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라밀라가 자리에서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자신이 밟고 있는 이곳이 하늘인 걸까? 루텡라스가 지하실에 가둔 그날, 결국 이 징한 목숨이 끊어졌고. 하늘에서나마 루비와 만날 수 있게 된 걸까?
하늘이 가엾게 여겨, 지옥으로 떨어트리기 전에 여동생 얼굴 한 번 보게 해 주나 보다. 어쩐지, 그 무심한 대공이 직접 대공저 마차를 보내 온 것도 이상했어. 그 마차를 타고 대공저에 도착해 오래전에 잃은 여동생을 마주한 건 더더욱 이상하고.
라밀라는 현실을 부정하며, 탈진할 만큼 눈물을 쏟아냈다. 그래, 꿈이든 천국이든 뭐든 좋다. 12살에 멈춰 있던 여동생이 어엿한 소녀로 자란 모습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으니, 그걸로도 충분했다. 그녀가 엉엉 울며 주저앉는 틈에 린느는 말없이 루비에게서 티팟을 뺏었다. 루비는 이 상황이 어색한지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으나, 어쩐지 라밀라의 품이 따듯하고 익숙해 그녀의 등을 쓸어 내려 줬다.
“살아 있었어…. 정말, 정말 살아 있었어. 죽지 않고!”
라밀라는 그 얇은 팔로 루비를 꽉 끌어안았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단 듯이, 그녀의 포옹은 무척이나 진득했다. 그녀의 울음소리는 그칠 줄 모르고 이어졌다.
그 때문에 복도에서 루비를 기다리던 메리가 라밀라의 울음소리를 듣고 발을 동동 굴렀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문을 열어 볼까 고민하던 중에, 안나가 다급히 뛰어왔다.
“하녀장님? 그, 그게 저희 아가씨가 울린 게 아니라요. 그으…….”
린느가 라밀라를 울렸다는 오해를 살까 봐 메리가 나서서 변명했다. 그러자, 안나는 다정하게 웃으며 빨랫감이 쌓였으니 그걸 정리하고 오는 게 어떠냐며 자연스레 일을 시켰다. 메리는 일단은 알았다며 자리를 비켰고, 안나는 라밀라의 울음소리가 잦아들 때쯤 노크하여 방에 들어섰다.
* * *
“결혼식 마치자마자 널 찾으러 갔는데, 네가 사라졌었어…….”
라밀라는 울음을 꾹 참고 루비의 손을 계속해서 만져 댔다. 여전히 죄인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고, 루비는 안절부절못했다.
“애초에 혼인 조건 중 하나가 너와 함께 락센 가로 들어가는 거였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라밀라는 또다시 울음을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 그러자, 지켜보던 안나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누구의 짓인지는 모르겠으나, 대공 각하께서 루비를 찾으셨을 땐 빈민굴 다리 밑에서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만약, 각하께서 찾지 않으셨다면…….”
순간 라밀라의 퉁퉁 부은 눈꺼풀이 크게 뜨였다.
“가, 각하께서 루비를 찾으셨다 하셨습니까? 다리에서요?”
“네. 각하께서 직접 명령하시어 루비를 찾았습니다.”
“맙소사….”
라밀라는 새끼를 뺏길까 경계하는 어미처럼 루비를 끌어안으며 어금니를 물었다.
“루텡라스, 그자가 루비를 해치려고……!”
대공저의 비밀을 내놓지 않으면 루비를 보여 주지 않겠다며 윽박지르며 본색을 드러낸 건, 결혼 1년 후였다.
그전까지는 직접 루비를 찾아 주겠다며 라밀라를 위로하기도 했으며, 라밀라가 루비처럼 갈 길을 잃은 아이들을 위해 탁아소를 지을 때도 그 뱀 같은 락센은 라밀라를 위로하는 척 위선을 떨었다. 뒤늦게라도 루비가 자신이 지은 탁아소에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라밀라의 간절한 희망을 짓밟고 농락하며 얼마나 재미를 봤을까!
‘금수보다 못한 놈.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죽여 버리겠어.’
라밀라는 살기 어린 눈으로 허공을 노려봤다. 그때, 안나가 라밀라의 손을 잡고 말했다.
“분한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이제 와서 이렇다 할 증거도 없이 락센 경에게 맞서시는 건 위험합니다. 잘 아시잖아요. 그자가 얼마나 악독한지.”
안나는 라밀라의 마음을 대신해 그녀의 손을 다독여 줬다. 그때, 루비가 그녀의 손등 위로 손을 얹었다.
“사실 기억이 안 나요. 이 대공저로 온 이후로는 기억이 나지만요. 하지만, 저 때문에 이렇게 우시는 걸 보면 라밀라 님은 좋은 언니였을 거예요. 의심하지 않아요.”
“세상에…… 루비.”
“그러니까, 그만 우세요. 많이 울면 머리가 아프거든요.”
루비는 한가득 눈물 고인 눈매를 반달로 휘어 가며 웃었다. 그 모습에 라밀라는 울고 웃으며 루비를 꼭 끌어안았다. 너를 위해서라도 울지 않겠노라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3초도 가지 못했다. 이젠 라밀라보다 훨씬 자란 루비가 그녀를 끌어안고 말했다.
“사실, 대공저에서 저만큼 놀며 일한 하녀도 없어요. 맨날 놀고먹고 쉬고 그랬거든요. 게다가, 기억을 모두 잃은 건 아깝지만 라밀라 님이 걱정하시는 그런 아픈 기억이 하나도 없으니 오히려 좋은 거 아니겠어요?”
위로한답시고 건넨 말에 라밀라는 더욱 울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진정시키려 해도 라밀라는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땅거미 지는 시간이 되어서야 안나의 손에 이끌려 두 자매가 린느의 방 밖으로 나섰다. 린느는 두 다리를 뻗고 쉬다가도 밀러의 혜안에 소름이 돋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동시에, 그가 숨긴 따스한 온정에 미소가 지어졌다.
‘할 줄 알면서 맨날 차가운 척이야.’
린느는 흥, 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 * *
밀러는 한쪽 귀를 만지며 주변을 돌아봤다. 곁에서 열심히 일하던 알렉스가 밀러를 바라보더니, 시키실 일이 있냐며 물었다. 밀러는 고개를 저으려다가 멈칫했다.
“황궁 근처에서 가장 좋은 호텔로 예약해 둬.”
“연회 때문이십니까? 어차피 황궁에 있는 빈방으로 안내해 주실 텐데, 굳이 호텔을 예약하실 필요가…….”
언제부터 시키는 일에 말대꾸했는지, 밀러가 눈으로 잔소리하듯 알렉스를 빤히 바라봤다. 그 무뚝뚝한 무표정에 알렉스는 말문을 닫고 밀러의 눈치를 살폈다.
“황궁 연회에 시간을 잡혀 봐야 3시간이면 충분하지 않겠나?”
“3시간… 은 조금 무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각하를 놔주시지 않을 거 같으니 말이죠.”
하긴, 얼마나 오랜만에 만나는 친우인가. 이번 연회는 밀러를 위한 황태자의 연회라 봐도 무방할 정도인데, 당사자가 3시간 만에 쏙 빠져나간다니. 황태자가 이를 알게 되면 눈시울을 붉힐 만큼 섭섭한 이야기일 테지. 밀러는 피곤한 얼굴로 짧게 한숨 쉬었다.
“그럼 린느에게 직접 물어보고 정하도록 하지.”
저번처럼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지라, 밀러의 표정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반면, 알렉스는 그런 밀러의 표정을 읽고서 흐뭇했다. 여자라면 학을 떼던 대공이 자연스레 누군가를 좋아하고 곁에 두려 하다니. 장족의 발전이었다.
“각하, 그럼 제가 아가씨께 여쭙고 올까요?”
일부러 군말을 얹자, 밀러는 기다렸단 듯이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내가 직접 물을 일이니, 그대는 이 서류나 정리해 둬.”
시키지도 않은 걸 쓸데없이 앞서간다며 밀러는 가벼운 코트를 어깨에 두르며 집무실 밖으로 나섰다. 알렉스는 그런 그를 보며 웃음을 참느라 목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덜컥.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밀러는 신난 걸음을 다독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복도는 또 왜 이렇게 긴지.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대번에 린느의 방으로 향했다.
요즘 린느가 이리저리 자신을 피해 다니는 통에, 그는 잠도 제대로 청하지 못했다. 무언가 그녀에게 잘못을 저지른 거 같긴 하나, 그는 알 수가 없어 속이 아팠다. 그나마 오늘 아침엔 라밀라가 타고 온 마차를 핑계로 한마디라도 섞을 수 있었으니 그게 어딘가.
소낙비에 헤매던 늑대가 주인을 찾은 것처럼, 풀 죽어 있던 그의 눈빛이 생기를 얻었다. 그래, 어쨌든 아침에 한마디 섞어 줬으니, 이 기세를 타서 함께 수도에 가 보자고 말해 보는 거다. 그걸 핑계로 그녀의 마음을 풀어 줄 생각을 하니, 벌써 안도되는 기분이었다.
밀러는 헛기침을 하며, 어느새 도착한 린느 방문을 빤히 바라봤다. 첫마디를 뭐라 꺼내야…….
덜컥.
“헉! 아, 아 놀래라! 각하, 남의 방문 앞에서 뭐 하세요?”
문을 열자마자 거대한 밀러가 서 있어 그녀도 놀랐겠지만, 밀러 역시 심장이 내려앉듯 놀랐다. 난데없이 린느와 마주친 탓이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
말미에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아린 탓이다. 밀러는 마른침을 삼키더니, 린느에게 다시 시선을 뒀다.
“들어가서 말해도 되나?”
심장이 아파서 앉을 곳이 필요하다는 둥, 그대의 눈을 마주치기 버겁다는 둥의 진실은 말하지 못했다. 체면이 있지.
“네, 뭐.”
린느는 복도 양 끝을 재빨리 훑어보더니, 미리안이 없는 걸 확인한 후에야 밀러를 방 안으로 잡아당겼다. 밀회를 즐기는 남녀 사이처럼, 린느는 문까지 걸어 잠근 후에야 밀러에게 의자를 내어 줬다. 그녀는 잡상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처럼 밀러를 대했으나, 그녀가 문전 박대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밀러는 다행이라 여겼다.
잠시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고, 어색함에 익숙하지 못한 린느가 먼저 입을 뗐다.
“물어보실 게 있으시다구요?”
“응. 내일이면 황궁이 있는 수도로 떠날 참인데, 그대가 아쉬워할까 싶어서.”
뭐가 아쉽다는 걸까? 린느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놀리는 건가? 하지만 홀로 황궁 연회에 참석하는 걸 자랑하려고 이 밤에 여기까지 왔을 리가…….
‘아니지, 저 남자라면 놀리려고 왔을지도 몰라.’
린느는 밀러가 사람 놀리는 데에 도가 튼 사람이라며 구시렁대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수도로 떠나신 동안 제가 각하를 보고 싶어 할까 봐 그런 말씀 하시는 건 아니죠?”
그녀가 저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어렴풋이 예상은 했지만, 정작 저 예쁜 입으로 듣고 있자니 속이 아렸다. 그래, 린느 뷔 세르트는 한번 뱉은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제게 관심이 없다 외치던 그 순간에도 그녀는 그 말에 진심이었을 테고, 지금도 진심일 테지. 밀러는 입 안이 꺼끌꺼끌했다. 자신이 그녀에게 한 짓이 있으니, 그녀의 무정함을 탓할 게 못 됐으며 그녀가 주는 게 애정이 아니라 대못이어도 받을 수밖에. 밀러는 얇은 코트마저 린느의 어깨에 둘러 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대를 보고 싶어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