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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66화 (65/122)

@66화

그의 대답에 린느의 눈망울이 굳었다. 마치, 물 밖으로 꺼내진 물고기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 표정을 숨기기 위해 바닥을 바라보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황궁 연회에 그대도 함께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번에는 초대받은 당사자들만 입장하라는 전하의 명령이 있었어.”

린느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깟 황궁 연회고 초대고 전하고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저를 보고 싶어 할 거란 고요한 고백이 중요했다.

“그래서 황궁엔 함께 갈 순 없지만, 수도에 함께 가는 게 어떨까 해서.”

린느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바닥만 바라보자, 밀러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하는 말조차 듣기 싫어하는 건지, 밀러는 퍽 조심스러웠다.

“물론, 내가 황궁 연회에 참석하는 동안 그대와 함께 있을 순 없지만, 최대한 빨리 마치고 올게.”

다정한 남편이 아내에게 부탁하듯이 조심스러우면서도 달콤한 말투와 목소리였다. 도대체 왜, 그런 다정한 말들을 제게 쏟는지 린느는 당혹스러웠다. 그의 무자비한 다정 세례에 가득 차 있던 마음의 그릇이 넘실거렸다. 곧 넘칠 것처럼 그가 던진 다정이 물의 장막을 만들어 넘실거렸다. 톡 건들면 넘칠 듯이 위험해, 린느는 깊은숨을 천천히 내쉬며 속을 달랬다.

“그러니까, 함께 수도에 가서 각하께선 황궁 연회에 참석하시고 저는 수도 구경을 하란 말씀이시죠?”

“그렇지. 마음 같아서는 황궁 연회에 함께하고 싶었는데. 다음 연회부터 이런 일은 없을 거야. 그대와 꼭 함께 참석할 테니, 이번만 봐줘.”

밀러의 눈매가 호선을 그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어울리지 않을 거라 지레짐작했던 그의 눈웃음은 그 어떤 것보다도 달콤했으며, 아름다워 황홀했다. 그의 눈웃음이 저만을 향한다는 사실에 더욱 달콤했으나, 말미에 불안감이 린느를 옥죄었다.

‘저 웃음이 내 것이 맞을까?’

정말, 그의 웃음을 탐해도 괜찮을까? 만감이 교차하며 린느의 머리와 마음을 어지럽혔다. 아무리 원작 내용이 깨어지고 미리안이 밀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의 웃음을 탐해도 될지 의구심이 들었다.

마냥 동화 속 주인공처럼 무작정 그의 사랑에 의지하기엔, 린느는 너무나도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 주야장천 목격했던 그의 집착과 광기, 그리고 말로가 떠오른 탓이다.

더불어, 그의 이 다정함이 정말 저를 좋아해서 올라온 진심인지, 미리안의 질투를 자극하기 위함인지 알 게 뭐냔 말이다.

‘역시 엮이는 게 아니었는데.’

그는 기억을 잃은 린느를 꾀어, 다시 제게 반하도록 애쓰는 사람처럼 순간마다 고혹적이다. 그런데 이제는 다정하기까지 하다니! 이런 남자와 일상을 함께하니 이런 불순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지 않을까? 린느는 앞이 암담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기억을 잃었는데도 또 반했다며 비웃을지도 몰라. 아니면, 애초에 기억을 잃지 않았는데 잃은 척했다며 혼을 낼지도 모르고.’

다시는, 그를 사랑할 일은 절대 없다고 자부했지만 그거야 그가 맹목적으로 미리안만 바라봤을 때의 이야기였지. 이처럼 그가 미리안에게 곁도 주지 않고 정말 목숨만 살려 주기 위해 최소한의 배려만 하고 있을 땐 말이 달라진다. 그래서 더더욱 그의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다. 린느는 잠시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각하, 저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뭐 물어봐도 돼요?”

“뭐든지.”

밀러는 오히려 린느의 물음에 기꺼워하며 자세까지 고쳐 앉았다. 오랜만에 눈을 마주치고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단 기대에 부풀어 가슴께가 징징 울렸다. 밀러의 커다란 상체가 린느 쪽으로 슬쩍 기울자, 린느가 물었다.

“우리 무슨 사이예요?”

린느의 물음에 밀러의 동공이 확장됐다. 섀르넌과 함께 그녀의 이런 기개를 두고 황궁 기사만큼 패기로운 여인이라 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패기로운 질문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밀러의 그 넓은 가슴팍 위로 심장 소리에 맞춰 셔츠가 미세하게 떨렸다.

섀르넌이 여인에게 고백할 땐 꽃과 선물은 챙기라 했던 거 같은데, 빈손에다 이렇게 허술하게 마음을 내비쳐도 되나?

과거, 섀르넌이 고백하는 방법을 그에게 자세히 읊어 줄 때 밀러는 그의 말허리를 잘라냈었다.

「취했나? 차라리, 양 떼를 길들이는 법을 알려 주지? 내가 여인에게 고백할 일보단, 양 떼와 마주칠 가능성이 더 클 테니까.」

젠장. 말도 참 예쁘게도 했다.

밀러는 과거의 저를 향해 닥치고 고백하는 법을 끝까지 경청했어야 했다며 타박했다. 그는 그토록 혼란에 빠졌고, 얼마 안 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어차피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 줄 리가 없는데, 저 혼자 설레발치는 꼴이 우습고도 볼썽사나운 탓이다. 게다가 고작 ‘무슨 사이’냐고 물었을 뿐인데 설레발칠 건 또 무어인가. 그는 제 꼴이 우스워 자조하는 동시에 결연하게 말했다.

“그런 물음이 나오지 않도록 하지.”

린느는 검지로 뺨을 긁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고용주와 고용인으로서 선을 지키겠단 뜻인지, 아니면 관계 발전을 눈으로 확인시켜 주겠다는 것인지 궁금했으나 더는 묻지 않았다.

“그럼, 푹 쉬어. 오늘 피곤했을 테니까.”

그는 작정한 사람처럼 린느의 마음을 끝까지 녹여 놓고서야 방에서 나섰다.

* * *

대공저에서 락센 가 저택까지의 거리보다, 수도까지 향하는 거리가 훨씬 더 짧았다. 물론, 두 사람이 탄 마차 안에는 정적이 가득했으나 금세 수도에 진입한 덕분에 그 어색함도 오래가지 못했다. 린느는 마차 내실 창문에 달라붙어 열심히도 살폈다.

“세상에, 수도가 이렇게 가까운데 여태 한 번을 안 와 봤네.”

그녀의 혼잣말에 밀러는 웃음을 삼키며 반대편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쩜 저렇게 꾸밈없이도 사랑스러운지 밀러는 미소 참기가 힘들었다.

“알렉스를 그대에게 붙여 줄 테니, 마음껏 쇼핑하고.”

“알렉스 님을요? 그럼 각하께선 홀로 연회장에 참석하신다는 거예요?”

“괜찮아. 그대가 무얼 걱정하는지는 잘 알아.”

“괜찮지 않아요. 알렉스 님이라도 각하 곁에 있어야 해요. 공작님도 없이 홀로 어떻게 연회장에 가시려고 그래요?”

공작이란 말에 밀러의 눈동자가 차게 식었다. 듣기 거북한 말이겠지만, 린느는 진심으로 그의 안위가 걱정됐다. 이제 와서 그의 불안증세를 귀족들이 알아채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참을 수가 없었다.

“각하의 불안 증세가 나아진 건 저도 알겠어요. 하지만 그럴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는 건 각하께서 더 잘 아실 거 아니에요.”

“어차피 연회장 내부로는 알렉스도 함께하지 못해. 설령 함께 참석할 수 있다 해도, 그대 홀로 보낼 순 없어.”

“그럼, 정말 홀로 참석하신다구요? 귀족들이 얼마나 지독한지 각하께서 제일 잘 아시잖아요.”

밀러는 창문에 기대어 저를 걱정해 주는 린느의 눈빛을 마음껏 탐했다. 그래, 저 눈빛이었지. 처음 그녀가 대공저에 초대되어 마주한 그날도 지금과 같은 눈으로 걱정해 줬다. 바뀐 건 밀러 자신뿐이지, 그녀는 바뀐 적이 없었다. 기억을 잃은 이후로 그녀는 늘 그 자리 그대로였다. 그게 그렇게 고마우면서도 마음이 아플 만큼 미안했다.

“린느, 내가 그대를 적잖이 걱정시켰나 봐.”

“아,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구요.”

격양되어 있던 린느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그때,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늦추며 안정적으로 정차했다. 뒤늦게 창밖을 바라봤지만, 보이는 건 황궁이 아니라 화려한 상점들뿐이었다.

“황궁은요?”

밀러는 유연하게 마차에서 내리더니, 그녀에게 손을 내어줬다. 기억을 잃었든 말든, 적도 홀릴 만큼 유려한 미소와 함께 밀러가 입을 뗐다.

“연회는 저녁부터. 그전까지 그대의 시중을 들까 해. 이쯤이면 고급인력이 아니겠나?”

잘난 남자가 그래도 되겠냐며 묻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모습마저도 오만하고도 잘났기에, 린느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쏟아지는 시선에 린느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남들 시선 따위 오히려 즐기는 편이라지만, 대낮 상점가에서 대공의 곁을 지키는 건 꽤 고된 일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뭐가 좋은지 아까부터 입꼬리를 예쁘게도 올려 웃고 있다.

‘불안증이 정말로 사라진 건가?’

원래라면 인파들의 시선에도 거북해하며 자리를 피할 남자인데도, 그는 오히려 어느 때보다 빛났다. 마치, 린느의 곁이 제 자리인 것처럼 만족해하기도 했으며, 간간이 린느를 내려다보며 잘 있는지 확인까지 했다.

‘이상해, 진짜.’

린느가 알던 그 거만하고 싹수없는 남자는 어디로 사라지고, 이렇게 다정한 남자가 제 곁에 있는지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의상실부터 모실까요? 아니면 디저트 가게?”

“말씀 편히 하세요. 저 방금 소름 돋았어요.”

“분부대로.”

밀러는 의상실 문을 열어젖히며 린느에게 손바닥을 보여 안을 가리켰다. 동시에, 의상실에서 대기하던 영애들이 턱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두 사람을 번갈아 봤으니. 소리 없는 비명이 의상실을 가득 채웠다.

부러움이 가득한 그녀들의 시선이 대번에 린느에게 꽂혔다. 분명히 초면이었으나, 이미 눈치 빠른 영애들은 린느와 밀러에게 치맛자락을 펼치며 인사하기 급급했다.

“제국의 보배이신 대공 각하를 뵙습니다!”

“에메랄드보다 아름다우신 소백작님을 뵙습니다!”

영애들은 소백작인 린느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겠다며 앞다퉈 신경전을 벌였고, 밀러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하지만 린느는 갈수록 해괴해지는 인사말이 오글거려 곤욕스러웠다.

게다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그녀들은 기꺼이 그 넓은 의상실을 뛰어다니며 곳곳에서 일하던 마담들과 재단사들을 불러 모아 놨다. 뒤늦게 대공과 소백작을 마주한 이들은 숨을 할딱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리를 굽혔다.

린느는 이 상황을 직관하며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시에, 밀러의 불안 증세는 어쩌면 직업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반면, 밀러는 드뷔르 의상실에서 그녀에게 저지른 자신의 과오를 용서받기 위해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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