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덜컥.
문이 닫히자, 락센은 그제야 자리에 편안히 기대어 앉았다. 말에게 약을 먹였다가는 단순 사고로 위장한 살해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그녀를 태운 마차의 말 사체를 검사하면 약이야 금방 들통날 테니까. 하지만, 바퀴를 손대면 증거조차 남기지 않고 처리할 수 있다.
멀쩡하던 비싼 바퀴가 겨울 찬바람에 쩍 갈라져 얼마나 속이 상했던가. 그녀를 이렇게 증거도 없이 죽이라는 신의 계시인지, 락센은 갈라진 바퀴가 고마울 지경이었다.
“후우…….”
비록, 라밀라와 혼인을 하며 날린 돈이 아까웠으나, 이만하면 남는 장사라며 락센은 홀로 다독였다.
‘고상한 척 위선을 떨긴. 망할, 그 탁아소를 짓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금고를 비울 일도 없었을 텐데.’
라밀라는 락센과의 혼인을 승낙하는 조건으로 탁아소 7곳을 세울 수 있는 비용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퍽이나 그녀가 그 많은 돈으로 탁아소를 짓겠다며 속으로 비웃었으나, 라밀라는 그런 그를 비웃듯이 정말 그 많은 돈을 탁아소 짓는 데에 사용했다.
「어릴 적에 저도 탁아소에서 잠깐 살았거든요. 그때, 조금만 더 상냥한 원장님을 만났더라면……. 아니에요. 울적한 이야기 해서 미안해요.」
그는 말미에 눈물을 짓던 라밀라를 떠올리며 헛웃음을 뱉었다. 그 이후로 라밀라는 매주 주말마다 탁아소를 찾아갔고, 그 고상한 얼굴로 아이들을 보살피며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지어 댔다. 갈수록 그녀가 진심으로 행복한 게 거슬려, 락센은 탁아소 출입을 금지했다. 탁아소를 다시 가고 싶다면, 대공저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낱낱이 말하라며 협박했지만, 라밀라는 입을 다물고 탁아소에 발길을 끊었다. 그때부터, 그녀의 불행만을 위해 락센은 무던히 노력했다. 그런데 이젠 그 노력도 귀찮고, 쓸 데가 없어졌다.
‘이제 버릴 때가 됐어.’
락센은 두 팔과 다리를 뻗어 기지개를 켜더니, 늘어지게 침대에 누웠다. 그의 입꼬리는 활짝 올라가 있었다. 속이 편하니 잠도 쏟아졌다. 근 며칠 동안 제대로 눈도 붙이지 못한 탓에 그는 푹 잠들었다.
반면, 락센의 보좌관은 난제에 부딪혀 쩔쩔 헤맸다. 품에 있던 금화 주머니를 마부에게 건네는 것까진 성공했으나 갑자기 쏟아지는 장대비에 쫓겨 갈 곳을 잃었다. 마부들이 지내는 별관에 들어서자, 돈을 받은 마부가 그의 귀에 나직이 일렀다.
“이 정도 빗발이면 멀쩡한 마차도 전복될 거 같소.”
어쩌면 사고사로 위장하기 더 좋은 조건이라 볼 수 있을 테지만. 보좌관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마부의 입을 막았다.
“이런 날에 굳이 마차를 몰았다며 경을 치실 분이니, 오늘은 출발하지 말게. 어디 눈치가 한두 단이신가?”
마부는 진중한 얼굴로 주억거렸다. 하긴, 대공의 눈은 하늘에도 달렸다는 소문도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테다. 마부는 어둠으로 가득한 하늘을 힐끔 바라보더니 진저리를 쳤다.
그사이, 보좌관은 장대비가 쏟아진 게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이 사실을 락센에게 알리는 게 맞지만, 빗발이 앞을 가려 지척에 있는 것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는 우두커니 자리에 서서 쏟아지는 빗발을 바라봤다.
‘이러면 대공가에서도 출발을 재촉하긴 힘들겠지?’
그 대단한 대공도 천재지변을 어찌하진 못할 테니, 이 비가 일주일만 지속되면 라밀라 몸에 새겨진 멍 자국도 숨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보좌관은 두 손을 모아 허공에 대고 기도를 읊조렸다.
* * *
라밀라는 침대에 걸터앉아 깡마른 몸을 떨었다. 밤새 축축하고 어두운 지하실에 갇혀 지낸 탓에, 몸에 자꾸만 한기가 들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고작 반나절 갇혔는데도 이토록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프다니. 선대 대공비는 얼마나 두렵고 아팠을까. 라밀라는 마음을 다스리려 애썼으나, 마음처럼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쾅.
어두운 창밖이 대낮처럼 번쩍 환해졌다가 다시 어두워지길 반복했다. 한번 내린 장대비는 끝을 모르고 내리기 바빴으나, 선대 대공비가 흘린 눈물보다야 많을까. 지독한 죄책감에 라밀라는 눈물마저 말랐다.
똑똑.
갑작스러운 노크에 라밀라의 어깨가 들썩했다. 노크 소리 뒤로 익숙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밀라의 하녀였다. 그녀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울상을 지으며, 문을 달칵 걸어 잠갔다.
“날이 추운데 이러고 계시면 어쩌십니까.”
락센 경의 눈 밖에 날까 두려워, 다른 사용인들은 라밀라의 침실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 탓에 라밀라는 여태 얇디얇은 연회 복장 차림으로 몸을 떨었다.
“난 괜찮아. 자네가 걱정이지. 이렇게 와도 돼?”
“주인님께선 주무시고 계세요. 아주 잡아 가도 모르게 잠드셨거든요.”
괴물들은 뭐 하나. 저 못돼먹은 루텡라스 안 데려가고. 하녀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자신의 주인을 욕하며, 라밀라의 어깨에 담요를 걸쳐 줬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아마도 대공저로 곧장 출발하진 못할 거 같습니다.”
“소백작님이 기다리실 텐데.”
라밀라는 평소보다도 힘없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지하실에 갇혀 있는 반나절 동안 그나마 남아 있던 혼과 생기를 뺏긴 사람처럼 어딘가 텅 비어 보였다. 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인 탓일까. 이 지옥에서 더는 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아, 모든 게 다 귀찮아졌다. 하녀는 그런 그녀를 보며 눈물을 짓더니, 서둘러 눈가를 쓱 닦았다. 그리고는 결연에 찬 눈으로 그녀에게 편지지를 건넸다.
“엊그제에 도착한 서신이어요. 주인님께서 먼저 뜯어 볼까 두려워, 제가 숨겨 뒀고요.”
라밀라에게 도착하는 모든 편지와 초대장은 락센 경이 직접 검수하고 직접 답장하며 감시한다. 라밀라의 숨통을 옥죄는 방법 중 하나였으며, 그녀가 외부와 소통하는 창을 닫아 도망갈 구멍을 막기 위함이었다. 라밀라는 그녀가 건넨 서신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빤히 바라봤다.
“…이, 인장이.”
“예. 황궁에서 도착한 서신이어요. 그것도 황후궁에서 직접 도착한 서신이니, 어서 열어 보셔요.”
하녀는 들뜬 표정으로 라밀라를 재촉했다. 이 서신이 그녀를 구할 수 있길 기도하며, 하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라밀라는 그녀의 성화에 서신을 뜯어 읽었고, 다 읽은 후에는 벙찐 표정으로 입매를 떨었다.
“황궁 연회에 초대받으신 거죠? 그런 거지요?”
“어, 어. 그렇네. 왜, 나 같은 사람한테 이런 걸…….”
라밀라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황궁 연회와 같은 명예로운 자리에 저 같은 여인이 왜 초대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락센 경에게 보낼 편지를 제게 잘못 보낸 게 아닐까 의심했으나, 초대장에는 떡하니 라밀라의 이름과 황후궁이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왜…….”
선대 대공의 정부였고, 그로 인해 멀쩡한 사람을 죽이는 데에 동조한 인간 말종인 저를 왜 초대했을까. 벌을 주기 위함일까? 라밀라는 초연한 얼굴로 하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하녀가 말을 했다.
“주인님께서 갈 곳 잃은 아이들을 보살펴 주시고 아껴 주신 걸 황후 폐하께서도 알게 되신 게 아닐까요?”
“그렇다 해도 난 이런 자리에 갈 수 없어. 내가 무슨 낯으로…….”
“그건 폐하께서 정하실 문제이지요. 주인님, 그런 생각 마세요. 네?”
하녀는 울먹이며 라밀라의 손을 꼭 잡아 다독였다. 라밀라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또다시 지독한 죄책감에 휩싸였다. 자신의 과거를 이 다정한 하녀가 알게 된다면, 저를 두고 악독한 사람이라며 침을 뱉겠지. 라밀라는 입을 꾹 다물고, 힘없는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라밀라는 다정한 하녀에게 안긴 채로 창문 밖을 바라봤다.
‘소백작님이 기다리실 텐데…….’
* * *
천둥이 대공저를 한바탕 뒤흔들자, 린느의 시선이 창밖에 고정됐다. 함께 코코아를 마시던 미리안이 린느의 시선을 따라 바깥을 바라봤다. 방금까지도 맑았던 하늘이 먹구름에 뒤덮여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기세였다.
“린느 님? 괜찮으세요?”
“아, 네네…. 그, 오랜만에 프레이 님과 재미있는 담소 나누셨어요?”
“그럭저럭요.”
미리안은 프레이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린느에게 되묻고 싶었으나,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아 말끝을 흐렸다. 괜한 걸 물어봤다가 린느에게 실망을 안겨 줄까 두려운 탓이다. 긁어 부스럼이 생길까 무서웠으며, 프레이와 함께 린느의 험담을 한 사람이 될까 두려웠다.
‘물어보지 말자.’
미리안은 홀로 다짐하고, 코코아 잔을 내려놨다.
“린느 님께서 부재하시는 동안 하녀장님과 뒷마당에도 가 봤어요. 거기에서 메리와 루비도 만났는데, 즐거워 보였어요.”
“정말요?! 안 그래도 제가 메리와 루비에게도 뒷마당을 추천해 줬거든요. 어때요? 탁 숨이 트이죠?”
린느는 아까보다 밝은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미리안은 그녀의 표정에 안도하며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린느 님께서 추천해 주시는 건 다 좋아요…….”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제가 추천해도 별로인 게 있을 거예요. 그런 걸 취향 차이라고 하죠?”
미리안은 린느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해되는 척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저어… 나중에 저와 함께 뒷마당에 가 보지 않으시겠어요?”
“그래요! 언제든지요. 땡땡이치고 숨어 있기에도 좋구, 거기 과일도 엄청 맛있거든요. 아무튼, 나중에 먹을 거 챙겨서 피크닉이라도 가요, 우리.”
미리안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서진 울타리를 린느에게 어서 보여 주고 싶어 혀가 가려웠다.
똑똑.
“메리가 절 데리러 왔나 봐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제가 너무 오랫동안 린느 님을 붙잡고 있었던 건 아닌지…….”
“에이, 제가 미리안 님 보고 싶어서 찾아왔으니, 제가 미리안 님을 붙잡고 있었던 거죠. 아무튼, 전 이만 쉬러 가 볼게요. 내일 봐요!”
“네! 린느 님.”
미리안은 행복에 겨운 얼굴로 방긋 웃었다. 린느는 그런 미리안에게 양손을 흔들어 준 후에야 문을 열었다.
덜컥.
“허.”
메리나 루비가 있어야 할 자리엔, 그녀들이 아닌 다른 이가 서 있었다. 린느는 놀란 눈을 깜빡였고, 미리안 역시 토끼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