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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61화 (60/122)
  • @61화

    “미리안 님은?”

    린느의 물음에 메리와 루비가 주변을 돌아보며 미리안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그녀 주위에 미리안은 없고, 인자하게 미소 짓는 사용인뿐이었다. 린느가 까치발을 짚고 주변을 살피자, 이를 지켜보던 밀러가 나직이 일렀다.

    “오자마자 일하는 건가. 미리안 걱정은 안나에게 맡기고 그대는 올라가서 쉬도록 해.”

    “그렇지만 미리안 님이 인사도 거른 건 이상해요. 저라도 찾아볼게요.”

    밀러는 얕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프레이 영애가 왔으니, 대화 중일 테지. 오랜만에 친우를 만났으니 대화도 길어질 테고. 그러니, 그대도 마음 놓고 여독을 풀어.”

    프레이가 대공저에 왔다는 말에 린느는 눈꺼풀을 높게 뜨며 놀랐다. 하긴, 그동안 조용하긴 했지. 린느는 될 수 있으면 프레이 영애와 마주치지 말아야겠단 생각에 어서 방으로 향했다. 프레이 영애와 마지막 추억이 썩 좋지 못해서였다.

    노을빛이 잘 드는 살롱에서 입씨름을 대차게 한 탓인데, 어디 그때 적당히 밀어붙였던가? 프레이 얼굴이 희게 질릴 만큼 겁을 줬으니, 다시 마주치지 않는 게 서로 좋을 테지. 린느는 메리와 루비에게 뒷마당에 놀러 와 봤느냐 물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 * *

    곧 있으면 린느가 대공저로 올 시간인데, 프레이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여 미리안은 마음이 급해졌다. 게다가, 무슨 연유인지 조용한 대공저가 한바탕 시끄럽다가 다시 잦아들었으니. 벌써, 린느가 대공저에 온 건 아닌지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미리안은 프레이를 앞에 두고 창문을 힐끔거렸다. 그렇게 해 봐야 창문 밖이 보일 리가 없는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공저 생활은 불편하지 않으시고요?”

    미리안은 프레이의 물음에 찻잔을 들이켜는 척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양심에 찔리는 대답은 말이 아니라 고개로 답하며 여느 영애들의 흉내를 냈다. 이에 프레이는 엄마처럼 한숨을 내쉬며 미리안을 타박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초조해 보이는지 모르겠군요. 각하께선요?”

    “각하께선 늘 같으시죠.”

    프레이는 미리안의 눈을 빤히 바라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이렇게 물어본다고 속사정을 말할 미리안이 아니다. 남에게 피해 끼치기 싫어하는 성정에다 착하고 순한 미리안이 아닌가. 같은 백작가 출신이니 말을 놓으래도 미리안은 저 같은 사생아가 어떻게 말을 편히 하겠느냐며 줄곧 말을 높여 왔다. 그렇게 곧고 착한 사람이 남의 말을 담을 수나 있을까? 프레이는 속이 아픈 동시에 화가 치밀었다.

    ‘여우 같은 것.’

    대공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스토킹을 하던 세르트 영애가 결국, 미리안의 자리를 뺏었다. 남의 걸 뺏은 주제에 제 것이라며 유세 떠는 모습을 볼 생각에 속이 다 시큰거렸다. 불쌍한 미리안! 프레이는 입술을 짓씹으며 타박했다.

    “그 연회장에 세르트 영애가 아니라, 미리안 님이 가셨어야 했어요.”

    “아, 안 그래도 각하께선 함께 가겠느냐 물으셨는데… 제가 참석하지 않은 거예요.”

    프레이는 그게 무슨 말이냐며 크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얼굴에 당혹감과 화가 어우러져 있었다.

    “저는 남아서 할 게 있어서……. 아무튼,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린느 님도 얼마나 제게 잘해 주시는데요. 요즘은 대공저에 종일 있어도 답답하지도 않아요.”

    “하! 세르트 영애가 미리안 님께 잘 대해 준다고요? 지나가던 행인들이 손가락질하며 웃겠어요. 왜, 아주 두 분이 친우가 되시죠?”

    “이미 친우인걸요?”

    미리안은 린느의 따듯한 정을 떠올리며 뺨을 붉혔다. 그 모습에 프레이는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헛웃음을 삼키지 못하고 뱉었다. 세르트 영애와 친우를 맺었다니! 세상에, 모든 소문은 다 믿어도 이 사실만큼은 믿을 수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도 미리안을 향해 악을 품던 세르트 영애가 아니던가!

    “아, 아, 아니 그럴 수가 없어요. 미리안 님께선 워낙 온화한…….”

    “아니에요. 저 같은 모자란 사람을 린느 님께선 아무런 차별도 없이 대해 주시는걸요? 프레이 님만큼이나 다정하신 분이에요. 게다가 얼마나 똑똑하신데요. 못하시는 게 없으셔요!”

    프레이는 미리안이 린느에게 세뇌를 당한 게 아닌지 의심마저 들었다. 서로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지도 의심스러웠으며, 한편으론 대공저 생활이 얼마나 힘들면 세르트 영애에게 의지하는지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이용당하고 있는 게 분명해. 못된 게 미리안을 이용해서 각하 앞에서 요사를 떨었겠지.’

    대공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마음을 열었고, 그래서 두 사람이 연회 시즌에 락센의 연회장에 참석했을 테지!

    ‘아주 무지막지한 년이야. 미리안처럼 착한 사람이 어떻게 그걸 이겨내!’

    프레이도 사교계에서 드레스 좀 흔들어 봤으나, 세르트 영애에게 단단히 굴욕을 당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 세르트 영애를 미리안이 무슨 수로 이기겠냐는 말이다.

    “제가 이런 말씀은 드리지 않으려 했는데. 미리안 님, 제가 드리는 말씀 잘 듣고 판단하세요.”

    “……네.”

    미리안은 이 말만 들어 주면 프레이 영애가 그만 저택으로 돌아갈 거란 생각에, 무심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줬다. 프레이는 미리안의 귀에 대고 그간 세르트 영애의 악행을 모조리 고백했고, 미리안의 붉은 눈동자는 쉴 틈 없이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간 프레이 영애 자신이 린느에게 당한 일도 낱낱이 고발했다. 미리안의 작은 귀가 붉게 달아오를 때까지 프레이는 미리안을 놔주지 않았다.

    ‘미리안도 사실은 알아야지.’

    프레이는 세르트 영애를 향해 코웃음을 쳐 주며, 자리에 다시 앉았다. 미리안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자그마한 두 손은 가슴께에 얹어졌고, 커다란 눈망울은 미세하게 떨렸다. 프레이는 잠시 그런 미리안을 바라보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때, 미리안의 작은 손이 프레이의 손길을 톡 쳤다.

    “마,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린느 님께 물어보고 판단할게요.”

    “네? 아, 아니, 물어볼 것도 없어요. 정말 모두 사실이니까요! 제 말을 못 믿겠다면, 다른 분들께도 여쭤보세요. 어차피 모두 같은 말을 할 테니까요.”

    미리안은 결연에 찬 눈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니까요. 그러니, 린느 님께 직접 물어보고 나서…….”

    “하, 그게 모두 사실이라고 세르트 영애께서 말씀하시겠어요? 일단 아니라고 발뺌하겠죠. 미리안, 저는 미리안의 행복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예요.”

    미리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눈으로 프레이를 바라봤다. 그 탓에 프레이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헛기침하며 시선을 뗐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미리안은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날 선 검지로 문을 가리켰다.

    “이만 가 주세요.”

    프레이는 미리안의 행태에 기함했다. 무엇보다도 웃음만 짓던 그녀의 눈매가 매섭게 올라가자, 프레이는 말도 붙이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미리안 님께 제가 못 할 말씀을 드린 거 같아 마음이 무겁네요. 미안해요. 저는 미리안 님께서 진실을 알고 계셔야 한다 생각되어서요.”

    뭐가 미안한 건지 프레이 자신도 알지 못했지만, 미리안이 저토록 상처받은 얼굴을 하니 미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프레이는 그대로 문밖으로 쫓겨났고, 미리안은 여느 때와 달리 배웅조차 해 주지 않았다. 그렇다 해서 방문 너머로 미리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인기척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할 뿐이었다.

    ‘그렇게 충격적인가? 참나, 나한테 하던 짓 절반만 미리안한테 했어도 저렇게 놀라지도 않을 텐데. 얼마나, 구워삶아 놨으면 착한 미리안이 저렇게 충격을 받을까?’

    프레이는 린느를 향해 비난하며 중앙 계단 아래로 향했다. 절반쯤 내려왔을 때, 뒤로 돌아 꾹 닫혀 있는 미리안의 방을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프레이는 다시 대공저 로비로 향했다.

    미리안은 프레이가 떠난 자리에 그대로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물론, 프레이가 한 말 중에서 과한 일들도 있었으나 그게 그렇게 힐난받을 일인가?

    ‘그러게 왜 먼저 시비를 거셨을까?’

    가만히 있는 린느에게 샴페인 잔을 퍼부으려던 건 프레이인걸? 게다가, 살롱에서도 못 본 척 지나치면 되는 걸, 굳이 린느의 신경을 거스른 것도 프레이가 먼저였다. 그런데도 프레이는 린느의 잘못만 부풀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미리안은 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린느 님은 내가 미우셨을까? 그래서 44장씩이나 행운의 편지를…….’

    책상에 앉아 행운의 편지를 44장씩이나 쓰는 모습이 아른거려 귀여웠다. 물론, 완벽한 그녀가 그 목석같은 대공을 사랑해 마지않아 쫓아다녔다니 당황스럽기 그지없다만…….

    ‘그럴 리가 없잖아.’

    미리안이 목격한 두 사람의 모습은, 누가 봐도 원수지간이었다. 게다가, 린느는 밀러의 주위를 맴돌기는커녕 신경조차 쓰지 않았는걸? 어디 그뿐인가. 린느가 대공의 말이라면 쉬지 않고 말대답을 하는 통에 밀러가 오히려 당황해하는 일도 적잖았는데, 린느가 밀러의 스토커였다고? 미리안은 놀란 마음을 다스리며 그럴 리가 없다 확신했다.

    “아!”

    미리안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이면 린느가 이미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해 문으로 향했다.

    덜컥.

    문을 열자마자 미리안이 목격한 건, 환하게 웃는 린느였다.

    “리, 린느……! 님…?”

    미리안은 린느 곁에 있는 밀러를 발견하고선, 표정을 단숨에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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