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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67화 (66/122)

@67화

밀러의 말은 곧 법이었다. 그의 위세가 대단한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불안 증세가 없는 밀러의 위세는 가히 형언하기도 힘들었다.

“불편한 건 없나?”

밀러는 딱딱한 어조로 그들에게 명령을 퍼붓다가도, 린느에겐 다정히도 물어왔다. 자신들이 신처럼 섬기는 그가, 신처럼 섬기는 여인이라니! 이러니 직원이고 영애들이고 모조리 린느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괜찮아요.”

처음엔 그들의 과한 호의가 불편했으나, 린느는 금세 적응했다. 또 언제 이런 호사를 누리겠느냐며 환복 할 때마다 드레스 자락을 흔들거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환하게 웃기도 했다. 그녀가 긴장을 내려놓고 미소를 보이자, 줄을 서서 마담을 기다리던 영애들이 손님이 아닌, 린느의 시녀처럼 수발을 들기 시작했다.

“소백작 님, 이 색상은 어떠신가요? 이 레이스와 잘 어울릴 듯하여 말씀 올립니다.”

“이런 디자인은 어떠세요?”

지난 연회에서 부인들의 수발은 부담스러웠으나, 영애들의 수발은 실로 깜찍했다. 저마다 린느의 피부색이 하얗고 고운 색이니 파스텔 톤이 어울릴 거란 목소리와 화려하고 쨍한 색감이 어울릴 거란 목소리가 묘하게 신경전을 펼쳤다. 그 귀여운 신경전에 린느는 둘 다 택하겠노라 약속했고, 그로써 그 귀여운 신경전도 끝이 났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약혼자를 고를 때보다도 신중하게 핸드백과 구두를 골라다 밀러에게 보였다. 그때마다 밀러는 대답 대신 턱짓으로 답했고, 가져다 바치는 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다가 의상실 전체를 사겠다 싶을 만큼 무조건 고개를 끄덕여 댔다.

‘아주 의상실을 사지? 말리지도 않고 왜 저렇게 바보처럼 끄덕거린담?’

린느는 그런 밀러를 보며 그만 고개 좀 끄덕이라며 눈짓했으나, 밀러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 많은 제품을 마차에 싣기 어려워, 대공저로 배송하기로 한 후에야 의상실에서 나설 수 있었다. 건너편에 있는 디저트 가게로 향하던 찰나에, 그는 알렉스에게 발목을 잡혔다.

“각하, 이제 그만 황궁으로 가셔야 할 거 같습니다.”

밀러는 탄식과 함께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린느가 그의 소맷귀를 살짝 잡아당겨 그의 귀를 향해 손짓했다.

“귀 좀 빌려주실래요?”

밀러는 어정쩡한 자세로 느릿느릿 상체를 숙여 귀를 내어 줬다. 붉은 입술에 뺨이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에 밀러는 숨을 참고 애꿎은 입술을 깨물었다.

“절대 약 아끼지 마세요. 절대로요.”

린느는 목소리를 낮게 깔며 경고했다. 그러자, 밀러는 여유를 짜내어 웃어 줬다. 그것도 잠시, 알렉스가 타고 온 마차에 올라타며 그는 황홀한 기분에 심장을 주먹으로 툭툭 쳤다.

* * *

대공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황궁을 가르고 대연회장 앞에서 멈추자, 이를 지켜보던 귀족들은 숨을 멈췄다. 그들의 시선이 갈 곳을 잃고 휘청거리더니, 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대번에 고개부터 숙였다.

“가, 각하를 뵙습니다!”

장황한 인사말을 잊고, 반사적으로 고개부터 숙였다. 밀러는 그들을 가로질러 그대로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예복 단추를 잠그며 그 거만한 눈으로 연회장을 쓱 돌아보자, 뒤늦게 그를 발견한 후작들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잔을 쥐고 있던 손가락에 제멋대로 힘이 풀려 놓칠 뻔했으며, 대공이 몰고 온 찬 바람에 아래턱이 딱딱 소리를 냈다. 소문이 사실이었다. 제국의 또 다른 태양이라 불리는 페리하츠 대공이 재기했음이.

“이런이런! 이게 누군가!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대연회장을 살벌하게 울렸다. 황태자는 제게 머리를 조아리던 귀족들을 지나쳐 곧장 밀러에게 달려왔다.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곁에 있던 귀족에게 넘기더니, 양손으로 밀러의 손을 꽉 잡았다.

“마지못해 나올 줄 알았더니, 낯이 환해 보기가 좋소!”

“별말씀을요.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강녕하다마다! 다만, 그대가 없어 지루해 딱 죽을 뻔했잖소?”

황태자는 허허 웃으며 그의 손을 끌어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대공을 앉혔다. 도망이라도 갈까 봐 불안했는지, 황태자는 밀러의 술잔부터 채우고자 술병을 들었다. 그는 술병을 빤히 바라보더니 쯧, 혀를 찼다. 귀한 손님께 이딴 술을 대접해야 하냐며 곁에 있던 귀족을 타박했다.

그러자, 이미 샴페인을 마시던 귀족들이 자신들이 들고 있던 잔을 빤히 바라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순식간에 ‘이딴 술’을 마시는 꼴이 되었으니, 당황할 수밖에.

황태자는 결연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공, 여기서 기다리시오. 부황께서 부른 게 아니면 어디도 움직이지 말란 소리요. 명령이니, 딱! 기다리시오!”

황태자는 복도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밀러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황태자가 자리를 비우자, 다시 대연회장이 고요해졌다. 벌써 피로감이 몰려들었으나, 오랜 친우의 들뜬 모양새는 밀러 역시 퍽 달가웠다. 그건 그거고.

다분히 악의를 품은 금빛 눈동자가 후작 무리를 쏘아봤다. 반쯤 뜨인 눈이 가소롭단 듯 훑어보자, 눈치를 살피던 후작들이 그제야 밀러에게 뛰듯이 걸어왔다. 마지막까지 걸어온 하이레니아 후작은 큼흠, 헛기침해 댔다.

“제국의 또 다른 태양을 뵙습니다.”

“각하, 그간 보중하셨나이까?”

눈주름을 접어가며 곰살궂은 척 위선을 떨자, 밀러는 그들 면전에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내 그대들과 초면인 줄 알았지 뭔가. 봐도 못 본 척을 해 대길래.”

밀러는 자연스레 몸을 뒤로 기대며, 왼팔을 팔걸이에 얹었다. 그제야 자신들이 알던 페리하츠 대공의 위세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멀쩡하다 못해 드높단 걸 깨닫고 어서 눈을 깔았다. 말하기 좋아하던 귀족들이 대공의 행보를 두고 하던 말들이 무색할 만큼 금빛 눈동자가 맹위를 부렸다.

하긴, 제국의 허풍쟁이인 락센의 이야기를 믿는 게 아니었지! 후작들은 저마다 밀러의 권세가 꺾였다 외쳤던 귀족들을 욕하며 탓했다. 밀러는 그들을 한 명 한 명 살펴보더니 픽, 웃었다.

“내가 뭐, 그대들의 목을 딸 것도 아닌데 머리까지 조아릴 필요야 있나?”

‘목을 딸’이란 부분에 특히 강세를 주자, 후작들은 어깨를 움찔했다. 이를 구경하던 밀러가 하이레니아 후작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격조했군.”

그 네 마디에 하이레니아는 빳빳하게 들고 있던 고개를 슬그머니 굽혔다. 하지만 밀러는 벌레 쫓듯 왼손을 휘이 저었다. 후작들은 체면도 없이 끝까지 웃으며 자리를 피했으며, 하이레니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속에서 날카로운 칼날들이 칼춤을 추고 있었으나, 멀쩡하다 못해 되레 신수가 더 훤해진 대공을 상대할 역량은 없었다.

“내 이 술을 그대와 함께 마시기 위해 기다렸소. 대공!”

황태자의 목소리가 연회장에 크게 울리자, 이제 막 도착한 귀족들이 깜짝 놀라며 고개부터 숙였다. 얼추 귀족들이 자리를 채웠으나 황태자는 밀러에게 술을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눈치를 살피던 보좌관들이 황실 기사들에게 문을 닫으라며 눈짓했다.

쿵.

커다란 문이 차례로 닫히며 차가운 바람이 뚝 끊겼고, 귀족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마른침을 삼켰다.

‘올해 연회는 상전만 둘이군.’

그간 밀러의 부재에 가장 기뻐하던 이들이 죽을상으로 술잔만 홀짝거렸다. 그런데도 황태자의 안중에는 밀러뿐이었으니. 사실상 밀러가 대연회장에 도착하면서부터 황실 연회는 시작된 셈이었다.

“자자, 사양 말고 들이키시오. 내 그대를 위해 아껴 둔 이 술병이 뚝딱 비워질 걸 생각하니 이 뺨이 아릴 만큼 기쁘다오.”

“이제부턴 종종 찾아뵐 테니 그만 눈치 주십시오.”

황태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알겠노라 대답하더니, 밀러에게 술병을 들이밀었다. 이에 눈치 없는 몇몇 귀족들이 따라서 잔을 들려 하자, 눈치 빠른 귀족들이 그들을 말렸다. 황태자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내 소원을 들어주신 여신께 이 잔을 바치겠소!”

황태자는 허허 웃으며 가득 담긴 술잔을 단번에 비워 냈다. 이에 밀러 역시 잔을 단숨에 비웠으나, 미간을 찌푸리며 잔을 빤히 바라봤다. 술이야 원래 지독한 알코올 냄새에 맛도 쓰다만, 이 술은 익숙한 향이 올라오는 술이었다. 기억 저편에 남아 있는 술 냄새가 밀러를 자극했다.

「느이 어미가 보고 싶냐?」

취기에 흐트러진 선대 대공이 낯선 여인들을 품은 채 밀러를 내려다봤다. 히끅, 딸꾹질하던 선대 대공이 탑처럼 쌓여 있는 술병을 가리켰다.

「저걸 다 마시면 보게 해 주지. 자식이라곤 하나 있는 놈이 사근사근한 맛이 없어. 퉤, 술이라도 처먹고 재롱이라도 부리란 말이다!」

쨍그랑!

오래전 잊고 싶었던 기억이 밀러의 위장을 뒤엎었다. 앉은 자리에서 강제로 들이켰던 술이, 황태자가 건넨 술로 둔갑해 다시 그의 위장을 뒤덮었다. 그는 입 안을 꼬집듯 짓씹으며 표정을 유지했다.

“그래, 이 맛이지! 흐으, 쓰디쓴 게 딱, 그대를 잃은 내 모습이구려. 그나저나 대공, 그대는 내 소원이 뭔지 궁금하지도 않소?”

밀러는 빈 잔을 바라보던 시선을 황태자에게로 옮겼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옅게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이미 이뤄졌다 하셨으니, 제국의 번영이 아니겠습니까?”

황태자는 그의 입담이 녹슬지 않았다며 하하 웃더니, 돌연 고백하듯 수줍게 말했다.

“내 이번 황실 연회엔 그대가 꼭 참석하게 해 달라 빌었소. 살면서 이렇게 간절하게 소원을 빌어 보기는 또 처음이었소.”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웃더니, 그는 다시 잔을 채우기 급급했다.

“자자, 경들도 알아서 잔을 채우게. 내 오랜만에 친우를 만났으니 이해도 좀 해 주고.”

연회장 분위기는 한창이었다. 하지만 술을 삼키자, 밀러의 얼굴이 점점 차게 식었다. 잊을 수 없는 이 익숙한 불쾌감에 작은 소음마저 밀러의 신경을 긁기 시작했다.

“하이레니아 후! 술 선물 고맙군!”

하이레니아는 음험하게 웃으며 황태자에게 고개를 조아리더니, 밀러를 빤히 응시하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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