 잘못이 있을까. 하나뿐인 오라비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던 그녀의 눈망울이 퍽 서글펐다. 황태자는 말없이 잔을 비우더니, 죽은 듯이 구는 하이레니아를 빤히 내려다봤다.

    “그 가주에 그 가신이로군. 선대 후작이 그대에게 후계를 내렸으면 그만이지, 힘없는 여인을 상대로 그런 짓거리를 꾸며? 선대 후작을 어찌 보려고 그런 짓을 꾸미는지 모르겠군.”

    황태자는 잔을 거칠게 내려놓더니, 곁에 있는 보좌관에게 이 술을 치워 버리라며 명령했다.

    “그대 가정사에 끼어들기 싫다만, 그대의 행동 하나에 달린 눈과 귀가 몇인 줄 아나? 후작이나 되는 자가 그런 치기 어린 짓을 꾸민다면, 어떤 제국민이 그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겠는가. 당장, 락센 경만 봐도 그래. 대공의 가신에게 실수를 저질렀단 뜻은, 곧 대공의 면전에 실수를 저지른 것과 다름이 없네! 어째 후작이나 된 자가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이 굴까!”

    황태자는 그동안 묵혀 놨던 화를 하이레니아를 향해 뱉었다. 덕분에 그동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하던 후작들의 기세를 완벽하게 꺾였다. 이는 황태자도 바라던 바였으니, 밀러와 합심하여 후작들을 차근차근 밟아 줬다. 물론, 이를 빠짐없이 지켜보던 귀족들도 황태자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분발하겠노라 맹세까지 했다.

    황태자는 그들의 약속을 단단히 받아 둔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이레니아가 선물한 술은 마시기도 싫다며, 다른 술을 가져오겠노라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그때, 밀러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쿵.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앞이 흐려졌다. 악몽을 꾼 공자처럼 서둘러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으나, 밀러는 린느의 목소리를 곱씹으며 어금니가 닳도록 참았다. 약만 먹으면 괜찮아질 거라는 말을 머릿속에 욱여넣고 세뇌했다. 실제로는 약을 먹어도 효과는 미미하지만, 린느의 조언대로 약효가 좋을 거라 세뇌했다.

    걸음 한 번에 숨이 한 번씩 막혀 왔다. 그의 발짓과 손짓, 하물며 숨을 언제 뱉고 들이마시는지까지 살피는 하이에나의 먹잇감이 될 수 없단 다짐 하나로 끝까지 품위를 유지했다. 자신이 그들의 먹잇감이 되는 순간, 그들의 다음 먹잇감은 린느가 될 테지. 절대 그럴 순 없다.

    쿵.

    화려한 대연회장 문을 지나 야외로 나왔다. 달빛이 우아하게 뻗은 그의 이마를 비췄고, 이마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그는 품에서 약병을 찾으려 했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헤맸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못해 살피러 나왔습니다.”

    하이레니아였다. 방금까지도 다 죽어 가던 그가, 좋은 먹잇감을 발견한 하이에나처럼 들뜬 얼굴로 밀러에게 다가왔다. 비록 황태자에게 치욕을 당해 기분은 상했으나, 대공저가 숨기는 비밀을 눈앞에서 확인만 할 수 있다면 그거로 족했다.

    ‘건방진 자식. 혹시나 했는데, 술이 문제였나 보군.’

    그동안 밀러가 연회장에 얼굴을 비추지 않고 도망 다닌 이유가 고작 술 때문이었다니! 이 오만하고 건방진 대공이 고작 술이 무서워서 근신했단 걸 어서 다른 촉새들에게 알려 주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하이레니아는 밀러에게 점차 다가왔고, 밀러는 품에 있는 약통을 꺼내지도 못한 채 생지옥을 넘나들었다. 차라리 숨통이 끊기는 게 덜 고통스럽겠지.

    그때, 하이레니아의 미간이 구겨졌다. 락센이 전한 말로는 연회장에서 마실 만큼 마시고 즐길 만큼 즐겼다고 했는데.

    ‘술 때문이 아니었군. 선대 대공 놈의 잔상을 본 게야. 겁쟁이 같으니.’

    하이레니아는 선대 대공이 주최한 연회에 종종 참석했고, 선대 대공이 병적으로 집착하는 술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비싼 술은 다른 제국에서 생산하는 술이며, 그 비싼 술을 무더기로 수입하는 바람에 선대 대공이 대공저 금고 하나를 날렸다는 소문도 돌았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하이레니아는 밀러에게 흉터나 다름없는 선대 대공을 상기시키기 위해, 황태자의 손을 빌렸다. 제 아무리 밀러라도 황태자가 건넨 술잔을 거부할 순 없을 테니까.

    “어디 불편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제가 친히 도와드릴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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