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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62화 (61/122)
  • @62화

    “여독을 풀라 했더니, 슬금슬금 어딜 가고 있었지?”

    “미리안 님이 통 보이지 않으니까요. 얼굴은 확인해야 하지 않겠어요?”

    밀러는 그새 린느가 일 중독에 빠졌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이에 린느는 여독은 대공님이나 풀라며 입술을 삐죽거리며 밀러가 뻗은 손을 무안하게도 지나쳤다. 그녀를 놓친 밀러는 퍽 아쉽단 듯이 입맛을 다시며, 한숨까지 내쉬었다. 그것도 잠시, 눈치 없는 알렉스가 뛰어와 대공을 끌고 집무실로 사라졌으니. 미리안은 이 광경을 눈에 담고서 안도했다.

    ‘봐. 그럴 리가 없지. 우리 린느 님이 각하의 스토커일 리가 없잖아.’

    뒤늦게 미리안을 발견한 린느가 미리안을 끌어안고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어딜 갔다가 이제야 보이냐며 귀여운 타박을 하자, 미리안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전에는 하녀장님과 뒷마당에 나갔구, 오후에는 프레이 님과 차를 마셨어요. 하지만, 저는 린느 님과 마시는 코코아가 제일 맛있는 거 같아요.”

    “그럼 코코아 마실까요? 써니룸에서? 저 오늘 하루 펑펑 놀아도 되거든요!”

    미리안은 생각만으로도 기쁜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밀러가 대공저를 비운 동안, 그녀가 찾아낸 뒷마당 문의 존재를 린느에게 말해 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 * *

    신기루가 틀림없다. 집무실로 다시 돌아와 자리에 앉으니, 좀이 쑤셨다. 밀러는 인간은 이토록 나약하다며 자조했다. 언제는 대공저 바깥으로 나가면 태양에 타 죽는 흡혈귀처럼 숨어 지냈으면서, 지금은 자리에 앉자마자 좀이 쑤신다니. 이보다 더 나약한 생물이 있을까? 밀러는 탑을 이룬 연회 초대장을 바라보며 픽, 웃었다.

    “저 초대장에 담긴 연회장을 모두 돌려면 족히 1년은 걸리겠군.”

    그럼 1년 동안 린느 손을 잡고 함께 여행 다니듯, 연회장을 다닐 수 있을까? 밀러는 그 턱없이 말도 안 되는 상상에 구미가 당겨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 꼴도 보기 싫은 귀족들을 매일 봐도 상관없을 텐데. 밀러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알렉스가 사색이 된 얼굴로 초대장들과 밀러를 번갈아 봤다.

    ‘괜찮으신 줄 알았더니, 아직은 무리이신가…….’

    알렉스는 걱정이 앞섰다. 다른 귀족들의 연회야 미뤄도 되지만, 황궁 연회는 말이 달라진다. 대공이 락센의 연회에 참석했단 소식이 퍼지자, 황태자가 기다렸단 듯이 그를 황실 연회에 초대한 탓이다. 물론, 황태자는 기쁜 마음에 밀러에게 초대장을 보냈겠지만, 밀러의 사정을 아는 알렉스의 입장에선 달갑지 않은 초대였다.

    공식적인 황궁 연회는 1년에 한 번 열리는데, 지난 1년 동안 높은 성과를 보인 귀족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이다. 물론, 밀러는 매년 1년에 한 번씩 초대를 받아 왔으나, 막상 참석한 건 한 번뿐이었으니. 그의 병세가 눈에 띄게 악화한 탓이다.

    ‘이를 어쩐담. 각하께선 달리 방법이 있으실까?’

    알렉스는 식은땀을 쥐고 밀러를 바라봤다. 밀러 역시 초대장을 빤히 바라보며 한숨을 들이쉬고 내쉴 뿐이니, 걱정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황궁 연회에 초대를 받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어려운 건, 초대장을 받고도 불참하는 것일 테지. 특히나, 지금처럼 황태자가 직접 수기로 작성한 초대장을 보내는 때엔 더더욱 불참 의사를 내비치기 어렵다. 알렉스는 잠시 망설이더니 끝내 말문을 열었다.

    “각하, 황궁 연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참석해야지. 황태자 전하께서 모두가 불참해도 밀러 폰 페리하츠 대공만큼은 꼭 참석해 달라며 염원이란 단어까지 쓰셨으니 달리 답이 있나?”

    밀러는 수기로 작성된 초대장을 알렉스에게 보이며 흔들었다. 원래에는 태자궁 시녀들이 황태자가 지목한 귀족들에게 초대장을 작성해 보내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그럴 틈도 없이 황태자가 직접 수기로 초대장을 작성해 밀러에게 보냈으니, 이 얼마나 간절한 황태자의 염원인가.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황태자의 필체는 조금씩 휘어 있었다.

    “하여튼 쓸데없이 다정한 분이지.”

    밀러는 헛웃음을 뱉으며, 테이블 위로 초대장을 곤히 내려놨다. 아직 황궁 연회까지 시간이 남아 있다. 게다가, 지난 연회에선 불안 증세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그 맛이 아쉬울 지경이었다. 그러니, 해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린느와 함께라면 더더욱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밀러는 그 깜찍한 여인에게 포상을 핑계로 다른 드레스를 또 선물하겠노라 다짐했다. 더불어, 화려한 걸 좋아하는 그녀를 다른 연회장도 아니고, 황궁 연회장에데려갈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알렉스에게 물었다.

    “세르트 영애도 함께 참석할 거라 일러둬.”

    “송구스럽지만, 이번 연회엔 초대장을 받은 당사자들만 입장이 허락됐습니다. 아무래도 황태자 전하께서 따로 긴히 하실 말씀이 있는 거 같습니다.”

    밀러는 알렉스의 대답에 크게 아쉬워했다. 황궁 근처에는 유명한 레스토랑도 많고, 맛 좋은 디저트 카페도 많은데. 게다가, 제국에서 가장 큰 의상실이 있는 곳이니 린느가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이를 보여 주지 못할 거란 생각에 속이 상했다.

    아마 그녀와 함께한다면, 그 커다란 청록색 동공이 여기저길 탐내며 노닐 텐데. 밀러는 한숨 끝에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알렉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각하, 아직 황궁 연회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최대한 서둘러 의원을 불러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황궁 연회라면, 웬만한 후작들도 모두 초대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제국의 후작들은 탐욕의 신이 만든 인간이라 여길 만큼 대단한 노공들이 아닌가. 알렉스는 그들의 낯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대공이 황궁 연회에 잇달아 불참한 것을 두고 가장 먼저 의문을 제기한 것도 이들의 짓이었다. 그 이후로 락센과 같은 자들이 아닌 척 요망을 떨며, ‘충성’과 ‘존경’이란 명목하에 허구한 날 대공저로 초대장을 보냈으니. 이 얼마나 간사한 짓인가.

    후작들은 자신들의 가신들을 이용해, 알게 모르게 물밑에서 대공을 압박했다. 그로 인해, 한동안 밀러는 대공저 바깥출입을 아예 미루고 침실에서만 지낸 적이 있었다. 이를 뒤늦게 알아챈 섀르넌이 그의 곁을 지키며 도운 덕분에 병세가 차츰 아물었고, 때마침 세르트 영애가 대공저를 뒤지며 스토커를 자처해 준 덕분에 스토킹을 핑계로 대공저에서 지낼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미리안을 만났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건이 일단락됐다.

    ‘그땐 여러모로 운이 좋았어.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알렉스는 눈앞이 아찔해 진저리를 쳤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밀러는 그런 알렉스를 빤히 응시하며 뭐하냐며 핀잔을 줬다.

    “됐고, 라밀라는 언제쯤 도착하는지 알아봐. 될 수 있으면 내일이나 도착하면 좋겠군.”

    린느가 원해서 라밀라를 초대하긴 했으나, 그 탓에 린느가 제대로 쉬지도 못할까 퍽 염려스러웠다. 린느를 위해, 라밀라가 하루라도 더 늦게 도착하길 바라며 밀러는 만년필을 잡았다.

    “혹시 모르니, 사람을 보내. 루텡라스가 워낙 음험한 자라 마차 바퀴를 부숴, 라밀라도 함께 묻을지도 모르니까.”

    알렉스는 씩씩하게 대답하곤 집무실 밖으로 향했다.

    * * *

    락센은 손톱을 뜯으며 홀로 사용하는 침실을 빙빙 돌았다. 보좌관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함께 입매를 떨었다. 자신의 주인이 위험에 처했단 직감 탓이다. 락센은 간간이 라밀라를 향한 악담을 퍼붓다가도 대공을 향해 악담하길 반복했다. 눈치 빠른 대공 놈이 무슨 냄새를 맡은 게 분명하다며 목에 핏발을 세워 화를 내는 통에 보좌관은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락센의 걸음이 뚝 멈췄다.

    “그, 그 생각을 왜 못했지?”

    “예? 뭐라 하셨습니까?”

    보좌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락센에게 쪼르르 달려가 그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집중했다.

    “지난겨울에 갈라진 바퀴 말이다.”

    “무슨 바퀴……?”

    “이 멍청한 놈! 목소리 낮춰.”

    락센은 기함하며 보좌관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짝 소리 나도록 때렸다. 그러자, 보좌관은 입을 꾹 다물고 바보처럼 주억거렸다.

    “날씨가 추워져 쩍 갈라졌다던 바퀴 말이다. 그 바퀴를 보수했는지를 묻는 게야.”

    “아, 그 바퀴는 타국에서 들여온 거라 버리지 않고 보수했습죠.”

    “그래, 그래그래.”

    락센은 미친 사람처럼 화를 냈다가도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바퀴를 끼운 마차를 꺼내 와. 라밀라는 그 마차 바퀴엔 관심도 없을 테니, 알아차리지도 못할 테지.”

    “…무, 무얼 말입니까?”

    보좌관이 멍청한 표정으로 되묻더니, 돌연 사색이 된 얼굴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제 주인이 할 짓이 무엇인지 이제야 깨달은 탓이다.

    “아, 아니 됩니다. 그럼 각하께선 분명 의심하실 테니……!”

    “의심하면 뭐! 의심이 대수인가? 확실한 증거도 없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가는, 괜한 소문만 돌 테지. 가령, 대공이 선대 대공의 정부였던 라밀라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둥. 그런 소문 말이다.”

    “하, 하오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는 너무 위험한 방법입니다. 차라리…….”

    “뭐, 대단한 대책이라도 떠오르긴 하나? 난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이뿐인 거 같은데.”

    락센은 뱀처럼 웃으며, 테이블 서랍을 열어, 묵직한 주머니를 던졌다.

    “마부에게 이걸 전해 둬. 그대에겐 이 주머니의 5배를 주지.”

    순간, 보좌관의 얼굴색이 바뀌었다. 얼핏 봐도 금화로 가득한 주머니인데, 이의 5배라니! 보좌관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주머니를 품에 넣었다. 어차피 락센의 손에 죽나, 마차 사고로 죽나 라밀라의 신세는 별반 다를 게 없을 거라는 그의 같잖은 판단이었다. 그는 락센에게 넙죽 인사를 하고서 쏜살같이 방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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