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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64화 (63/122)

@64화

찬바람이 바늘처럼 따가웠으나, 앞에 선 남자는 자신이 태양이라도 된 듯 얇은 옷차림이었다. 금방이라도 울컥 비가 쏟아질 것처럼 어두운 하늘과 그 하늘이 만든 날 선 바람이 이 남자의 몸은 뚫지 못했나 보다. 그는 말없이 린느를 내려다봤고, 린느는 팔뚝을 문질렀다.

그는 자신의 어깨에 코트가 없단 걸 뒤늦게 깨닫고, 나직이 탄식했다. 그 탄식 뒤로 이어진 말은 퍽 시답잖았다.

“방에 없다길래.”

적절한 인사말을 찾는다고 찾은 게 고작 이거였다. 린느는 그의 두서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으며, 그의 얇은 옷차림에 다시 눈이 크게 뜨였다.

“아, 안 추우세요? 얼어 죽을 거 같은데.”

“전혀.”

얇디얇은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 거기에 적당히 흐트러져 있는 머리칼이 꼭, 호텔에서 마주한 그의 모습과 비슷해 린느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어서 뗐다. 방금까지도 몸을 가르며 들이닥치던 찬 바람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슴이 쿵 울렸다.

“미리안 님, 그럼 내일 봐요! 전 이만!”

린느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고, 남은 두 사람은 서로 껄끄러워하며 시선을 피했다. 결국 그 어색함을 참지 못한 미리안이 먼저 인사하고 문을 닫았다.

덜컥.

밀러는 굳게 닫힌 문을 뒤로하고 곧장 린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미리 대공저 안을 환하게 밝혔으나, 그래도 못내 마음에 걸려 린느의 뒤를 따라잡았다. 그럴수록 린느는 걸음을 재촉했고, 어느새 린느의 방문 앞까지 도착했다. 문을 열고 막 들어서려는 그녀를 잡고, 밀러가 말했다.

“쫓기기라도 하나? 얼굴 한번 안 보여 주네.”

그의 섭섭함이 잔잔히 어려 있었다. 차마, 그런 그에게 모질게 말할 순 없었으나, 린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왜 자신에게 이런 표정을 짓고, 이런 물음을 던지는 걸까? 당혹스러우면서도 짜증이 치밀었다.

“여독을 풀라면서요? 저 이제 쉴 거예요.”

린느는 뒤늦게 날카로운 자신의 말투에 후회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저를 걱정해서 직접 여기까지 찾아와 줬는데, 뭐가 그렇게 못마땅해서 짜증이 나는지. 린느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자조했다.

“그래.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깨워.”

“루비도 있고 메리도 있으니까 각하를 깨울 일은 없을 거예요.”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만약의 일을 말한 거였어.”

밀러는 마른 웃음을 보이더니, 린느에게 어서 방으로 들어가라 손짓했다.

“라밀라는 걱정하지 마. 날씨가 궂어서 비가 그치는 대로 온다 했으니까. 그대라면 이 순간에도 라밀라를 걱정할 거 같아서 말해 주는 거야.”

그는 끝까지 그녀를 다독여 줬고, 문이 닫힐 때까지도 밀러는 자리를 지켰다. 그의 그런 다정함이 린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궂은 비는 며칠이나 지속됐고, 해가 뜬 건 황궁 연회를 고작 이틀 앞둔 날이었다.

* * *

“이야, 이게 얼마 만에 보는 해야?”

“그러게. 아가씨! 오늘 낮에는 뒤뜰에서 피크닉 하는 게 어때요?”

“그러고 싶은데, 오늘은 손님이 오기로 해서 안 돼.”

린느가 다정스레 웃으며 단호하게 잘라내자, 루비는 주근깨가 인 콧잔등을 찌푸렸다. 루비의 웃음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어 린느는 배시시 따라 웃었다.

“대신에 손님이 다녀가시면 그때 가자. 미리안 님도 같이!”

“움, 그래요! 그런데 미리안 님은 저희 없이도 알아서 뒷마당에 자주 나오셔요. 아마 저보다도 뒷마당 길을 더 잘 아실 거예요.”

뒷마당에 뭐가 있다고 자주 나오지? 린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공저 로비로 향했다. 그때, 때마침 밀러와 딱 마주쳤다. 린느는 어색한 표정으로 그에게 인사했고, 밀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그녀의 인사를 받아 줬다. 차라리 예전처럼 화를 내고 잔소리를 하면 좋겠건만, 밀러는 린느가 무슨 말을 하건 어떤 식으로 수업을 빼먹든지 간에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정말 불편해서 못 살겠네. 우는 애한테 떡 하나 더 준다더니, 설마 나한테도 그러는 거 아니야?’

린느는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한숨을 쉬었다.

“걱정이라도 있나?”

“아, 아니요. 라밀라 님은 언제쯤 오세요?”

“저기 오는군.”

밀러의 검지가 가리킨 마차는, 락센 가의 마차가 아니라 대공저의 마차였다.

“루비, 메리, 가서 차와 디저트 좀 준비해 줄래?”

“네, 아가씨!”

루비와 메리는 활짝 웃으며 부엌으로 금세 사라졌다. 그사이, 화려하고 튼튼한 마차가 대공저 앞마당을 멋지게 돌더니 입구에 딱 주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밀라가 마차에서 내렸다.

“대공 각하를 뵙습니다. 소백작님도 뵙습니다.”

고작 며칠 만에 라밀라의 안색이 전보다 더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린느는 그런 라밀라가 안타까워 발을 굴렀다. 망할 루텡라스! 그 성격에 라밀라를 가만히 뒀을 리가 없지. 린느는 라밀라의 손을 꼭 잡고선 걱정스레 바라봤다.

“따듯한 차를 드시겠어요?”

“뭐든 감사합니다. 뭐든요…….”

라밀라는 말끝을 흐리며 울컥 솟는 울음을 꾹 삼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린느의 다정함에 그간 상처받아 얼어붙은 마음이 눈 녹듯이 자르르 끓었다. 동생이 살아 있다면, 또래이지 않을까? 라밀라는 잘게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락센 경에게는 미리 말해 뒀으니, 며칠 묵고 돌아가도 좋아.”

“영광입니다, 대공 각하.”

라밀라는 밀러에게 고개를 숙여 예의를 차렸고, 밀러는 그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그녀를 지나쳐 집무실로 향했다. 눈치를 보던 알렉스가 밀러와 두어 걸음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고요한 복도를 지나쳐, 밀러가 집무실 문고리를 당기며 로비 쪽을 빤히 응시했다. 그는 잠시 텀을 두고 나직이 말했다.

“라밀라가 죽으면 린느가 속상하겠지.”

“그러시겠죠. 아무래도 아가씨께서 정이 많으신 분이라…….”

알렉스가 보낸 자들이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락센이 라밀라를 죽이고자 혈안이 되어 있다고 했다. 그가 그녀를 죽이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렇다 해서 알아낼 이유도 없었다. 라밀라가 죽든 말든 그건 밀러에겐 아무런 감흥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감흥이 생겼다. 라밀라가 죽으면 적어도 린느가 아파할 테니, 감흥이 생길 수밖에.

“하이레니아 후작이 락센 가의 가주던가?”

“예, 각하.”

“오만한 것들. 오래간다 했지.”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금빛 눈동자가 누구라도 씹어먹을 것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아 살기를 띠자, 집무실 공기가 차게 식었다. 그는 집무실로 들어서며 나직이 알렉스에게 명령했다.

“당분간 락센 경과 라밀라 일은 함구하도록. 때가 되면 알아서 이용할 테니까.”

“예, 각하!”

알렉스는 평소보다도 더욱 각을 세워 대답했다. 역시, 우리 각하께선 멋있다며 팔불출처럼 입꼬리를 움찔댔다. 그런 그에게 밀러는 나직이 타박하며 말했다.

“루비라는 아이, 린느와 함께 있나?”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확인해 볼까요?”

밀러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할 이야기가 많아 찻물이 식을 테니, 티팟을 챙겨 세르트 영애의 수발을 들라 말해 둬.”

“예! 각하!”

* * *

라밀라는 비쩍 곯은 손으로 이미 차려진 찻잔을 움켜쥐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라밀라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제 앞길이 암담하여, 소백작님께서 건네신 끈을 뒤도 생각하지 않고 잡았습니다. 이렇게 하면 소백작님께서 퍽 당혹스러우실 걸 알면서도, 잡았어요.”

라밀라는 죄인처럼 찻잔만 바라봤다. 초면이나 다름없는 소백작의 도움을 냉큼 받아먹은 저 자신에게 염치없다며 자조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전 당혹스럽지도 않고, 오히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한걸요.”

“그럴 리가요…. 각하께서 분명 언짢아하셨을 텐데요.”

“아, 뭐 각하께선 늘 언짢으신 분이라 상관없어요. 원래 표정이 좀 늘 언짢잖아요?”

“네?”

라밀라는 그제야 린느와 시선을 맞췄다. 당황한 듯 그녀는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그러자, 린느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아까도 그래요. 그냥 좀 다정하게 인사 받아 주면 좋겠는데, 꼭 그렇게 근엄한 척을 한다니까요? 물론, 원래도 근엄한 건 맞지만요.”

“풉.”

라밀라는 그녀의 다정함에 그만 웃음을 터트렸고, 두 사람 사이에 잔잔한 웃음이 퍼졌다.

“아까 각하께서 하시는 말씀 들으셨죠? 며칠간 대공저에서 푹 쉬다 가시라는 말씀이요. 그거 명령이니까 절대 어기시면 안 돼요.”

라밀라는 콧잔등을 찡긋하며 환하게 웃었다. 린느의 말장난을 이겨 낼 재간이 없는 탓이리라.

“저어 그런데…… 이거 정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주셨으면 좋겠는데, 혹시 오해하실 거 같으면 그냥 말하지 않을게요.”

무슨 말을 하려기에 저렇게 진중한 표정으로 말하는 걸까. 라밀라는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편히 말씀해 주세요, 소백작님.”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락센 경이 너무 꼴 보기 싫어요. 그런데 이걸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계략 여주들 보면 정말 똑똑하게들 엿 먹이던데. 린느는 속이 답답했다. 마냥 라밀라를 도와줬다가는 밀러가 어떤 반응으로 나올지 모르겠으니 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리면 걱정하실 테니 안 되고…….’

린느는 라밀라의 대답을 기대했지만, 라밀라는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소백작님께서 저를 좋게 봐 주시어 무한한 영광입니다만, 전 그런 호의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이 이상 소백작님께 염려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세상에. 이 세상에 호의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어딨어요? 하물며 감옥에 갇힌 범죄자에게도 3년에 한 번씩 기회를 준다던데, 라밀라님은 왜 스스로를 가두는 거죠?”

라밀라는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때, 루비가 뜨거운 티팟을 들고 방으로 들어섰다. 과열된 분위기에 루비는 눈치를 살폈다. 메리도 아니고, 굳이 저를 들여보낸 까닭이 이 차가운 분위기를 풀어 주란 뜻일까? 미치겠네. 루비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물었다.

“찻물을 데워 드릴까요?”

루비의 목소리에 라밀라는 신의 음성을 들은 사람처럼 숨을 멈췄다. 이내, 고장 난 인형처럼 고개를 돌려 루비를 바라보더니 라밀라는 그만 제 입을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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